두란노 출판사에서 나오는 [그말씀] 2010년 10월호에 김근주, 전성민 연구위원의 글이 실렸습니다.
김근주 - 레위기와 구제
전성민 - 열왕기에 나타난 부
http://www.duranno.com/moksin/gms_detail.asp?CTS_YER=2008&CTS_MON=4&CTS_ID=82487
[레위기와 구제] 전문 보기
레위기와 구제
우리가 ‘구제’ 혹은 ‘나눔’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우리 주위에 도움을 필요로 하는 ‘가난한 이웃’이 존재한다는 현실을 전제로 한다. 아울러 구약의 본문들을 통해 가난한 이웃에 대한 구제를 다룬다는 것은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함께 모시고 살지만, 여전히 가난한 이웃들이 존재한다는 현실도 전제된다. 그러므로 구제 혹은 나눔이라는 주제는 ‘현실’, 그것도 경제적인 현실을 대상으로 다룬다고 할 수 있다. 레위기를 비롯한 성경 본문들에서 이 주제를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를 다루는 것은 성경 본문들이 그저 정신적인 문제나 ‘영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경제적 현실과 같은 지극히 일상적인 삶의 현실을 포괄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레위기가 ‘하늘’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땅’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단순한 사실의 인식이야말로 레위기에 나타난 구제와 나눔이라는 주제에 대한 논의의 출발점이다.
레위기의 핵심 메시지로서의 거룩
레위기의 내용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16장까지의 내용에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삶을 다루고 있다면, 17~27장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을 다룬다고 할 수 있다.
전 반부의 중심 내용은 제사와 정결이며, 여호와께 나아갈 때에 어떤 예물을, 어떻게 구별하여 드려야 하는지, 부정하게 된 이가 어떻게 정결을 회복하고 여호와께 예물을 드릴 수 있는지를 다룬다. 그에 비해 후반부에서는 제사와 정결에 관한 문제가 군데군데 나오지만, 기본적으로 일상생활 속에서 어떻게 여호와께서 원하시는 구별된 삶을 살아갈 것인지의 관점에서 전개된다고 할 수 있다. 이를 고려하면, 1~16장은 거룩을 회복하기 위한 제사와 정결에 관한 규례들을 다루고 있으며, 17~27장은 일상 속에서 거룩을 유지하기 위한 규례들을 다룬다고 표현할 수 있다. 이 두 부분을 관통하고 있는 주제가 있다면 여호와 앞에서 살아가는 거룩한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며, 거룩이야말로 레위기의 핵심 개념이라고 말할 수 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 19:2).
레위기의 후반부인 17장 이후의 본문들은 일상생활 속에서 거룩한 삶의 유지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여기에는 이 글이 초점을 두는 구제에 관한 내용들도 많이 포함된다. 17장 이후의 내용 역시 거룩한 삶을 다룬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우리가 흔히 ‘거룩한 제사’와 ‘이웃을 돕는 윤리적 삶’을 분리시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전자는 ‘영적인 측면’이라면, 후자는 ‘사회적 측면’이라고 여겨지곤 한다. 그러다 보니 레위기에 나타난 구제 혹은 가난한 이웃에 대한 섬김을 다룰 때도, ‘영적인 규례’들과 구별되는 어떤 ‘사회적인 규례’로서 다루곤 한다. 그렇지만 레위기 자체는 이러한 구별을 일체 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사실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신구약성경 그 어디에서도 신앙의 ‘영적인 측면’과 ‘사회적인 측면’을 구별하고 있지 않다.
하나의 신앙 체계가 신을 어떻게 예배할 것인가에만 전적으로 집중하지 않고 사회 속에서 어떻게 살아갈지를 다루는 윤리를 포괄하고 있다는 점은 세계 대부분의 종교들의 특징일 것이다. 이스라엘의 배경이 되는 고대 중동 종교들 역시 신을 예배하는 제의와 일상의 윤리라는 두 중심을 지니고 있다. 그러면 이스라엘 신앙, 참하나님이신 여호와를 섬기는 이스라엘의 신앙이 중동의 고대 종교들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이 에 대해 밀그롬이 그의 레위기 연구를 통해 내리는 대답은 명쾌하다. “이스라엘의 독특한 것은 거룩이라는 제목 아래에 윤리와 제의를 포함시킨 것이다”(Milgrom 2000: 1629). 다시 말해 ‘거룩’을 어떤 제의적인 개념으로 보면서 제의적 측면과 연관된 ‘거룩’과 사회적 삶을 말하는 ‘윤리’를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 안에 제의적 차원과 윤리적 차원을 모두 포함하는 것으로 보았다는 점에 이스라엘 신앙의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가난한 이웃에 대한 구제는 신앙의 ‘사회적 차원’ 따위가 아니다. 구제는 거룩한 삶이며, 여호와 하나님을 고백하는 신앙의 본질에 속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지만, 가난한 이웃이나 사회적인 약자들도 잘 돌아보자’는 것은 레위기적이지 않다. 이렇게 신앙 고백과 이웃에 대한 나눔을 분리하는 한, 한국 교회는 언제까지나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삶을 신앙의 보조적인 차원으로 여길 것이며,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차원으로 여길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 교회의 위기는 단지 ‘행위’나 실천의 결여에 있지 않다. 근본적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거룩한 삶의 결여에 있다. 레위기는 가난한 이웃을 돌보는 삶이 여호와 앞에 살아가는 거룩한 삶의 본질적인 측면을 보여 준다고 선언한다.
율법 규정에 담긴 구제
레위기에 나타난 세부적인 구제 관련 본문들을 살펴보기에 앞서 염두에 두어야 할 또 다른 점은 구제 관련 본문들이 율법 규정으로 제시된다는 점이다. 레위기는 가난한 이웃을 돕고 나누는 삶에 대해 우리의 양심과 마음에 맡겨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법령들로 제정해 두고 있다. 이 부분에서도 우리 교회들에 흔히 있는 통념에 대해 지적할 것이 있다. 우리는 보통 제도나 구조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사람의 변화, 인격의 변화라고 여긴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기독교 교회는 사회나 세상의 틀과 구조를 바꾸는 일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고, 언제나 사람의 변화에 관심을 기울여 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좋은 틀과 구조를 지니고 있더라도, 사람이 바뀌지 않으면 얼마든지 그 구조들이 본연의 의미를 잃은 채 악용되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사람의 변화를 중시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희년을 제정하고 있는 레위기 25장에서 계속 반복되는 것은 “여호와를 경외하라”는 표현이다.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으면, 그 좋은 희년조차도 유명무실해져 버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위기와 구약성경이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구체적인 법령으로 제정하고 있다는 점은 충분히 주목되어야 한다. 법령 제정은 한 사회의 기본적인 틀과 구조를 형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의 변화가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 끝내지 않고, 그러한 변화를 담아내고 반영시킬 수 있는 구조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때로 우리의 마음은 메마르고 강퍅하여 이웃을 전혀 돌아보지 않을 때도 있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레위기는 이웃에 대한 나눔과 돌봄을 법으로 규정하면서 이웃을 섬기는 것이 나 자신의 인격과 마음 상태에 따라 좌우되지 않도록 한다. 우리 자신의 변덕스러운 마음에 맡겨 두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에게서 나온 법을 따라 제도와 구조를 만들어 둠으로써, 우리의 변덕스러운 마음을 구조와 틀에 따라 순종하도록 해 두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그저 마음의 변화, 사람의 변화만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는 이들이 아니라고 할 것이다. 여호와를 경외하기에, 사회의 틀과 구조를 바꾸어 우리의 악한 본성에 좌우되지 않고 하나님이 정하신 틀을 따라 그 악한 본성을 순종시키도록 애쓰는 이들이 그리스도인들인 것이다. 이를 생각하면, 구조나 사회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 실제로는 여호와를 의지하고 순종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그래서 개인의 변화와 구조의 변화는 분리되어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이들이 함께 추진하고 애써야 할 방향임을 알 수 있다.
레위기에 나타난 구제
이상의 논의를 정리하면, 가난한 이웃에 대한 구제는 신앙의 사회적 측면이 아니라 여호와를 섬기는 신앙의 본질적 측면, 즉 거룩의 한 부분이라는 것, 그리고 개인의 변화를 추구할 뿐 아니라 법으로 제정함을 통해 사회의 구조와 틀을 형성하려고 한다는 것, 이 두 가지가 레위기의 구제 문제를 바라보는 기본적인 안목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본격적으로 레위기의 본문들을 보면서 가난한 이웃을 섬기고 나누는 구제가 어떻게 반영되어 있는지 살펴보자.
1. 제사 제물
레위기 전체 내용의 가장 기본적인 틀을 이루는 것은 제사 제도다. 레위기의 처음 일곱 개의 장들에서는 다섯 가지 제사에 대해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으며, 이 다섯 제사는 8장 이후 레위기의 내용에서 반복된다. 모든 제사의 근본은 여호와께 무엇을 드리려는 예배자의 마음과 결단에 있다고 할 수 있다(레 1:2).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려는 마음에서 제사가 비롯된다는 점에서, 예배자의 경제적 형편에 따라 제물의 종류가 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예배자의 경제적인 형편으로 인해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려는 마음에 지장이나 걸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기 때문이다.
번제의 경우 흠 없는 수컷의 소나 양을 그 제물로 삼는 것이 기본적이다. 그렇지만 산비둘기나 집비둘기 새끼로 번제를 드리는 경우도 아무런 구별이나 차별 없이 번제 규정 속에 서술된다(레 1:14~17). 이 번제 본문에는 어떤 경우에 비둘기로 제물을 삼는지 언급되지 않는다. 그러나 속죄제의 경우, 예배자의 경제적인 여력이 미치지 못할 때 암염소나 어린 양 대신 비둘기로 드리도록 명시하고 있다는 점(레 5:7)이 번제의 비둘기 제물 이해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자가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려고 할 때는 아마도 훨씬 비싸고 값나가는 제물이었을 소나 양으로만 드려야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경제적인 형편과 처지에 따라 산비둘기나 집비둘기 새끼로 제물을 삼을 수 있었다. 그리고 소나 양으로 드린 번제에 대한 평가(레 1:9, 13)와 완전히 동일한 평가가 비둘기로 드린 제사에도 적용되는 것을 1:17에서 볼 수 있다.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마음은 예배자의 경제적인 형편에 적합한 제물을 통해 온전하게 구현되며, 여호와께서 기뻐 받으시는 제물이 된다. 이렇게 가난한 이들을 위한 제물의 종류가 언급된다는 점은 경제적인 처지가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는 데 아무런 걸림돌이 아님을 보여 준다. 그리고 가난한 이웃에 대한 배려는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삶에서 아주 중요한 본질적인 요소임도 알려 준다.
번제물에서 볼 수 있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배려는 속죄제에서도 나타난다. 속죄제의 제물의 경우 일반 평민들은 암염소로 제물을 삼도록 되어 있지만, 여력이 미치지 못할 경우 어린 양을 제물로 삼을 수 있었고(레 4:32~35), 이마저도 안 되면 번제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산비둘기나 집비둘기 새끼로 속죄 제물을 삼을 수 있었다(레 5:7~10). 놀라운 것은 비둘기조차도 감당하기 어려운 이들에 대한 배려가 언급된다는 점이다. 5:11~13에 따르면 비둘기를 속죄제로 드릴 수 없을 만큼 가난한 이들은 곡식의 고운 가루 십분의 일 에바를 속죄 제물로 드리도록 규정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제사의 중대한 원칙의 하나는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 레 17:11; 민 35:33)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동물의 피가 포함되어 있지 않는 곡식 가루로 드린 제사임에도 불구하고 동물로 드린 속죄제와 동일하게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고 선언된다(레 5:13). 예배자가 비둘기조차 드릴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한 이라면, 피가 생명을 속한다는 가장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원칙조차 넘어설 정도로 피 흘림이 포함되지 않는 제사가 제시되고 있다는 점에서,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는 진정한 힘은 근본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곡식으로 드리는 속죄제에서 우리는 가난한 이들을 배려하기 위해 피 흘림과 사죄의 원칙까지 넘어서는 하나님의 규례를 볼 수 있다. 이 점에서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이와 연관해서 생각해 볼 만한 점이 한 가지 있는데, 랍비들의 전통에서는 소제를 가난한 이들이 드리는 번제로 여긴다는 점이다(Milgrom 1991: 195~196). 위에서 보았듯이 속죄제의 경우, 예배자의 경제적인 형편에 따라 수송아지에서부터 비둘기까지 예물이 다양화되어 있고, 비둘기마저 낼 수 없는 이들을 위해 곡식 가루로 속죄제를 드리도록 되어 있었다. 번제의 마지막이 비둘기에 대한 규정이었고, 이어 2장에서 곡식의 소제가 언급되는 배열은 번제와 소제가 서로 연관된다는 주장을 그럴듯하게 한다. 그럼에도 소제가 화목제와 연관해서 드려지는 경우가 있다는 점에서(민 15:1~10), 소제와 번제만을 연결시키는 것은 무리가 있을 수 있지만, 소제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제사였다는 점은 유의할 만하다.
가난한 이들이 드리는 제물에 대한 배려는 나병에서 나은 이들이 드리는 제물에서도 볼 수 있다. 나병에서 회복된 자들은 어린 수양과 기름 한 록의 속건제, 어린 암양의 속죄제, 어린 수양의 속죄제 그리고 고운 가루 에바 십분의 삼에 기름 섞은 소제물의 소제를 드린다(레 14:10~20). 그러나 그의 형편이 이에 미치지 못한다면, 어린 수양의 속건제, 비둘기 두 마리로 드리는 속죄제와 번제 그리고 고운 가루 십분의 일 에바에 기름 섞은 소제물을 드리면 되었다.
제사는 사람이 거룩하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기본적인 체계다. 거룩과 연관해서 가장 기본적인 사항인 제사에 관한 내용들을 다루면서 우리 하나님의 법을 전하고 있는 레위기는 끊임없이 가난한 이들이 하나님께 드릴 예물에 대해 별도의 규정을 마련한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자신의 경제적인 형편과 연관된다. 수소로 드리는 번제 제물 규정과 비둘기 새끼로 드리는 번제 제물 규정은 아무런 차이가 없다.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소로 드린 번제물과 비둘기로 드린 번제물은 그저 예배자의 하나님을 향한 마음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이를 보건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은 제물 자체라기보다는 제물에 담긴 예배자의 마음이요 진심일 것이다. 이를 생각하면 가난한 이웃을 위한 구제보다 우선되어야 할 것은 하나님께 예배함에 일체 경제적인 형편이나 처지가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더 많은 헌금이 더 정성스러운 것이라는 식의 암시만으로도 얼마든지 가난한 교인들에게는 상처와 부담이 될 수 있다. 한 신앙 공동체 내에서 생활하는데 경제적 형편 때문에 헌금을 비롯한 교회 생활에 조금이라도 걸림이 생긴다면 그곳은 하나님의 교회일 수 없을 것이다. 레위기의 제사 체계는 가난이 하나님께 나아오는 데 아무런 걸림도 지장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거듭 확인시켜 준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제사 제물에서의 배려는 가난이 하나님의 형벌이나 심판과는 무관한 것임도 전제한다고 할 수 있다.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부유하면 부유한 대로, 다만 하나님께 제사할 뿐이다.
2. 동해복수법(同害復讐法)
레위기 24:10~23은 이웃과의 다툼 중에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한 슬로밋의 아들에 대한 처벌을 다룬다. 이와 연관하여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라고 요약할 수 있는 ‘동해복수법’[혹은 ‘탈리온법’(lex talionis)]이 제시된다(레 24:17~22). 동일한 내용이 출애굽기 21:23~25와 신명기 19:21에도 나타난다. 상대에게 해를 끼친 여러 경우들을 다루면서 이에 대한 근본 원칙으로 “눈에는 눈으로” 법이 제시되는 출애굽기나 신명기 본문의 맥락에 비해, 레위기의 경우 여호와를 저주한 자에 대한 처벌의 맥락에서 이 규정이 다루어진다. 사람을 죽인 이는 반드시 죽게 되고, 상해를 입혔으면 자신도 상해를 입게 된다. 동일한 원칙으로, 그의 하나님을 저주하면 그 죄에 마땅하게 그는 그가 속했던 온 회중에 의해 돌로 쳐 죽임을 당하게 된다. 동해복수법의 맥락에 하나님을 저주한 사건이 놓여 있다는 점은 이 일이 얼마나 큰 죄인지를 보여 준다. 이웃과의 분쟁 상황에서 이러한 저주의 말이 내뱉어졌겠지만, 하나님께 대한 저주는 이스라엘의 존재의 근본을 뒤엎는 것이다.
‘동해복수법’은 흔히 생각되듯 원시적인 법의 형태라기보다는, 오히려 한걸음 발전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힘 있고 부유한 자라도 가난한 이의 눈을 다치게 하면 오직 자신의 눈으로만 대가를 치러야 한다. 현실에서는 힘 있고 부유한 자의 행동이 돈이나 권력으로 무마되는 경우가 다반사였을 것이라는 점에서 동해복수법은 모든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법 앞에서 온전히 평등함을 확실히 증거한다. 처벌에 대한 규정을 명확히 함을 통해 터무니없이 지나친 복수를 막고, 가난한 자와 부자 사이의 가능한 차별적 집행도 막아 준다. 랍비들은 이 원칙을 가리켜 “내가 재는 자를 가지고 하나님께서 나를 재실 것이다”라고 요약했다(Milgrom 2001: 2133). 이를 생각하면 이 원칙은 다음과 같은 신약성경 구절들 안에도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 7:2; 또한 막 4:24; 눅 6:38).
구약성경이 전하는 동해복수법은 여호와 앞에서 지위의 고하나 빈부가 고려 사항이 될 수 없음을 명확히 하고 있다. 이 점은 24:22의 “거류민에게든지 본토인에게든지 그 법을 동일하게 할 것”이라는 규정에서 엿볼 수 있다. 압도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처해 있는 거류민(외국인)일지라도 동등하게 이 법이 적용되어서 외국인을 보호한다. 아울러 상대에게 끼친 해를 동일한 해로 갚아야 한다는 것은 상대의 지체가 나의 지체와 동일함을 깨닫게 한다. 이를 생각하면 “눈에는 눈으로”는 ‘내가 원치 않는 것을 남에게 행하지 않는다’는 원리, 나아가 ‘내가 받기를 원하는 것을 남에게 행한다’는 원리와도 본질적으로 통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동일한 처벌에 대한 강조의 근본 원칙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여기는 사랑과 자비의 마음이다.
주님의 산상수훈 말씀은 이와 연관된다(마 5:38~42). 흔히 주님께서 “눈에는 눈으로”라는 법을 폐하시고 사랑의 법을 내세우신 것으로 생각하지만, 이는 적절하지 않다. 위에서 보았듯이, 복음서에도 이 원칙이 여전히 사용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태복음에서의 이 말씀들의 기본 전제가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는 선언(마 5:17)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에도 분명하다. 유대인들은 복수의 원칙으로 사용하지만, 주님께서는 이 원칙을 사랑의 원칙으로 사용하신다. 누군가가 나의 오른편 뺨을 때릴 때 주께서 명하신 것은 그의 오른편 뺨을 때리는 것이 아니라 나의 왼편 뺨도 돌려 대는 것이었다. 주님에게 모든 율법을 해석하는 근본 원칙은 사랑이다. 그러므로 구약의 율법은 사랑의 원칙을 통해 완전하게 된다. 이것은 불완전한 것이 완전하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 완전한 모습이 드러나고 실현된다는 의미라고 볼 수 있다.
3. 서원 예물
하나님 께 자신을 드려 서원한 이스라엘은 그에 상응하는 예물로 그 값을 드려야 했다(레 27:1~8). 20세부터 60세의 남자는 은 오십 세겔, 여자는 삼십 세겔, 5세부터 20세까지의 남자는 이십 세겔, 여자는 열 세겔, 그리고 1개월~5세의 남자는 오 세겔, 여자는 삼 세겔을 내야 한다. 성년이 된 이스라엘 사람이 낸 성전세가 반 세겔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서원을 이행하기 위해 치르는 액수는 결코 적지 않다. 당시 노동자들의 한 달 월급이 한 세겔이었음을 생각할 때, 이 본문은 이스라엘에게 성급하게 서원하지 말 것을 권하는 기능을 한다고 볼 수도 있다(Wenham: 337, 잠 20:25; 전 5:2). 그럼에도 하나님을 향해 마음과 결단이 있어 서원했다면 그 실시를 늦추지 말아야 한다(신 23:23; 전 5:4). 그리고 가난이 하나님을 향한 서원에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되기에, 27:8에서는 제사장과의 협의하에 서원자의 형편에 맞게 값을 정하도록 부가 규정이 제정되었다. 구체적인 액수는 언급되지 않았기에 재량의 여지가 있지만, 원칙은 분명하다. 하나님께 작정한 그의 마음이 드려야 할 서원 예물의 양으로 인해 결코 걸림이 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4. 가난한 이웃과의 관계(19장)
레위기 17장 이후는 여호와 앞에 나아가 그 정결함과 거룩함을 회복한 이스라엘이 어떻게 일상의 삶 속에서 여호와 앞에서 거룩하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다룬다. 하나님께서는 천하 만민 가운데 이스라엘을 선택하셨고, 그들에게 음식이나 세상의 풍습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고 여호와께서 명하신 규례와 법도를 따라 살기를 명하신다. 17장 이후의 본문은 이러한 규례와 법도들을 소개한다. 17장 이후의 본문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중요한 표현인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혹은 “나는 여호와니라”는 이 본문들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이 표현들은 16장 이전에서는 동물의 정결 규례의 결론 부분인 11:45에서 단 한 번 쓰이지만, 17장 이후에서는 여러 차례 쓰이며(18:2, 4, 5, 6, 21, 30; 20:7, 8, 24; 22:3, 8, 9, 30, 31, 32, 33; 23:22, 43; 24:22; 25:17, 38, 55; 26:1, 2, 44, 45), 특히 19장에서는 이 표현들이 매 단락마다 반복적으로 사용된다(19:2, 3, 10, 12, 14, 16, 18, 25, 28, 30, 31, 32, 34, 36, 37). 19장에서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는 1+7번 쓰이고, 짧은 형태인 “나는 여호와니라”는 7+1번 쓰인다(Milgrom 2000: 1324). 전자의 경우 처음에 나오는 2절은 표제와 같은 역할을 하고 아무런 율법이 부착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다음에 나오는 표현들과 구별된다. 한편 후자의 경우, 마지막 37절에 쓰인 표현은 결론 역할을 하고 있으며, 역시 아무런 율법이 부착되어 있지 않다. 이러한 묘한 대응은 결코 우연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표현들은 이스라엘이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를 보여 준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불러내셨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셨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세상 가운데서 오직 여호와를 섬기며 여호와께서 명하신 규례와 법도를 따라 행해야 한다. 다시 말해 이 규례들을 지키는 유일한 이유는 여호와께서 그들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앞부분에서 인용했던 19:2는 19장의 특별한 성격과 역할을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절에서 쓰이고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라는 표현도 주목할 만하다. 이 표현은 출애굽기에서는 빈번하게 쓰이고(출 12:3, 6, 19, 47; 16:1, 2, 9, 10; 17:1; 35:1, 4), 레위기에서는 16장까지 3회(레 4:13; 10:6; 16:5) 쓰이지만, 17장 이후로는 오직 19:2에서만 쓰인다. 이 점은 19장이 지닌 중요성을 보여 준다. 복수형의 “너희”를 향해 명령이 주어진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온 이스라엘을 하나님 앞에 세운다.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거룩은 한 사람 한 사람의 거룩한 삶이면서, 하나님 앞에 선 이스라엘 전체의 거룩이기도 하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불러내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시겠다는 뜻과도 통한다(출 19:6). 그러므로 이러한 명령은 공동체적인 순종과 변화를 요구한다. 19장에서 여러 다양한 규례들이 한데 모여 있는데, 이 가운데 많은 규례들이 가난한 이웃에 대한 배려와 나눔을 명령한다.
1) 밭모퉁이를 남겨 두라(19:9~10)
9~10절은 추수 때에 이스라엘이 지킬 거룩한 삶의 규례를 전한다. 추수할 때 이스라엘은 자신이 지닌 밭의 모퉁이는 수확하지 않고 남겨 두어야 한다. 이 모퉁이가 어느 정도의 크기인지는 본문에 명시되지 않는다. 미쉬나의 경우 최소한 밭의 16분의 1이어야 한다고 제안하지만, 이 역시 수확량, 소유자의 재산 정도, 가난한 자의 필요 정도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도 덧붙이고 있다(Levine 1989: 127). 밭 전체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기업이기에 자신이 다 수확하는 것이 타당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밭모퉁이를 남겨 두게 하신다. 이론적으로 모든 이스라엘이 자신의 기업을 지니고 있지만, 이 본문에서는 현실적으로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기업을 상실한 이들이 있음이 전제된다. 그리고 이스라엘 땅에 몸 붙여 살고 있는 거류민들은 당연히 농사짓고 수확할 땅이 없다는 점도 고려된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자유인은 자신들의 기업 땅에도 이들을 위한 몫을 남겨 두어야 한다. 얼마만큼의 땅을 남겨 놓을지에 대한 고려 사항에 가난한 이들의 필요를 변수로 포함시키는 미쉬나의 언급도 특이하다. 자신의 너무나 당연한 재산권 행사가 가난한 이웃의 필요 때문에 제약되는 셈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에 대한 권리와 가난한 이웃에 대한 배려는 동시에 존재한다. 이를 생각하면 구약성경이 사유 재산 제도를 지지한다고 여기는 주장들은 지나치게 단순화된 주장이라고 할 것이다.
이러한 규례들은 이스라엘이 그 얻은 수확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존재임을 분명히 한다. 아울러 이 글의 서론에서 언급했지만, 가난한 이웃에 대한 이러한 배려를 하나님의 명령의 형태로 담고 있어서 일종의 제도로 만들어 두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이와 유사하지만, 신명기 24:19~22는 땅 소유자의 관대함과 자선에 호소하고 있다고 여겨진다(Milgrom 2000: 1628). 그러나 자선에 대한 호소와 제도적 정비가 확연하게 구별된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가령 흘린 것을 줍지 않는 것이 제도적으로 완비되었다 해도, 땅 소유자가 마음먹는다면 거의 흘리지 않고 수확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신명기 법과 레위기 법을 자선과 제도의 차이로 확정하는 것은 다소 어폐가 있다. 그럼에도 가난한 이웃을 배려하는 것을 개인의 양심에 맡겨 두기보다는 이와 같이 제도와 구조를 통해 확립하는 레위기 율법의 특성을 충분히 음미하는 것은 중요하다. 레위기 19장의 본문은 땅 소유자가 자신이 도울 가난한 이를 선택하지 않으며, 마땅한 의무로 한 모퉁이를 남겨 두고 마땅한 의무로 흘린 것을 다 줍지 않는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살게 하시는 분이요, 우리 역시 나그네였음을 고백하는 경건한 신앙이 구체적인 사회적 제도와 입법을 통해 구현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제도야말로 여호와 앞에서 살아가는 ‘거룩’이다. 가난한 이웃에 대한 사회적 책임이라는 세속적인 것 같은 개념이 가장 종교적인 단어인 ‘거룩’으로 표현된다.
포도원에 대해서도 동일한 원리가 적용된다. 포도 수확을 할 때 깡그리 수확해서는 안 되며 수확 도중에 땅에 떨어진 것들은 주워서도 안 된다. 남은 포도들과 떨어진 포도들은 모두 포도원을 지니지 못한 가난한 이들과 거류민들을 위한 것이다.
9절과 10절은 모두 목적어가 먼저 나오고 동사가 뒤에 나온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이 목적어들에는 밭모퉁이, 떨어진 이삭, 포도원, 포도원의 떨어진 열매,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이 있다. 이것을 보면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들에게 돌아가는 몫이 무엇인지 명확해진다. 이들은 자신들이 농사지을 땅이 없는 사람들이고, 땅과 포도원은 이미 주인이 있지만, 그 땅과 그 포도원에서 그 모퉁이들은 그 주인들의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의 것이 된다. 경제적으로 땅과 포도원을 지닌 사람들에게 손실이 될 수 있지만, 10절의 마지막에 붙어 있는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는 이스라엘이 무엇으로 사는지 그리고 누구 앞에서 살아가는지를 확인시켜 준다.
2) 네 이웃을 억압하지 말라(19:13~14)
13 절은 이웃에 대한 “억압”과 “착취”에 대해 다루고 있다. 그저 “이웃”이라고 표현되었지만, 이어지는 말을 볼 때, 자신보다 훨씬 가난하고 연약한 이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를 “품꾼”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품꾼”은 경제적으로 곤궁하게 되어 다른 집에 노동력을 제공하고 그에 대한 삯을 받는 이다. 이스라엘 가운데 같이 사는 거류민들이 이렇게 품꾼이 되는 경우도 있었고, 이스라엘 사람이 가난하게 되어 다른 이스라엘 사람에게 품꾼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품꾼은 전적으로 경제적인 곤경으로 인해 발생하게 된다. 품꾼을 올바르게 대하는 것은 여기저기에서 언급되고 있다. 다음은 신명기의 한 구절이다.
곤궁하고 빈한한 품꾼은 너희 형제든지 네 땅 성문 안에 우거하는 객이든지 그를 ‘학대하지 말며’ 그 품삯을 당일에 주고 해 진 후까지 미루지 말라 이는 그가 가난하므로 그 품삯을 간절히 바람이라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지 않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네게 죄가 될 것임이라(신 24:14~15).
레위기에서 “억압하지 말라”고 번역된 표현이 신명기에서는 “학대하지 말라”로 옮겨졌다. 같은 이스라엘 사람이든지, 아니면 그 땅에 사는 나그네이든지, 경제적인 필요 때문에 남의 품꾼이 된 사람이 있으며, 그를 억압하거나 학대하지 않는 것은 무엇보다도 제 날에 정당한 그의 노동의 대가를 지급하는 것이다. 억압과 착취라는 표현에서 우리는 어떤 거창한 폭정과 탄압 같은 것을 생각하지만, 이스라엘의 일상에서 이들은 흔히 발생하고 쉽게 볼 수 있는 일들이었다. 일을 한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몫을 제때 받아야 하지만, 이것을 제 날짜에 지급하지 않고 연기하는 것이 ‘억압’, 즉 어떤 힘이나 권세를 가지고 상대를 누르는 행위가 된다. 이 구절에서는 품삯이 문제가 되었지만, 품삯이 아닌 어떤 것이든, 상대가 지니지 못한 것을 자신이 지녔을 때, 그것을 이용해 정당한 절차를 제대로 진행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억압이다. 그리고 수고한 이에게 마땅한 대가가 지불되어야 한다. 그것은 자선이나 선행이 아니라 당연하고 마땅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약속한 제 날짜 제 시간에 지급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착취 혹은 도둑질이다. 그 품꾼이 여호와께 이에 대해 부르짖는다면, 하나님께서 그 죄에 대해 품꾼에게 삯을 주지 않은 이를 벌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품꾼의 호소를 들으시는 분이다. 누차 언급했지만, 19장이 이것을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로 제도화시키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그렇지 않으면 품꾼이 마땅히 제 날짜에 품삯 받는 일이 품삯 주는 이의 관대함이나 자선으로 해결하게 되는 경우들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인간이라는 이상은 제도와 구조의 변화라는 현실과 함께 갈 필요가 있다.
가난한 품꾼에게 제대로 품삯이 지급되는 것으로 표현되는 거룩은 지체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 대해서도 드러난다(레 19:14).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사람에 대해 면전에서 좋지 못한 말들을 하는 것은 상대방이 할 수 없는 것을 이용해 조롱하는 행동이다. 또한 앞을 볼 수 없는 사람의 가는 길에 장애물을 놓는 것도 그의 신체적 결함을 비웃고 조롱하는 짓이다. 특히 이 후자는 그러한 조롱이 상대의 신체에 상처와 해를 입히게 되기까지 한다는 점에서 심각하다고 할 수 있다. 상대의 약한 것을 이용해서 조롱하고 저주하지만, 앞 못 보는 이를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사람이야말로 저주받게 된다(신 27:18). 지체 장애를 가진 사람에 대한 레위기의 말씀은 고대 근동에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본문이라는 지적이 있다(Milgrom 2000: 1641). 근동의 경우 의사들이 잘못 치료해 환자의 눈이나 귀를 멀게 한 경우 그에 상응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법령은 있지만, 구약과 같이 이미 장애를 지닌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한 법령들은 뜻밖에도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귀먹은 자와 앞 못 보는 자를 괴롭히지 말 것에 대한 말씀의 결론은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레 19:14)이다. 이것은 귀먹은 자를 저주해도 그 당사자가 들을 수 없다는 점에서, 앞 못 보는 이의 앞길에 장애물을 놓아 그가 넘어지고 쓰러져도 누가 그렇게 했는지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여호와께서 이 모든 것을 보고 계시며, 친히 그들의 보호자가 되심을 선언하는 진술이라고 할 수 있다. 몸에 장애를 가진 이의 장애를 이용해 조롱하고 괴롭히지 않는 까닭은 여호와께서 그들의 귀가 되시고 그들의 눈이 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섬기는 신앙이야말로 이 약한 이들을 괴롭히지 않는 길이다. 거꾸로, 이렇게 연약한 이들을 괴롭힌다면 그는 무엇이라고 고백하든 실제로는 약한 자들의 보호자가 되시는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는 것이다.
13~14절은 약자에 대한 보호라고 얼핏 표현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품꾼에게 품삯을 제때에 주는 것이나 장애를 이용해서 상대를 괴롭히는 것은 보호를 촉구하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사람으로서 받아야 할 정당한 대우를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3) 공의의 재판(19:15~16)
15절은 대칭을 이루도록 배열되어 있다.
A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치 말라
B 가난한 자의 얼굴을 들지 말라
B´ 세력 있는 자의 얼굴을 존중하지 말라
A´ 공의로 너의 이웃을 재판하라
첫 머리(A)에서 “재판”을 뜻하는 ‘미슈파트’가 쓰였고, 그에 대응되는 부분(A´)에서 “공의”를 뜻하는 ‘체데크’가 쓰여 평행을 이루고 있다. 가운데 부분은 모두 ‘얼굴’에 해당하는 단어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잘 대응되어 있다. 그리고 그 첫 문장은 ‘무엇을 하지 말라’는 부정 명령인 데 비해, 대응되는 문장은 보다 적극적으로 ‘무엇을 하라’는 긍정 명령이라는 점도 이 구절의 강조하는 바를 잘 보여 주고 있다. 무엇이 ‘미슈파트’를 해치는 불의가 되는가? 그것은 가난하다고 하여, 혹은 힘 있다 하여 부당하게 판결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재판해야 하는가? 오직 ‘체데크’만이 재판의 기준이다. “가난한 자”와 평행되게 놓여 있는 단어는 히브리어 ‘가돌’이다. 기본적으로 ‘부자’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지만, ‘부’로 인해 생겨나는 힘과 세력 전부를 포괄하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러한 ‘힘 있는 자’ 혹은 ‘세력 있는 자’의 반대편에 있는 “가난한 자”는 힘도 없고 세력도 없는 초라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재판이 벌어졌는데 한쪽에는 아무런 힘도 지니지 못하고 경제적으로도 곤궁한 가난한 사람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힘과 권력, 부귀를 모두 가진 세력 있는 사람이 있다면 대부분의 경우 이 재판은 세력 있는 사람에 대한 존중으로 마무리되기 십상일 것이다.
개역개정은 의역을 하고 있지만, “세력 있는 자라고 두둔하지 말고”는 직역하면 ‘세력 있는 자의 얼굴을 존중하지 말고’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누구누구의 얼굴을 존중하다’는 표현은 늘 부정적인 의미는 아니다. 19:32에서는 이 표현이 긍정적으로 쓰였다.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그 얼굴을 존중해야 할 이들은 노인과 같이 몸이 취약해지고 연약해진 이들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곧잘 이렇게 연약해진 이들의 얼굴을 존중하기보다는 세력이 있고 부유한 이들의 얼굴을 존중하기 일쑤다. 그러나 세력 있는 자들의 얼굴을 존중하지 말라는 것이 힘없고 약한 이들의 얼굴을 세워 주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15절이 명백히 지시하듯이, 가난한 자라고 해서 그 얼굴을 들어 주는 것은 공의에서 벗어난다. 그러므로 가난한 자의 얼굴이든, 세력 있는 자의 얼굴이든, ‘얼굴’은 배제되어야 한다는 것이 재판에서 이루어지는 공의의 핵심이다. 동일한 사고를 출애굽기의 구절에서도 볼 수 있다.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해서 편벽되이 두둔하지 말지니라”(출 23:3). 흔히 이러한 구절들은 힘 있고 부유한 이들을 반대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억울함을 신원할 것을 주장할 때에 반대 구절로 인용되곤 한다. 구약의 많은 구절들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신원하는 것이 공의임을 증거한다(사 1:16~17). 그러나 이러한 구절과 가난한 자라고 해서 두둔하지 말라는 구절은 전혀 대립되지 않는다. 참으로 가난한 자들이 요구하고 찾는 것은 어떤 편파적인 호의나 관심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가난하고 힘이 없음으로 인해 세상에서 억울하고 고통스러운 일을 겪었을 때,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다만 정당한 재판, 공의로운 재판일 뿐이다. 이것은 앞에서 보았던 대로 품꾼에게 주어야 할 것이 자선이나 동정심에서 나온 막대한 재물이 아니라 그의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라는 점과도 통한다. 가난한 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선이 아니라 공의다.
가난하다고 해서, 힘이 없다고 해서 부당한 대우를 당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함께 서 있는 “이웃”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마땅히 받아야 할 정당한 대우가 그들에게 필요할 뿐이다. 그러므로 “공의로” 재판하는 것은 대개의 경우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에게 복음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향해 사람을 외모로 차별하지 말고 다만 공의로 재판할 것을 계속해서 신신당부하고 있다.
내가 그때에 너희의 재판장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너희의 형제 중에서 송사를 들을 때에 쌍방간에 공정히 판결할 것이며 그들 중에 있는 타국인에게도 그리 할 것이라 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즉 너희는 재판할 때에 외모를 보지 말고 귀천을 차별 없이 듣고 사람의 낯을 두려워하지 말 것이며(신 1:16~17).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각 성에서 네 지파를 따라 재판장
들과 지도자들을 둘 것이요 그들은 공의로 백성을 재판할 것이니라
(신 16:18).
재 판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며, 여호와 하나님이야말로 이스라엘의 재판장이시다. “그의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시 68:5; 또한 시 7:11; 75:7). 여호와께서 과부의 재판장이 되신다는 것은 여호와께서 과부를 편파적으로 돌보심을 의미하지 않는다. 현실의 삶 속에서 과부가 억울한 일을 당하기 마련이고, 세상의 재판에서는 아무 곳에서도 그의 억울함이 해결되지 않으나, 여호와께서 재판장이 되시면 그녀의 눈물이 위로받게 된다. 특히 이사야서의 한 구절은 여호와께서 재판장이 되심이 그의 왕 되심과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 준다.
대저 여호와는 우리 재판장이시요 여호와는 우리에게 율법을 세우신 이요 여호와는 우리의 왕이시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실 것임이라
(사 33:22).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재판정에 앉으시는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는 복음이다. 여호와께서 왕으로 임하신다는 소식,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신다는 소식이야말로 가난한 자들에게 전파된 최고의 복음이다(사 52:7; 61:1).
4) 거류민을 사랑하라(19:33~34)
19 장이 품꾼과 장애인뿐 아니라 또 다른 약자로 들고 있는 것은 이스라엘 땅에 들어와 함께 살고 있는 거류민들이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이 외국인 거류민에 대한 언급은 대개 이스라엘 가운데 홀로 들어와서 거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대부분은 종 혹은 품꾼으로 고용되며, 사회적 약자의 대표적인 이름이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불러내시어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받게 되었지만, 그 땅은 이스라엘만이 살고 있는 땅이 아니다. 처음부터 이스라엘은 이방의 중다한 민족들과 더불어 출애굽했고(출 12:38),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거류민들과 함께 살아갔다. 기본적으로 이들은 여호와께 대한 신앙을 가지지 않은 이들이었다. 이스라엘은 그 땅의 주인이 되었고, 이 거류민들은 소수이고 여호와 신앙도 지니지 않은 이들이라는 점에서 이들을 학대하지 말 것을 명령하는 본문의 내용은 주목할 만하다. 34절은 한걸음 더 나아가서, 거류민들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같이 여기며 “자기같이 사랑하라”고 명한다. 특히 “자기같이 사랑하라”는 이미 18절에서 쓰였던 표현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이 이스라엘이 자신의 동포 백성을 향해 가지는 태도를 거류민들에게도 동일하게 가질 것을 명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거류민들은 이스라엘과 동일한 신앙을 지니지 않았고, 그들에게는 이스라엘에게 요구되는 행해야 할 율법도 해당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스라엘이 이 거류민들을 대할 때에는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고 행해야 한다. 위에서 보았듯이, 자신에게 싫은 것을 그들에게 권하지 말아야 하며, 자신의 연약함을 사랑하듯이, 그들의 연약함도 사랑해야 한다. 결국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는 거류민들은 의무는 거류민이되, 혜택은 이스라엘인 셈이라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순종함으로써 그 땅에 복이 임하게 될 때, 그 복의 혜택이 함께 살고 있는 거류민들에게도 고스란히 해당된다는 점에서, 이스라엘의 순종의 복이 거류민들에게까지 넘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거류민들을 자기처럼 사랑할 것을 명하시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스라엘도 애굽 땅에서 거류민이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땅에 들어가서 그 땅에 오래 살게 된다 할지라도 그들은 자신들이 애굽 땅에서 종이요, 거류민이었음을 늘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들이 종이었음을 기억하는 것의 실천적인 열매는 자신들이 사는 땅에서 종 되고 거류민 된 사람들을 이제 자유인이 된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인종이 다르고 종교가 다른 채 남의 땅에 들어와 사는 이 거류민들은 단지 이방인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애굽 노예 생활을 떠올리게 하는 존재이며,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며 이 땅에서 살아가는 나그네 삶을 떠올리게 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여호와 앞에서 살아가는 거룩한 삶에 관한 중요한 내용을 다루는 19장에서 거류민들에 대해 규례로 명령하고 있다는 점은 오늘의 현실과 비교해도 상당히 진취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규례는 오늘날 우리나라 안에 들어와 사는 조선족이나 동남아 출신 노동자들에 대한 교회의 행동을 돌아보게 한다.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이 나그네라면 그 실천적 의미는 나그네 된 이들을 내 자신같이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
5. 절기
1) 칠칠절
23장은 절기에 대해 다룬다. 절기 관련 본문들이 오경의 여기저기에 나오지만, 레위기 절기 본문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절기 설명 중 가장 긴 분량을 차지하는 칠칠절 규례라고 할 수 있다(레 23:9~21). 특히 칠칠절 규례는 두 개의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보리 첫 이삭 한 단을 드리는 절기(레 23:9~14)와 밀의 첫 열매를 빻아서 드리는 절기(레 23:15~21)로 이루어진다. 보리 수확에서 밀 수확에 이르는 추수 절기의 간격은 일곱 안식일이다(레 23:15). “일곱 안식”은 25장의 희년에서도 사용되고 있으면서 레위기 절기 이해의 중요한 장치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절기를 온 이스라엘을 위한 규례로 선포하는 것이 23장의 특징임을 고려할 때, 이스라엘의 일상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농사와 그 수확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단락들은 이러한 수확의 시기를 어떻게 여호와 앞에서 거룩하게 지낼 것인지를 다룬다. 모든 첫 열매는 하나님의 것이다. 먼저 하나님께 드린 후에 그들은 자신들이 농사지은 결과물들을 마음껏 먹을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릴 때에, 이미 규정된 대로의 희생 제사들도 수반된다는 점에서(레 23:12~13, 18~20), 칠칠절은 이스라엘의 삶과 거룩한 제사가 가장 잘 결합된 절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이한 것은 칠칠절을 다루는 규례의 마지막에 22절의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밭모퉁이까지 다 베지 말며 떨어진 것을 줍지 말고 그것을 가난한 자와 거류민을 위하여 남겨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가 이어져 있다는 점이다. 19:9~10의 말씀을 요약하는 이 구절을 통해, 이 기쁜 수확과 감사의 시간이 이러한 수확의 기쁨을 누릴 수 없는 가난한 자와 거류민들과도 함께 나누어져야 함을 확인시킨다. 이를 생각하면, 칠칠절은 숫자 7의 중복된 사용과 더불어 여호와께 드리는 제사, 이스라엘의 수확이라는 일상, 함께 살아가는 가난한 이웃을 위한 나눔이 결합된 절기이며, 레위기에서 이제껏 다루어 온 내용들이 결집된 본문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 희년(25장)
레위기의 절기 규정은 23장부터 서술되며 25장의 희년 규례로 그 절정에 이른다고 할 수 있다. 절기 규정을 시작하는 첫머리는 안식일 규정으로 시작하며(레 23:1~3), 절기 규정의 마지막 부분에도 안식일 규정이 제시되어 있어서(레 26:2), 절기 규정이 안식일 규정의 기본 틀 위에 놓여 있음을 알려 준다. 안식일에는 사람뿐 아니라 그의 종들과 그 집에 머무르는 나그네, 그리고 그 집에서 기르는 가축들까지도 쉰다(출 20:10).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이 확장된 것이 일곱 해마다 돌아오는 안식년이며, 안식년에는 사람들이 경작하던 땅까지도 쉬게 한다. 비록 씨를 뿌리고 농사짓지는 않았지만, 안식년에 저절로 자라난 소출들이 있을 텐데, 그 소출은 땅 주인의 것이 아니라, 땅 주인을 비롯해 그 집의 종들과 들판의 가축들의 공동 소유임이 선언된다(레 25:1~7). 여기에서도 자신의 것이지만, 가난한 이웃을 위해 나누라는 식의 단순한 자선이 아니라, 아예 안식년의 소출이 모두의 것임을 분명히 한다. 거듭 레위기는 개인의 변덕에 좌우될 수 있는 동정심이나 자선에 대한 호소보다 법적이고 제도적인 틀을 구비하는 데 관심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일곱 해마다 반복되는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나게 되면 희년이 도래하게 된다. 그 반복의 주기가 가장 길고, 그로 인해 미치는 결과가 가장 크다는 점에서 희년은 ‘대안식년’이라고 할 수 있겠고, 안식일 정신의 온전한 구현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50년째 되던 해에 희년이 시작된다. 이스라엘의 새해는 7월 1일부터 시작되지만, 희년을 알리는 뿔 나팔(쇼파르)은 속죄일인 7월 10일에 이스라엘 온 땅에서 울려 퍼지게 된다. 25:10에 따르면 이렇게 나팔이 불리는 해는 오십 년째 해다. 이 ‘오십’이라는 숫자는 이미 23장에서도 볼 수 있었다. 절기에 관한 다른 오경의 본문에서는 일곱 안식일 다음날인 오십 일째 되는 날에 대한 아무런 언급을 볼 수 없지만, 오직 레위기 23장에서만 볼 수 있었다. 결국 보리 첫 수확을 드리는 절기에 대한 언급(레 23:9~14)은 그로부터 일곱 안식일 다음날 오십 일째에 밀의 첫 열매를 드리는 절기를 설명하기 위해 레위기에만 등장하는 셈이 된다. 그런 점에서 첫 이삭을 드리는 절기와 그로부터 오십 일 후의 첫 열매 드리는 절기는 결국 일곱 안식년 다음해인 오십 년째에 찾아오는 희년을 설명하기 위한 장치라고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레위기의 독자적인 절기 규례는 희년을 향해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또한 제사를 다루고 있는 레위기 전반부(1~16장)의 결론이 16장에서 다루는 대속죄일이라고 할 때, 후반부의 마지막 부분에 위치한 희년이 바로 대속죄일에 선포된다는 점은 희년이 레위기 전체의 초점이라고 여기게 한다.
오십 년째 되는 해 대속죄일에 이스라엘 땅에 사는 모든 주민들에게는 “자유”가 선포된다. 이러한 희년은 성전이나 성막에서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그 땅에 있는 모든 주민”을 위해 선포된다. 희년이 시작될 때, 모든 이스라엘은 전국에서 이 나팔을 분다. 제사장들만이 부는 것이 아니라 온 이스라엘이 불면서 희년의 도래를 함께 경축하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자유”로 번역된 히브리어 ‘드로르’는 ‘놓아줌’(release), ‘자유’(freedom), ‘막힐 것 없는 흐름’(flow) 등을 의미한다(BDB; Milgrom 2001: 2166~2167). 무엇인가를 놓아주게 되면 당연히 그는 어디에도 거칠 것 없이 다니게 될 것이며, 그것이야말로 자유일 것이다. 레위기 26:13에 따르면 여호와의 규례와 법도를 따라 사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의 절정은 그 무엇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 바로 서서 걷는 삶이다.
나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어 그들에게 종 된 것을 면하게 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내가 너희의 멍에의 빗장을 부수고 너희를 바로 서서 걷게 하였느니라
하 나님은 이스라엘을 자유하게 하시는 분이다. 근동의 종교는 사람을 금기와 관습을 따라 얽매고, 수많은 신들의 체계 속에서 사람을 그 질서 아래 얽매며, 그러한 질서가 땅 위에 있는 신적인 왕과 그에 매인 백성으로 반영된다. 애굽의 바로에게 종이 되었던 이스라엘의 빗장을 부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무엇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 거칠 것 없이 흘러가는 자유를 주셨다. 이것은 신약에서도 면면히 선포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선포된 진리야말로 그 백성을 자유하게 한다(요 8:32). 이를 따라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권면한다(갈 5:1).
이러한 자유는 그저 정신적인 자유나 자기 마음대로 자기 일을 결정할 수 있는 자유 정도가 아니다. 종에서 해방시키신 여호와께서 모든 이스라엘에게 주신 기업으로서의 땅 위에서 여호와를 섬기며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참된 자유다. 공동체 내에서 기본적으로 동일하게 주어지는 땅과 몸에 대한 권리를 회복하는 것이 여기서 선포되는 자유다. 그래서 희년의 자유는 몸과 마음의 온전한 자유다. 25장의 본문에서 이 점을 확실히 보여 주는 것은 희년에 ‘드로르’가 선포되자 모든 이스라엘이 각기 자신의 기업 된 땅과 자신의 가족에게로 돌아간다는 점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이런저런 경제적인 곤경으로 인해 자신의 기업을 팔고 자신도 남의 종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 현실이었지만, 희년이 되면 모든 이스라엘은 원래 하나님에게서 받은 기업으로, 원래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인도해 내심으로 자유했던 그 상태로 돌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희년은 몸은 구속되고 땅도 없는 채로 그저 자유하라 평안하라고 전해지는 소식이 아니라 자유로운 몸과 내게 돌아온 기업 위에서 자유롭게 농사지을 수 있는 진정한 자유의 소식을 전한다. 여기에는 이스라엘의 모든 땅은 여호와 하나님의 것이요(레 25:23), 모든 이스라엘의 주인은 여호와 하나님(레 25:55)이라는 고백이 근본으로 놓여 있다. 하나님이 모든 땅의 주인이기에, 이스라엘은 땅을 사적으로 소유할 수 없으며, 하나님이 모든 이스라엘의 주인이기에 이스라엘은 다른 이의 종이 될 수도, 남을 종 삼을 수도 없다.
하나님께 대한 경외와 신뢰가 안식년과 희년의 근본이다. 땅은 사람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며, 다만 우리는 이 땅에서 나그네로, 잠시 맡은 자로 살아감을 보여 주는 것이 희년법이다. 그러므로 땅을 이용해서 재산을 증식하고 취리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금지된 일이며, 함께 애굽의 종이었던 때를 기억할 때, 다른 이를 종 삼고 부리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경제적 곤경으로 인해 자신이 지닌 땅을 팔아야 하고, 그마저도 없으면 자신의 몸뚱이까지 팔아야 하지만, 희년에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게 되고, 이를 통해 가난과 곤경이 대물림되고 구조화되는 것을 막으며, 기업 무르기를 통해 서로가 서로를 책임지고 돌봐야 하는 존재임을 보여 준다. 결국 하나님 안에서 우리 자신의 본분을 자각하고 하나님을 의뢰해 살아가는 삶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 안식년과 희년이다. 하나님 백성의 구체적인 모습이 사회적 삶의 현실 속에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는 셈이다.
한 가지 더 언급할 것은 노예 해방과 빚 탕감과 같은 희년의 원리들이 이스라엘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고대 중동의 여러 지역들에서도 발견된다는 점이다. 오히려 고대 중동 지역에서는 이스라엘보다 훨씬 이전부터 희년법과 비슷한 규정을 시행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고대 중동의 해방 규정들과 희년법의 근본적인 차이는 그 규정의 새로움에 있지 않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두 규정들 사이에는 엄연한 차이점들도 있다. 고대 중동의 경우 새로운 왕이 등극될 때에 이러한 조치들이 왕의 명령에 의해 시혜적 차원에서 베풀어지는 데 비해, 구약의 레위기에서는 진정한 왕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으로 선포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두 번째로 고대 중동의 희년 관련 조치들의 경우 사람의 호의와 시혜에 달려 있다는 점에서 부정기적이고 변덕스러운 데 비해, 레위기는 매 오십 년마다 희년이 선포되도록 제도화되고 구조로 만들어 두었다는 점에서 다르다. 그래서 사람의 변덕이나 자선의 마음에 의존하지 않고, 일정한 시간이 되면 해방과 자유가 일어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 점은 이 글에서 줄기차게 주장된 바이기도 하다. 참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이러한 제도적, 구조적 변화를 통해 구현되는 셈이다.
희년은 거룩하다. 안식년과 비슷하지만, 안식년에는 “거룩”이라는 말이 적용되지는 않았는데, 희년에는 두 번이나 “거룩”이 적용되고 있다(레 25:10, 12). 이때는 이스라엘에게 거룩한 때이며, 이스라엘은 이 해를 거룩하게 해야 한다. 가장 거룩한 날이라고 할 수 있는 대속죄일로부터 희년이 시작된다는 점도 이 점을 두드러지게 보여 준다. 희년은 자유가 선포되는 해이며, 거룩하다. 앞에서도 거듭 살펴보았지만, 자유와 해방은 하나님께서 구별하신 거룩한 것들이다. 거룩은 깊은 종교성과 심오한 예배와 제사만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집 없고 가족을 잃은 이스라엘이 다시 그 땅으로, 다시 그 가족들에게로 돌아가는 것에서도 구현된다. 그러므로 희년은 오늘의 교회를 향해 자유와 해방을 거룩의 범주 안에 담아내고 있는지를 묻고 있다.
맺음말
레 위기에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하나님의 배려가 율법 조항의 형태로 제시된다. 가난으로 인해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지 못하는 경우가 없도록 세밀하게 규정되어 있으며, 가난으로 인해, 외국인임으로 인해 억울한 차별을 당하거나 불의한 재판을 겪는 일이 없게 하는 것도 여호와 앞에서 살아가는 거룩한 삶의 한 부분으로 규정되어 있다. 나아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난의 수렁에 빠지게 되는 현실을 대비해, 매 오십 년마다 희년을 실행함을 통해 가난이 대물림되는 것을 구조적으로 방지한다. 이러한 내용이 담긴 책이 바로 레위기이다. 그리고 이러한 삶이야말로 성도의 사회적 실천 따위가 아니라, 여호와 앞에서 살아가는 거룩한 삶의 본질임을 레위기는 강하게 제시하고 있다.
참고
Levine, B. Leviticus. The JPS Torah Commentary. Philadelphia/New York/Jerusalem: The Jewish Publication Society, 1989.
Milgrom, Jacob. Leviticus 1~16. The Anchor Bible 3. New York: Doubleday, 1991.
. Leviticus 17~22. The Anchor Bible 3A. New York: Doubleday, 2000.
. Leviticus 23~27. The Anchor Bible 3B. New York: Doubleday, 2001.
Wenham, G. J. The Book of Leviticus. NICOT. Grand Rapids: Wm. B. Eerdmans, 1979.
우리가 ‘구제’ 혹은 ‘나눔’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우리 주위에 도움을 필요로 하는 ‘가난한 이웃’이 존재한다는 현실을 전제로 한다. 아울러 구약의 본문들을 통해 가난한 이웃에 대한 구제를 다룬다는 것은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함께 모시고 살지만, 여전히 가난한 이웃들이 존재한다는 현실도 전제된다. 그러므로 구제 혹은 나눔이라는 주제는 ‘현실’, 그것도 경제적인 현실을 대상으로 다룬다고 할 수 있다. 레위기를 비롯한 성경 본문들에서 이 주제를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를 다루는 것은 성경 본문들이 그저 정신적인 문제나 ‘영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경제적 현실과 같은 지극히 일상적인 삶의 현실을 포괄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레위기가 ‘하늘’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땅’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단순한 사실의 인식이야말로 레위기에 나타난 구제와 나눔이라는 주제에 대한 논의의 출발점이다.
레위기의 핵심 메시지로서의 거룩
레위기의 내용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16장까지의 내용에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삶을 다루고 있다면, 17~27장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을 다룬다고 할 수 있다.
전 반부의 중심 내용은 제사와 정결이며, 여호와께 나아갈 때에 어떤 예물을, 어떻게 구별하여 드려야 하는지, 부정하게 된 이가 어떻게 정결을 회복하고 여호와께 예물을 드릴 수 있는지를 다룬다. 그에 비해 후반부에서는 제사와 정결에 관한 문제가 군데군데 나오지만, 기본적으로 일상생활 속에서 어떻게 여호와께서 원하시는 구별된 삶을 살아갈 것인지의 관점에서 전개된다고 할 수 있다. 이를 고려하면, 1~16장은 거룩을 회복하기 위한 제사와 정결에 관한 규례들을 다루고 있으며, 17~27장은 일상 속에서 거룩을 유지하기 위한 규례들을 다룬다고 표현할 수 있다. 이 두 부분을 관통하고 있는 주제가 있다면 여호와 앞에서 살아가는 거룩한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며, 거룩이야말로 레위기의 핵심 개념이라고 말할 수 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 19:2).
레위기의 후반부인 17장 이후의 본문들은 일상생활 속에서 거룩한 삶의 유지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여기에는 이 글이 초점을 두는 구제에 관한 내용들도 많이 포함된다. 17장 이후의 내용 역시 거룩한 삶을 다룬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우리가 흔히 ‘거룩한 제사’와 ‘이웃을 돕는 윤리적 삶’을 분리시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전자는 ‘영적인 측면’이라면, 후자는 ‘사회적 측면’이라고 여겨지곤 한다. 그러다 보니 레위기에 나타난 구제 혹은 가난한 이웃에 대한 섬김을 다룰 때도, ‘영적인 규례’들과 구별되는 어떤 ‘사회적인 규례’로서 다루곤 한다. 그렇지만 레위기 자체는 이러한 구별을 일체 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사실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신구약성경 그 어디에서도 신앙의 ‘영적인 측면’과 ‘사회적인 측면’을 구별하고 있지 않다.
하나의 신앙 체계가 신을 어떻게 예배할 것인가에만 전적으로 집중하지 않고 사회 속에서 어떻게 살아갈지를 다루는 윤리를 포괄하고 있다는 점은 세계 대부분의 종교들의 특징일 것이다. 이스라엘의 배경이 되는 고대 중동 종교들 역시 신을 예배하는 제의와 일상의 윤리라는 두 중심을 지니고 있다. 그러면 이스라엘 신앙, 참하나님이신 여호와를 섬기는 이스라엘의 신앙이 중동의 고대 종교들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이 에 대해 밀그롬이 그의 레위기 연구를 통해 내리는 대답은 명쾌하다. “이스라엘의 독특한 것은 거룩이라는 제목 아래에 윤리와 제의를 포함시킨 것이다”(Milgrom 2000: 1629). 다시 말해 ‘거룩’을 어떤 제의적인 개념으로 보면서 제의적 측면과 연관된 ‘거룩’과 사회적 삶을 말하는 ‘윤리’를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 안에 제의적 차원과 윤리적 차원을 모두 포함하는 것으로 보았다는 점에 이스라엘 신앙의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가난한 이웃에 대한 구제는 신앙의 ‘사회적 차원’ 따위가 아니다. 구제는 거룩한 삶이며, 여호와 하나님을 고백하는 신앙의 본질에 속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지만, 가난한 이웃이나 사회적인 약자들도 잘 돌아보자’는 것은 레위기적이지 않다. 이렇게 신앙 고백과 이웃에 대한 나눔을 분리하는 한, 한국 교회는 언제까지나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삶을 신앙의 보조적인 차원으로 여길 것이며,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차원으로 여길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 교회의 위기는 단지 ‘행위’나 실천의 결여에 있지 않다. 근본적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거룩한 삶의 결여에 있다. 레위기는 가난한 이웃을 돌보는 삶이 여호와 앞에 살아가는 거룩한 삶의 본질적인 측면을 보여 준다고 선언한다.
율법 규정에 담긴 구제
레위기에 나타난 세부적인 구제 관련 본문들을 살펴보기에 앞서 염두에 두어야 할 또 다른 점은 구제 관련 본문들이 율법 규정으로 제시된다는 점이다. 레위기는 가난한 이웃을 돕고 나누는 삶에 대해 우리의 양심과 마음에 맡겨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법령들로 제정해 두고 있다. 이 부분에서도 우리 교회들에 흔히 있는 통념에 대해 지적할 것이 있다. 우리는 보통 제도나 구조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사람의 변화, 인격의 변화라고 여긴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기독교 교회는 사회나 세상의 틀과 구조를 바꾸는 일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고, 언제나 사람의 변화에 관심을 기울여 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좋은 틀과 구조를 지니고 있더라도, 사람이 바뀌지 않으면 얼마든지 그 구조들이 본연의 의미를 잃은 채 악용되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사람의 변화를 중시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희년을 제정하고 있는 레위기 25장에서 계속 반복되는 것은 “여호와를 경외하라”는 표현이다.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으면, 그 좋은 희년조차도 유명무실해져 버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위기와 구약성경이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구체적인 법령으로 제정하고 있다는 점은 충분히 주목되어야 한다. 법령 제정은 한 사회의 기본적인 틀과 구조를 형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의 변화가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 끝내지 않고, 그러한 변화를 담아내고 반영시킬 수 있는 구조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때로 우리의 마음은 메마르고 강퍅하여 이웃을 전혀 돌아보지 않을 때도 있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레위기는 이웃에 대한 나눔과 돌봄을 법으로 규정하면서 이웃을 섬기는 것이 나 자신의 인격과 마음 상태에 따라 좌우되지 않도록 한다. 우리 자신의 변덕스러운 마음에 맡겨 두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에게서 나온 법을 따라 제도와 구조를 만들어 둠으로써, 우리의 변덕스러운 마음을 구조와 틀에 따라 순종하도록 해 두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그저 마음의 변화, 사람의 변화만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는 이들이 아니라고 할 것이다. 여호와를 경외하기에, 사회의 틀과 구조를 바꾸어 우리의 악한 본성에 좌우되지 않고 하나님이 정하신 틀을 따라 그 악한 본성을 순종시키도록 애쓰는 이들이 그리스도인들인 것이다. 이를 생각하면, 구조나 사회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 실제로는 여호와를 의지하고 순종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그래서 개인의 변화와 구조의 변화는 분리되어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이들이 함께 추진하고 애써야 할 방향임을 알 수 있다.
레위기에 나타난 구제
이상의 논의를 정리하면, 가난한 이웃에 대한 구제는 신앙의 사회적 측면이 아니라 여호와를 섬기는 신앙의 본질적 측면, 즉 거룩의 한 부분이라는 것, 그리고 개인의 변화를 추구할 뿐 아니라 법으로 제정함을 통해 사회의 구조와 틀을 형성하려고 한다는 것, 이 두 가지가 레위기의 구제 문제를 바라보는 기본적인 안목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본격적으로 레위기의 본문들을 보면서 가난한 이웃을 섬기고 나누는 구제가 어떻게 반영되어 있는지 살펴보자.
1. 제사 제물
레위기 전체 내용의 가장 기본적인 틀을 이루는 것은 제사 제도다. 레위기의 처음 일곱 개의 장들에서는 다섯 가지 제사에 대해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으며, 이 다섯 제사는 8장 이후 레위기의 내용에서 반복된다. 모든 제사의 근본은 여호와께 무엇을 드리려는 예배자의 마음과 결단에 있다고 할 수 있다(레 1:2).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려는 마음에서 제사가 비롯된다는 점에서, 예배자의 경제적 형편에 따라 제물의 종류가 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예배자의 경제적인 형편으로 인해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려는 마음에 지장이나 걸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기 때문이다.
번제의 경우 흠 없는 수컷의 소나 양을 그 제물로 삼는 것이 기본적이다. 그렇지만 산비둘기나 집비둘기 새끼로 번제를 드리는 경우도 아무런 구별이나 차별 없이 번제 규정 속에 서술된다(레 1:14~17). 이 번제 본문에는 어떤 경우에 비둘기로 제물을 삼는지 언급되지 않는다. 그러나 속죄제의 경우, 예배자의 경제적인 여력이 미치지 못할 때 암염소나 어린 양 대신 비둘기로 드리도록 명시하고 있다는 점(레 5:7)이 번제의 비둘기 제물 이해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자가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려고 할 때는 아마도 훨씬 비싸고 값나가는 제물이었을 소나 양으로만 드려야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경제적인 형편과 처지에 따라 산비둘기나 집비둘기 새끼로 제물을 삼을 수 있었다. 그리고 소나 양으로 드린 번제에 대한 평가(레 1:9, 13)와 완전히 동일한 평가가 비둘기로 드린 제사에도 적용되는 것을 1:17에서 볼 수 있다.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마음은 예배자의 경제적인 형편에 적합한 제물을 통해 온전하게 구현되며, 여호와께서 기뻐 받으시는 제물이 된다. 이렇게 가난한 이들을 위한 제물의 종류가 언급된다는 점은 경제적인 처지가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는 데 아무런 걸림돌이 아님을 보여 준다. 그리고 가난한 이웃에 대한 배려는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삶에서 아주 중요한 본질적인 요소임도 알려 준다.
번제물에서 볼 수 있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배려는 속죄제에서도 나타난다. 속죄제의 제물의 경우 일반 평민들은 암염소로 제물을 삼도록 되어 있지만, 여력이 미치지 못할 경우 어린 양을 제물로 삼을 수 있었고(레 4:32~35), 이마저도 안 되면 번제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산비둘기나 집비둘기 새끼로 속죄 제물을 삼을 수 있었다(레 5:7~10). 놀라운 것은 비둘기조차도 감당하기 어려운 이들에 대한 배려가 언급된다는 점이다. 5:11~13에 따르면 비둘기를 속죄제로 드릴 수 없을 만큼 가난한 이들은 곡식의 고운 가루 십분의 일 에바를 속죄 제물로 드리도록 규정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제사의 중대한 원칙의 하나는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 레 17:11; 민 35:33)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동물의 피가 포함되어 있지 않는 곡식 가루로 드린 제사임에도 불구하고 동물로 드린 속죄제와 동일하게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고 선언된다(레 5:13). 예배자가 비둘기조차 드릴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한 이라면, 피가 생명을 속한다는 가장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원칙조차 넘어설 정도로 피 흘림이 포함되지 않는 제사가 제시되고 있다는 점에서,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는 진정한 힘은 근본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곡식으로 드리는 속죄제에서 우리는 가난한 이들을 배려하기 위해 피 흘림과 사죄의 원칙까지 넘어서는 하나님의 규례를 볼 수 있다. 이 점에서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이와 연관해서 생각해 볼 만한 점이 한 가지 있는데, 랍비들의 전통에서는 소제를 가난한 이들이 드리는 번제로 여긴다는 점이다(Milgrom 1991: 195~196). 위에서 보았듯이 속죄제의 경우, 예배자의 경제적인 형편에 따라 수송아지에서부터 비둘기까지 예물이 다양화되어 있고, 비둘기마저 낼 수 없는 이들을 위해 곡식 가루로 속죄제를 드리도록 되어 있었다. 번제의 마지막이 비둘기에 대한 규정이었고, 이어 2장에서 곡식의 소제가 언급되는 배열은 번제와 소제가 서로 연관된다는 주장을 그럴듯하게 한다. 그럼에도 소제가 화목제와 연관해서 드려지는 경우가 있다는 점에서(민 15:1~10), 소제와 번제만을 연결시키는 것은 무리가 있을 수 있지만, 소제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제사였다는 점은 유의할 만하다.
가난한 이들이 드리는 제물에 대한 배려는 나병에서 나은 이들이 드리는 제물에서도 볼 수 있다. 나병에서 회복된 자들은 어린 수양과 기름 한 록의 속건제, 어린 암양의 속죄제, 어린 수양의 속죄제 그리고 고운 가루 에바 십분의 삼에 기름 섞은 소제물의 소제를 드린다(레 14:10~20). 그러나 그의 형편이 이에 미치지 못한다면, 어린 수양의 속건제, 비둘기 두 마리로 드리는 속죄제와 번제 그리고 고운 가루 십분의 일 에바에 기름 섞은 소제물을 드리면 되었다.
제사는 사람이 거룩하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기본적인 체계다. 거룩과 연관해서 가장 기본적인 사항인 제사에 관한 내용들을 다루면서 우리 하나님의 법을 전하고 있는 레위기는 끊임없이 가난한 이들이 하나님께 드릴 예물에 대해 별도의 규정을 마련한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자신의 경제적인 형편과 연관된다. 수소로 드리는 번제 제물 규정과 비둘기 새끼로 드리는 번제 제물 규정은 아무런 차이가 없다.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소로 드린 번제물과 비둘기로 드린 번제물은 그저 예배자의 하나님을 향한 마음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이를 보건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은 제물 자체라기보다는 제물에 담긴 예배자의 마음이요 진심일 것이다. 이를 생각하면 가난한 이웃을 위한 구제보다 우선되어야 할 것은 하나님께 예배함에 일체 경제적인 형편이나 처지가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더 많은 헌금이 더 정성스러운 것이라는 식의 암시만으로도 얼마든지 가난한 교인들에게는 상처와 부담이 될 수 있다. 한 신앙 공동체 내에서 생활하는데 경제적 형편 때문에 헌금을 비롯한 교회 생활에 조금이라도 걸림이 생긴다면 그곳은 하나님의 교회일 수 없을 것이다. 레위기의 제사 체계는 가난이 하나님께 나아오는 데 아무런 걸림도 지장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거듭 확인시켜 준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제사 제물에서의 배려는 가난이 하나님의 형벌이나 심판과는 무관한 것임도 전제한다고 할 수 있다.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부유하면 부유한 대로, 다만 하나님께 제사할 뿐이다.
2. 동해복수법(同害復讐法)
레위기 24:10~23은 이웃과의 다툼 중에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한 슬로밋의 아들에 대한 처벌을 다룬다. 이와 연관하여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라고 요약할 수 있는 ‘동해복수법’[혹은 ‘탈리온법’(lex talionis)]이 제시된다(레 24:17~22). 동일한 내용이 출애굽기 21:23~25와 신명기 19:21에도 나타난다. 상대에게 해를 끼친 여러 경우들을 다루면서 이에 대한 근본 원칙으로 “눈에는 눈으로” 법이 제시되는 출애굽기나 신명기 본문의 맥락에 비해, 레위기의 경우 여호와를 저주한 자에 대한 처벌의 맥락에서 이 규정이 다루어진다. 사람을 죽인 이는 반드시 죽게 되고, 상해를 입혔으면 자신도 상해를 입게 된다. 동일한 원칙으로, 그의 하나님을 저주하면 그 죄에 마땅하게 그는 그가 속했던 온 회중에 의해 돌로 쳐 죽임을 당하게 된다. 동해복수법의 맥락에 하나님을 저주한 사건이 놓여 있다는 점은 이 일이 얼마나 큰 죄인지를 보여 준다. 이웃과의 분쟁 상황에서 이러한 저주의 말이 내뱉어졌겠지만, 하나님께 대한 저주는 이스라엘의 존재의 근본을 뒤엎는 것이다.
‘동해복수법’은 흔히 생각되듯 원시적인 법의 형태라기보다는, 오히려 한걸음 발전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힘 있고 부유한 자라도 가난한 이의 눈을 다치게 하면 오직 자신의 눈으로만 대가를 치러야 한다. 현실에서는 힘 있고 부유한 자의 행동이 돈이나 권력으로 무마되는 경우가 다반사였을 것이라는 점에서 동해복수법은 모든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법 앞에서 온전히 평등함을 확실히 증거한다. 처벌에 대한 규정을 명확히 함을 통해 터무니없이 지나친 복수를 막고, 가난한 자와 부자 사이의 가능한 차별적 집행도 막아 준다. 랍비들은 이 원칙을 가리켜 “내가 재는 자를 가지고 하나님께서 나를 재실 것이다”라고 요약했다(Milgrom 2001: 2133). 이를 생각하면 이 원칙은 다음과 같은 신약성경 구절들 안에도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 7:2; 또한 막 4:24; 눅 6:38).
구약성경이 전하는 동해복수법은 여호와 앞에서 지위의 고하나 빈부가 고려 사항이 될 수 없음을 명확히 하고 있다. 이 점은 24:22의 “거류민에게든지 본토인에게든지 그 법을 동일하게 할 것”이라는 규정에서 엿볼 수 있다. 압도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처해 있는 거류민(외국인)일지라도 동등하게 이 법이 적용되어서 외국인을 보호한다. 아울러 상대에게 끼친 해를 동일한 해로 갚아야 한다는 것은 상대의 지체가 나의 지체와 동일함을 깨닫게 한다. 이를 생각하면 “눈에는 눈으로”는 ‘내가 원치 않는 것을 남에게 행하지 않는다’는 원리, 나아가 ‘내가 받기를 원하는 것을 남에게 행한다’는 원리와도 본질적으로 통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동일한 처벌에 대한 강조의 근본 원칙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여기는 사랑과 자비의 마음이다.
주님의 산상수훈 말씀은 이와 연관된다(마 5:38~42). 흔히 주님께서 “눈에는 눈으로”라는 법을 폐하시고 사랑의 법을 내세우신 것으로 생각하지만, 이는 적절하지 않다. 위에서 보았듯이, 복음서에도 이 원칙이 여전히 사용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태복음에서의 이 말씀들의 기본 전제가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는 선언(마 5:17)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에도 분명하다. 유대인들은 복수의 원칙으로 사용하지만, 주님께서는 이 원칙을 사랑의 원칙으로 사용하신다. 누군가가 나의 오른편 뺨을 때릴 때 주께서 명하신 것은 그의 오른편 뺨을 때리는 것이 아니라 나의 왼편 뺨도 돌려 대는 것이었다. 주님에게 모든 율법을 해석하는 근본 원칙은 사랑이다. 그러므로 구약의 율법은 사랑의 원칙을 통해 완전하게 된다. 이것은 불완전한 것이 완전하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 완전한 모습이 드러나고 실현된다는 의미라고 볼 수 있다.
3. 서원 예물
하나님 께 자신을 드려 서원한 이스라엘은 그에 상응하는 예물로 그 값을 드려야 했다(레 27:1~8). 20세부터 60세의 남자는 은 오십 세겔, 여자는 삼십 세겔, 5세부터 20세까지의 남자는 이십 세겔, 여자는 열 세겔, 그리고 1개월~5세의 남자는 오 세겔, 여자는 삼 세겔을 내야 한다. 성년이 된 이스라엘 사람이 낸 성전세가 반 세겔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서원을 이행하기 위해 치르는 액수는 결코 적지 않다. 당시 노동자들의 한 달 월급이 한 세겔이었음을 생각할 때, 이 본문은 이스라엘에게 성급하게 서원하지 말 것을 권하는 기능을 한다고 볼 수도 있다(Wenham: 337, 잠 20:25; 전 5:2). 그럼에도 하나님을 향해 마음과 결단이 있어 서원했다면 그 실시를 늦추지 말아야 한다(신 23:23; 전 5:4). 그리고 가난이 하나님을 향한 서원에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되기에, 27:8에서는 제사장과의 협의하에 서원자의 형편에 맞게 값을 정하도록 부가 규정이 제정되었다. 구체적인 액수는 언급되지 않았기에 재량의 여지가 있지만, 원칙은 분명하다. 하나님께 작정한 그의 마음이 드려야 할 서원 예물의 양으로 인해 결코 걸림이 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4. 가난한 이웃과의 관계(19장)
레위기 17장 이후는 여호와 앞에 나아가 그 정결함과 거룩함을 회복한 이스라엘이 어떻게 일상의 삶 속에서 여호와 앞에서 거룩하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다룬다. 하나님께서는 천하 만민 가운데 이스라엘을 선택하셨고, 그들에게 음식이나 세상의 풍습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고 여호와께서 명하신 규례와 법도를 따라 살기를 명하신다. 17장 이후의 본문은 이러한 규례와 법도들을 소개한다. 17장 이후의 본문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중요한 표현인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혹은 “나는 여호와니라”는 이 본문들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이 표현들은 16장 이전에서는 동물의 정결 규례의 결론 부분인 11:45에서 단 한 번 쓰이지만, 17장 이후에서는 여러 차례 쓰이며(18:2, 4, 5, 6, 21, 30; 20:7, 8, 24; 22:3, 8, 9, 30, 31, 32, 33; 23:22, 43; 24:22; 25:17, 38, 55; 26:1, 2, 44, 45), 특히 19장에서는 이 표현들이 매 단락마다 반복적으로 사용된다(19:2, 3, 10, 12, 14, 16, 18, 25, 28, 30, 31, 32, 34, 36, 37). 19장에서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는 1+7번 쓰이고, 짧은 형태인 “나는 여호와니라”는 7+1번 쓰인다(Milgrom 2000: 1324). 전자의 경우 처음에 나오는 2절은 표제와 같은 역할을 하고 아무런 율법이 부착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다음에 나오는 표현들과 구별된다. 한편 후자의 경우, 마지막 37절에 쓰인 표현은 결론 역할을 하고 있으며, 역시 아무런 율법이 부착되어 있지 않다. 이러한 묘한 대응은 결코 우연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표현들은 이스라엘이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를 보여 준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불러내셨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셨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세상 가운데서 오직 여호와를 섬기며 여호와께서 명하신 규례와 법도를 따라 행해야 한다. 다시 말해 이 규례들을 지키는 유일한 이유는 여호와께서 그들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앞부분에서 인용했던 19:2는 19장의 특별한 성격과 역할을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절에서 쓰이고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라는 표현도 주목할 만하다. 이 표현은 출애굽기에서는 빈번하게 쓰이고(출 12:3, 6, 19, 47; 16:1, 2, 9, 10; 17:1; 35:1, 4), 레위기에서는 16장까지 3회(레 4:13; 10:6; 16:5) 쓰이지만, 17장 이후로는 오직 19:2에서만 쓰인다. 이 점은 19장이 지닌 중요성을 보여 준다. 복수형의 “너희”를 향해 명령이 주어진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온 이스라엘을 하나님 앞에 세운다.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거룩은 한 사람 한 사람의 거룩한 삶이면서, 하나님 앞에 선 이스라엘 전체의 거룩이기도 하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불러내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시겠다는 뜻과도 통한다(출 19:6). 그러므로 이러한 명령은 공동체적인 순종과 변화를 요구한다. 19장에서 여러 다양한 규례들이 한데 모여 있는데, 이 가운데 많은 규례들이 가난한 이웃에 대한 배려와 나눔을 명령한다.
1) 밭모퉁이를 남겨 두라(19:9~10)
9~10절은 추수 때에 이스라엘이 지킬 거룩한 삶의 규례를 전한다. 추수할 때 이스라엘은 자신이 지닌 밭의 모퉁이는 수확하지 않고 남겨 두어야 한다. 이 모퉁이가 어느 정도의 크기인지는 본문에 명시되지 않는다. 미쉬나의 경우 최소한 밭의 16분의 1이어야 한다고 제안하지만, 이 역시 수확량, 소유자의 재산 정도, 가난한 자의 필요 정도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도 덧붙이고 있다(Levine 1989: 127). 밭 전체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기업이기에 자신이 다 수확하는 것이 타당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밭모퉁이를 남겨 두게 하신다. 이론적으로 모든 이스라엘이 자신의 기업을 지니고 있지만, 이 본문에서는 현실적으로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기업을 상실한 이들이 있음이 전제된다. 그리고 이스라엘 땅에 몸 붙여 살고 있는 거류민들은 당연히 농사짓고 수확할 땅이 없다는 점도 고려된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자유인은 자신들의 기업 땅에도 이들을 위한 몫을 남겨 두어야 한다. 얼마만큼의 땅을 남겨 놓을지에 대한 고려 사항에 가난한 이들의 필요를 변수로 포함시키는 미쉬나의 언급도 특이하다. 자신의 너무나 당연한 재산권 행사가 가난한 이웃의 필요 때문에 제약되는 셈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에 대한 권리와 가난한 이웃에 대한 배려는 동시에 존재한다. 이를 생각하면 구약성경이 사유 재산 제도를 지지한다고 여기는 주장들은 지나치게 단순화된 주장이라고 할 것이다.
이러한 규례들은 이스라엘이 그 얻은 수확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존재임을 분명히 한다. 아울러 이 글의 서론에서 언급했지만, 가난한 이웃에 대한 이러한 배려를 하나님의 명령의 형태로 담고 있어서 일종의 제도로 만들어 두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이와 유사하지만, 신명기 24:19~22는 땅 소유자의 관대함과 자선에 호소하고 있다고 여겨진다(Milgrom 2000: 1628). 그러나 자선에 대한 호소와 제도적 정비가 확연하게 구별된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가령 흘린 것을 줍지 않는 것이 제도적으로 완비되었다 해도, 땅 소유자가 마음먹는다면 거의 흘리지 않고 수확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신명기 법과 레위기 법을 자선과 제도의 차이로 확정하는 것은 다소 어폐가 있다. 그럼에도 가난한 이웃을 배려하는 것을 개인의 양심에 맡겨 두기보다는 이와 같이 제도와 구조를 통해 확립하는 레위기 율법의 특성을 충분히 음미하는 것은 중요하다. 레위기 19장의 본문은 땅 소유자가 자신이 도울 가난한 이를 선택하지 않으며, 마땅한 의무로 한 모퉁이를 남겨 두고 마땅한 의무로 흘린 것을 다 줍지 않는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살게 하시는 분이요, 우리 역시 나그네였음을 고백하는 경건한 신앙이 구체적인 사회적 제도와 입법을 통해 구현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제도야말로 여호와 앞에서 살아가는 ‘거룩’이다. 가난한 이웃에 대한 사회적 책임이라는 세속적인 것 같은 개념이 가장 종교적인 단어인 ‘거룩’으로 표현된다.
포도원에 대해서도 동일한 원리가 적용된다. 포도 수확을 할 때 깡그리 수확해서는 안 되며 수확 도중에 땅에 떨어진 것들은 주워서도 안 된다. 남은 포도들과 떨어진 포도들은 모두 포도원을 지니지 못한 가난한 이들과 거류민들을 위한 것이다.
9절과 10절은 모두 목적어가 먼저 나오고 동사가 뒤에 나온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이 목적어들에는 밭모퉁이, 떨어진 이삭, 포도원, 포도원의 떨어진 열매,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이 있다. 이것을 보면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들에게 돌아가는 몫이 무엇인지 명확해진다. 이들은 자신들이 농사지을 땅이 없는 사람들이고, 땅과 포도원은 이미 주인이 있지만, 그 땅과 그 포도원에서 그 모퉁이들은 그 주인들의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의 것이 된다. 경제적으로 땅과 포도원을 지닌 사람들에게 손실이 될 수 있지만, 10절의 마지막에 붙어 있는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는 이스라엘이 무엇으로 사는지 그리고 누구 앞에서 살아가는지를 확인시켜 준다.
2) 네 이웃을 억압하지 말라(19:13~14)
13 절은 이웃에 대한 “억압”과 “착취”에 대해 다루고 있다. 그저 “이웃”이라고 표현되었지만, 이어지는 말을 볼 때, 자신보다 훨씬 가난하고 연약한 이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를 “품꾼”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품꾼”은 경제적으로 곤궁하게 되어 다른 집에 노동력을 제공하고 그에 대한 삯을 받는 이다. 이스라엘 가운데 같이 사는 거류민들이 이렇게 품꾼이 되는 경우도 있었고, 이스라엘 사람이 가난하게 되어 다른 이스라엘 사람에게 품꾼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품꾼은 전적으로 경제적인 곤경으로 인해 발생하게 된다. 품꾼을 올바르게 대하는 것은 여기저기에서 언급되고 있다. 다음은 신명기의 한 구절이다.
곤궁하고 빈한한 품꾼은 너희 형제든지 네 땅 성문 안에 우거하는 객이든지 그를 ‘학대하지 말며’ 그 품삯을 당일에 주고 해 진 후까지 미루지 말라 이는 그가 가난하므로 그 품삯을 간절히 바람이라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지 않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네게 죄가 될 것임이라(신 24:14~15).
레위기에서 “억압하지 말라”고 번역된 표현이 신명기에서는 “학대하지 말라”로 옮겨졌다. 같은 이스라엘 사람이든지, 아니면 그 땅에 사는 나그네이든지, 경제적인 필요 때문에 남의 품꾼이 된 사람이 있으며, 그를 억압하거나 학대하지 않는 것은 무엇보다도 제 날에 정당한 그의 노동의 대가를 지급하는 것이다. 억압과 착취라는 표현에서 우리는 어떤 거창한 폭정과 탄압 같은 것을 생각하지만, 이스라엘의 일상에서 이들은 흔히 발생하고 쉽게 볼 수 있는 일들이었다. 일을 한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몫을 제때 받아야 하지만, 이것을 제 날짜에 지급하지 않고 연기하는 것이 ‘억압’, 즉 어떤 힘이나 권세를 가지고 상대를 누르는 행위가 된다. 이 구절에서는 품삯이 문제가 되었지만, 품삯이 아닌 어떤 것이든, 상대가 지니지 못한 것을 자신이 지녔을 때, 그것을 이용해 정당한 절차를 제대로 진행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억압이다. 그리고 수고한 이에게 마땅한 대가가 지불되어야 한다. 그것은 자선이나 선행이 아니라 당연하고 마땅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약속한 제 날짜 제 시간에 지급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착취 혹은 도둑질이다. 그 품꾼이 여호와께 이에 대해 부르짖는다면, 하나님께서 그 죄에 대해 품꾼에게 삯을 주지 않은 이를 벌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품꾼의 호소를 들으시는 분이다. 누차 언급했지만, 19장이 이것을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로 제도화시키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그렇지 않으면 품꾼이 마땅히 제 날짜에 품삯 받는 일이 품삯 주는 이의 관대함이나 자선으로 해결하게 되는 경우들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인간이라는 이상은 제도와 구조의 변화라는 현실과 함께 갈 필요가 있다.
가난한 품꾼에게 제대로 품삯이 지급되는 것으로 표현되는 거룩은 지체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 대해서도 드러난다(레 19:14).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사람에 대해 면전에서 좋지 못한 말들을 하는 것은 상대방이 할 수 없는 것을 이용해 조롱하는 행동이다. 또한 앞을 볼 수 없는 사람의 가는 길에 장애물을 놓는 것도 그의 신체적 결함을 비웃고 조롱하는 짓이다. 특히 이 후자는 그러한 조롱이 상대의 신체에 상처와 해를 입히게 되기까지 한다는 점에서 심각하다고 할 수 있다. 상대의 약한 것을 이용해서 조롱하고 저주하지만, 앞 못 보는 이를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사람이야말로 저주받게 된다(신 27:18). 지체 장애를 가진 사람에 대한 레위기의 말씀은 고대 근동에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본문이라는 지적이 있다(Milgrom 2000: 1641). 근동의 경우 의사들이 잘못 치료해 환자의 눈이나 귀를 멀게 한 경우 그에 상응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법령은 있지만, 구약과 같이 이미 장애를 지닌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한 법령들은 뜻밖에도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귀먹은 자와 앞 못 보는 자를 괴롭히지 말 것에 대한 말씀의 결론은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레 19:14)이다. 이것은 귀먹은 자를 저주해도 그 당사자가 들을 수 없다는 점에서, 앞 못 보는 이의 앞길에 장애물을 놓아 그가 넘어지고 쓰러져도 누가 그렇게 했는지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여호와께서 이 모든 것을 보고 계시며, 친히 그들의 보호자가 되심을 선언하는 진술이라고 할 수 있다. 몸에 장애를 가진 이의 장애를 이용해 조롱하고 괴롭히지 않는 까닭은 여호와께서 그들의 귀가 되시고 그들의 눈이 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섬기는 신앙이야말로 이 약한 이들을 괴롭히지 않는 길이다. 거꾸로, 이렇게 연약한 이들을 괴롭힌다면 그는 무엇이라고 고백하든 실제로는 약한 자들의 보호자가 되시는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는 것이다.
13~14절은 약자에 대한 보호라고 얼핏 표현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품꾼에게 품삯을 제때에 주는 것이나 장애를 이용해서 상대를 괴롭히는 것은 보호를 촉구하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사람으로서 받아야 할 정당한 대우를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3) 공의의 재판(19:15~16)
15절은 대칭을 이루도록 배열되어 있다.
A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치 말라
B 가난한 자의 얼굴을 들지 말라
B´ 세력 있는 자의 얼굴을 존중하지 말라
A´ 공의로 너의 이웃을 재판하라
첫 머리(A)에서 “재판”을 뜻하는 ‘미슈파트’가 쓰였고, 그에 대응되는 부분(A´)에서 “공의”를 뜻하는 ‘체데크’가 쓰여 평행을 이루고 있다. 가운데 부분은 모두 ‘얼굴’에 해당하는 단어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잘 대응되어 있다. 그리고 그 첫 문장은 ‘무엇을 하지 말라’는 부정 명령인 데 비해, 대응되는 문장은 보다 적극적으로 ‘무엇을 하라’는 긍정 명령이라는 점도 이 구절의 강조하는 바를 잘 보여 주고 있다. 무엇이 ‘미슈파트’를 해치는 불의가 되는가? 그것은 가난하다고 하여, 혹은 힘 있다 하여 부당하게 판결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재판해야 하는가? 오직 ‘체데크’만이 재판의 기준이다. “가난한 자”와 평행되게 놓여 있는 단어는 히브리어 ‘가돌’이다. 기본적으로 ‘부자’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지만, ‘부’로 인해 생겨나는 힘과 세력 전부를 포괄하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러한 ‘힘 있는 자’ 혹은 ‘세력 있는 자’의 반대편에 있는 “가난한 자”는 힘도 없고 세력도 없는 초라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재판이 벌어졌는데 한쪽에는 아무런 힘도 지니지 못하고 경제적으로도 곤궁한 가난한 사람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힘과 권력, 부귀를 모두 가진 세력 있는 사람이 있다면 대부분의 경우 이 재판은 세력 있는 사람에 대한 존중으로 마무리되기 십상일 것이다.
개역개정은 의역을 하고 있지만, “세력 있는 자라고 두둔하지 말고”는 직역하면 ‘세력 있는 자의 얼굴을 존중하지 말고’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누구누구의 얼굴을 존중하다’는 표현은 늘 부정적인 의미는 아니다. 19:32에서는 이 표현이 긍정적으로 쓰였다.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그 얼굴을 존중해야 할 이들은 노인과 같이 몸이 취약해지고 연약해진 이들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곧잘 이렇게 연약해진 이들의 얼굴을 존중하기보다는 세력이 있고 부유한 이들의 얼굴을 존중하기 일쑤다. 그러나 세력 있는 자들의 얼굴을 존중하지 말라는 것이 힘없고 약한 이들의 얼굴을 세워 주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15절이 명백히 지시하듯이, 가난한 자라고 해서 그 얼굴을 들어 주는 것은 공의에서 벗어난다. 그러므로 가난한 자의 얼굴이든, 세력 있는 자의 얼굴이든, ‘얼굴’은 배제되어야 한다는 것이 재판에서 이루어지는 공의의 핵심이다. 동일한 사고를 출애굽기의 구절에서도 볼 수 있다.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해서 편벽되이 두둔하지 말지니라”(출 23:3). 흔히 이러한 구절들은 힘 있고 부유한 이들을 반대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억울함을 신원할 것을 주장할 때에 반대 구절로 인용되곤 한다. 구약의 많은 구절들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신원하는 것이 공의임을 증거한다(사 1:16~17). 그러나 이러한 구절과 가난한 자라고 해서 두둔하지 말라는 구절은 전혀 대립되지 않는다. 참으로 가난한 자들이 요구하고 찾는 것은 어떤 편파적인 호의나 관심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가난하고 힘이 없음으로 인해 세상에서 억울하고 고통스러운 일을 겪었을 때,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다만 정당한 재판, 공의로운 재판일 뿐이다. 이것은 앞에서 보았던 대로 품꾼에게 주어야 할 것이 자선이나 동정심에서 나온 막대한 재물이 아니라 그의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라는 점과도 통한다. 가난한 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선이 아니라 공의다.
가난하다고 해서, 힘이 없다고 해서 부당한 대우를 당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함께 서 있는 “이웃”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마땅히 받아야 할 정당한 대우가 그들에게 필요할 뿐이다. 그러므로 “공의로” 재판하는 것은 대개의 경우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에게 복음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향해 사람을 외모로 차별하지 말고 다만 공의로 재판할 것을 계속해서 신신당부하고 있다.
내가 그때에 너희의 재판장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너희의 형제 중에서 송사를 들을 때에 쌍방간에 공정히 판결할 것이며 그들 중에 있는 타국인에게도 그리 할 것이라 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즉 너희는 재판할 때에 외모를 보지 말고 귀천을 차별 없이 듣고 사람의 낯을 두려워하지 말 것이며(신 1:16~17).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각 성에서 네 지파를 따라 재판장
들과 지도자들을 둘 것이요 그들은 공의로 백성을 재판할 것이니라
(신 16:18).
재 판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며, 여호와 하나님이야말로 이스라엘의 재판장이시다. “그의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시 68:5; 또한 시 7:11; 75:7). 여호와께서 과부의 재판장이 되신다는 것은 여호와께서 과부를 편파적으로 돌보심을 의미하지 않는다. 현실의 삶 속에서 과부가 억울한 일을 당하기 마련이고, 세상의 재판에서는 아무 곳에서도 그의 억울함이 해결되지 않으나, 여호와께서 재판장이 되시면 그녀의 눈물이 위로받게 된다. 특히 이사야서의 한 구절은 여호와께서 재판장이 되심이 그의 왕 되심과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 준다.
대저 여호와는 우리 재판장이시요 여호와는 우리에게 율법을 세우신 이요 여호와는 우리의 왕이시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실 것임이라
(사 33:22).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재판정에 앉으시는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는 복음이다. 여호와께서 왕으로 임하신다는 소식,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신다는 소식이야말로 가난한 자들에게 전파된 최고의 복음이다(사 52:7; 61:1).
4) 거류민을 사랑하라(19:33~34)
19 장이 품꾼과 장애인뿐 아니라 또 다른 약자로 들고 있는 것은 이스라엘 땅에 들어와 함께 살고 있는 거류민들이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이 외국인 거류민에 대한 언급은 대개 이스라엘 가운데 홀로 들어와서 거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대부분은 종 혹은 품꾼으로 고용되며, 사회적 약자의 대표적인 이름이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불러내시어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받게 되었지만, 그 땅은 이스라엘만이 살고 있는 땅이 아니다. 처음부터 이스라엘은 이방의 중다한 민족들과 더불어 출애굽했고(출 12:38),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거류민들과 함께 살아갔다. 기본적으로 이들은 여호와께 대한 신앙을 가지지 않은 이들이었다. 이스라엘은 그 땅의 주인이 되었고, 이 거류민들은 소수이고 여호와 신앙도 지니지 않은 이들이라는 점에서 이들을 학대하지 말 것을 명령하는 본문의 내용은 주목할 만하다. 34절은 한걸음 더 나아가서, 거류민들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같이 여기며 “자기같이 사랑하라”고 명한다. 특히 “자기같이 사랑하라”는 이미 18절에서 쓰였던 표현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이 이스라엘이 자신의 동포 백성을 향해 가지는 태도를 거류민들에게도 동일하게 가질 것을 명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거류민들은 이스라엘과 동일한 신앙을 지니지 않았고, 그들에게는 이스라엘에게 요구되는 행해야 할 율법도 해당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스라엘이 이 거류민들을 대할 때에는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고 행해야 한다. 위에서 보았듯이, 자신에게 싫은 것을 그들에게 권하지 말아야 하며, 자신의 연약함을 사랑하듯이, 그들의 연약함도 사랑해야 한다. 결국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는 거류민들은 의무는 거류민이되, 혜택은 이스라엘인 셈이라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순종함으로써 그 땅에 복이 임하게 될 때, 그 복의 혜택이 함께 살고 있는 거류민들에게도 고스란히 해당된다는 점에서, 이스라엘의 순종의 복이 거류민들에게까지 넘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거류민들을 자기처럼 사랑할 것을 명하시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스라엘도 애굽 땅에서 거류민이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땅에 들어가서 그 땅에 오래 살게 된다 할지라도 그들은 자신들이 애굽 땅에서 종이요, 거류민이었음을 늘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들이 종이었음을 기억하는 것의 실천적인 열매는 자신들이 사는 땅에서 종 되고 거류민 된 사람들을 이제 자유인이 된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인종이 다르고 종교가 다른 채 남의 땅에 들어와 사는 이 거류민들은 단지 이방인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애굽 노예 생활을 떠올리게 하는 존재이며,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며 이 땅에서 살아가는 나그네 삶을 떠올리게 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여호와 앞에서 살아가는 거룩한 삶에 관한 중요한 내용을 다루는 19장에서 거류민들에 대해 규례로 명령하고 있다는 점은 오늘의 현실과 비교해도 상당히 진취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규례는 오늘날 우리나라 안에 들어와 사는 조선족이나 동남아 출신 노동자들에 대한 교회의 행동을 돌아보게 한다.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이 나그네라면 그 실천적 의미는 나그네 된 이들을 내 자신같이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
5. 절기
1) 칠칠절
23장은 절기에 대해 다룬다. 절기 관련 본문들이 오경의 여기저기에 나오지만, 레위기 절기 본문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절기 설명 중 가장 긴 분량을 차지하는 칠칠절 규례라고 할 수 있다(레 23:9~21). 특히 칠칠절 규례는 두 개의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보리 첫 이삭 한 단을 드리는 절기(레 23:9~14)와 밀의 첫 열매를 빻아서 드리는 절기(레 23:15~21)로 이루어진다. 보리 수확에서 밀 수확에 이르는 추수 절기의 간격은 일곱 안식일이다(레 23:15). “일곱 안식”은 25장의 희년에서도 사용되고 있으면서 레위기 절기 이해의 중요한 장치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절기를 온 이스라엘을 위한 규례로 선포하는 것이 23장의 특징임을 고려할 때, 이스라엘의 일상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농사와 그 수확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단락들은 이러한 수확의 시기를 어떻게 여호와 앞에서 거룩하게 지낼 것인지를 다룬다. 모든 첫 열매는 하나님의 것이다. 먼저 하나님께 드린 후에 그들은 자신들이 농사지은 결과물들을 마음껏 먹을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릴 때에, 이미 규정된 대로의 희생 제사들도 수반된다는 점에서(레 23:12~13, 18~20), 칠칠절은 이스라엘의 삶과 거룩한 제사가 가장 잘 결합된 절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이한 것은 칠칠절을 다루는 규례의 마지막에 22절의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밭모퉁이까지 다 베지 말며 떨어진 것을 줍지 말고 그것을 가난한 자와 거류민을 위하여 남겨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가 이어져 있다는 점이다. 19:9~10의 말씀을 요약하는 이 구절을 통해, 이 기쁜 수확과 감사의 시간이 이러한 수확의 기쁨을 누릴 수 없는 가난한 자와 거류민들과도 함께 나누어져야 함을 확인시킨다. 이를 생각하면, 칠칠절은 숫자 7의 중복된 사용과 더불어 여호와께 드리는 제사, 이스라엘의 수확이라는 일상, 함께 살아가는 가난한 이웃을 위한 나눔이 결합된 절기이며, 레위기에서 이제껏 다루어 온 내용들이 결집된 본문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 희년(25장)
레위기의 절기 규정은 23장부터 서술되며 25장의 희년 규례로 그 절정에 이른다고 할 수 있다. 절기 규정을 시작하는 첫머리는 안식일 규정으로 시작하며(레 23:1~3), 절기 규정의 마지막 부분에도 안식일 규정이 제시되어 있어서(레 26:2), 절기 규정이 안식일 규정의 기본 틀 위에 놓여 있음을 알려 준다. 안식일에는 사람뿐 아니라 그의 종들과 그 집에 머무르는 나그네, 그리고 그 집에서 기르는 가축들까지도 쉰다(출 20:10).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이 확장된 것이 일곱 해마다 돌아오는 안식년이며, 안식년에는 사람들이 경작하던 땅까지도 쉬게 한다. 비록 씨를 뿌리고 농사짓지는 않았지만, 안식년에 저절로 자라난 소출들이 있을 텐데, 그 소출은 땅 주인의 것이 아니라, 땅 주인을 비롯해 그 집의 종들과 들판의 가축들의 공동 소유임이 선언된다(레 25:1~7). 여기에서도 자신의 것이지만, 가난한 이웃을 위해 나누라는 식의 단순한 자선이 아니라, 아예 안식년의 소출이 모두의 것임을 분명히 한다. 거듭 레위기는 개인의 변덕에 좌우될 수 있는 동정심이나 자선에 대한 호소보다 법적이고 제도적인 틀을 구비하는 데 관심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일곱 해마다 반복되는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나게 되면 희년이 도래하게 된다. 그 반복의 주기가 가장 길고, 그로 인해 미치는 결과가 가장 크다는 점에서 희년은 ‘대안식년’이라고 할 수 있겠고, 안식일 정신의 온전한 구현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50년째 되던 해에 희년이 시작된다. 이스라엘의 새해는 7월 1일부터 시작되지만, 희년을 알리는 뿔 나팔(쇼파르)은 속죄일인 7월 10일에 이스라엘 온 땅에서 울려 퍼지게 된다. 25:10에 따르면 이렇게 나팔이 불리는 해는 오십 년째 해다. 이 ‘오십’이라는 숫자는 이미 23장에서도 볼 수 있었다. 절기에 관한 다른 오경의 본문에서는 일곱 안식일 다음날인 오십 일째 되는 날에 대한 아무런 언급을 볼 수 없지만, 오직 레위기 23장에서만 볼 수 있었다. 결국 보리 첫 수확을 드리는 절기에 대한 언급(레 23:9~14)은 그로부터 일곱 안식일 다음날 오십 일째에 밀의 첫 열매를 드리는 절기를 설명하기 위해 레위기에만 등장하는 셈이 된다. 그런 점에서 첫 이삭을 드리는 절기와 그로부터 오십 일 후의 첫 열매 드리는 절기는 결국 일곱 안식년 다음해인 오십 년째에 찾아오는 희년을 설명하기 위한 장치라고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레위기의 독자적인 절기 규례는 희년을 향해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또한 제사를 다루고 있는 레위기 전반부(1~16장)의 결론이 16장에서 다루는 대속죄일이라고 할 때, 후반부의 마지막 부분에 위치한 희년이 바로 대속죄일에 선포된다는 점은 희년이 레위기 전체의 초점이라고 여기게 한다.
오십 년째 되는 해 대속죄일에 이스라엘 땅에 사는 모든 주민들에게는 “자유”가 선포된다. 이러한 희년은 성전이나 성막에서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그 땅에 있는 모든 주민”을 위해 선포된다. 희년이 시작될 때, 모든 이스라엘은 전국에서 이 나팔을 분다. 제사장들만이 부는 것이 아니라 온 이스라엘이 불면서 희년의 도래를 함께 경축하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자유”로 번역된 히브리어 ‘드로르’는 ‘놓아줌’(release), ‘자유’(freedom), ‘막힐 것 없는 흐름’(flow) 등을 의미한다(BDB; Milgrom 2001: 2166~2167). 무엇인가를 놓아주게 되면 당연히 그는 어디에도 거칠 것 없이 다니게 될 것이며, 그것이야말로 자유일 것이다. 레위기 26:13에 따르면 여호와의 규례와 법도를 따라 사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의 절정은 그 무엇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 바로 서서 걷는 삶이다.
나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어 그들에게 종 된 것을 면하게 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내가 너희의 멍에의 빗장을 부수고 너희를 바로 서서 걷게 하였느니라
하 나님은 이스라엘을 자유하게 하시는 분이다. 근동의 종교는 사람을 금기와 관습을 따라 얽매고, 수많은 신들의 체계 속에서 사람을 그 질서 아래 얽매며, 그러한 질서가 땅 위에 있는 신적인 왕과 그에 매인 백성으로 반영된다. 애굽의 바로에게 종이 되었던 이스라엘의 빗장을 부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무엇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 거칠 것 없이 흘러가는 자유를 주셨다. 이것은 신약에서도 면면히 선포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선포된 진리야말로 그 백성을 자유하게 한다(요 8:32). 이를 따라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권면한다(갈 5:1).
이러한 자유는 그저 정신적인 자유나 자기 마음대로 자기 일을 결정할 수 있는 자유 정도가 아니다. 종에서 해방시키신 여호와께서 모든 이스라엘에게 주신 기업으로서의 땅 위에서 여호와를 섬기며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참된 자유다. 공동체 내에서 기본적으로 동일하게 주어지는 땅과 몸에 대한 권리를 회복하는 것이 여기서 선포되는 자유다. 그래서 희년의 자유는 몸과 마음의 온전한 자유다. 25장의 본문에서 이 점을 확실히 보여 주는 것은 희년에 ‘드로르’가 선포되자 모든 이스라엘이 각기 자신의 기업 된 땅과 자신의 가족에게로 돌아간다는 점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이런저런 경제적인 곤경으로 인해 자신의 기업을 팔고 자신도 남의 종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 현실이었지만, 희년이 되면 모든 이스라엘은 원래 하나님에게서 받은 기업으로, 원래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인도해 내심으로 자유했던 그 상태로 돌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희년은 몸은 구속되고 땅도 없는 채로 그저 자유하라 평안하라고 전해지는 소식이 아니라 자유로운 몸과 내게 돌아온 기업 위에서 자유롭게 농사지을 수 있는 진정한 자유의 소식을 전한다. 여기에는 이스라엘의 모든 땅은 여호와 하나님의 것이요(레 25:23), 모든 이스라엘의 주인은 여호와 하나님(레 25:55)이라는 고백이 근본으로 놓여 있다. 하나님이 모든 땅의 주인이기에, 이스라엘은 땅을 사적으로 소유할 수 없으며, 하나님이 모든 이스라엘의 주인이기에 이스라엘은 다른 이의 종이 될 수도, 남을 종 삼을 수도 없다.
하나님께 대한 경외와 신뢰가 안식년과 희년의 근본이다. 땅은 사람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며, 다만 우리는 이 땅에서 나그네로, 잠시 맡은 자로 살아감을 보여 주는 것이 희년법이다. 그러므로 땅을 이용해서 재산을 증식하고 취리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금지된 일이며, 함께 애굽의 종이었던 때를 기억할 때, 다른 이를 종 삼고 부리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경제적 곤경으로 인해 자신이 지닌 땅을 팔아야 하고, 그마저도 없으면 자신의 몸뚱이까지 팔아야 하지만, 희년에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게 되고, 이를 통해 가난과 곤경이 대물림되고 구조화되는 것을 막으며, 기업 무르기를 통해 서로가 서로를 책임지고 돌봐야 하는 존재임을 보여 준다. 결국 하나님 안에서 우리 자신의 본분을 자각하고 하나님을 의뢰해 살아가는 삶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 안식년과 희년이다. 하나님 백성의 구체적인 모습이 사회적 삶의 현실 속에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는 셈이다.
한 가지 더 언급할 것은 노예 해방과 빚 탕감과 같은 희년의 원리들이 이스라엘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고대 중동의 여러 지역들에서도 발견된다는 점이다. 오히려 고대 중동 지역에서는 이스라엘보다 훨씬 이전부터 희년법과 비슷한 규정을 시행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고대 중동의 해방 규정들과 희년법의 근본적인 차이는 그 규정의 새로움에 있지 않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두 규정들 사이에는 엄연한 차이점들도 있다. 고대 중동의 경우 새로운 왕이 등극될 때에 이러한 조치들이 왕의 명령에 의해 시혜적 차원에서 베풀어지는 데 비해, 구약의 레위기에서는 진정한 왕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으로 선포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두 번째로 고대 중동의 희년 관련 조치들의 경우 사람의 호의와 시혜에 달려 있다는 점에서 부정기적이고 변덕스러운 데 비해, 레위기는 매 오십 년마다 희년이 선포되도록 제도화되고 구조로 만들어 두었다는 점에서 다르다. 그래서 사람의 변덕이나 자선의 마음에 의존하지 않고, 일정한 시간이 되면 해방과 자유가 일어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 점은 이 글에서 줄기차게 주장된 바이기도 하다. 참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이러한 제도적, 구조적 변화를 통해 구현되는 셈이다.
희년은 거룩하다. 안식년과 비슷하지만, 안식년에는 “거룩”이라는 말이 적용되지는 않았는데, 희년에는 두 번이나 “거룩”이 적용되고 있다(레 25:10, 12). 이때는 이스라엘에게 거룩한 때이며, 이스라엘은 이 해를 거룩하게 해야 한다. 가장 거룩한 날이라고 할 수 있는 대속죄일로부터 희년이 시작된다는 점도 이 점을 두드러지게 보여 준다. 희년은 자유가 선포되는 해이며, 거룩하다. 앞에서도 거듭 살펴보았지만, 자유와 해방은 하나님께서 구별하신 거룩한 것들이다. 거룩은 깊은 종교성과 심오한 예배와 제사만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집 없고 가족을 잃은 이스라엘이 다시 그 땅으로, 다시 그 가족들에게로 돌아가는 것에서도 구현된다. 그러므로 희년은 오늘의 교회를 향해 자유와 해방을 거룩의 범주 안에 담아내고 있는지를 묻고 있다.
맺음말
레 위기에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하나님의 배려가 율법 조항의 형태로 제시된다. 가난으로 인해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지 못하는 경우가 없도록 세밀하게 규정되어 있으며, 가난으로 인해, 외국인임으로 인해 억울한 차별을 당하거나 불의한 재판을 겪는 일이 없게 하는 것도 여호와 앞에서 살아가는 거룩한 삶의 한 부분으로 규정되어 있다. 나아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난의 수렁에 빠지게 되는 현실을 대비해, 매 오십 년마다 희년을 실행함을 통해 가난이 대물림되는 것을 구조적으로 방지한다. 이러한 내용이 담긴 책이 바로 레위기이다. 그리고 이러한 삶이야말로 성도의 사회적 실천 따위가 아니라, 여호와 앞에서 살아가는 거룩한 삶의 본질임을 레위기는 강하게 제시하고 있다.
참고
Levine, B. Leviticus. The JPS Torah Commentary. Philadelphia/New York/Jerusalem: The Jewish Publication Society, 1989.
Milgrom, Jacob. Leviticus 1~16. The Anchor Bible 3. New York: Doubleday, 1991.
. Leviticus 17~22. The Anchor Bible 3A. New York: Doubleday, 2000.
. Leviticus 23~27. The Anchor Bible 3B. New York: Doubleday, 2001.
Wenham, G. J. The Book of Leviticus. NICOT. Grand Rapids: Wm. B. Eerdmans, 1979.
[열왕기에 나타난 부] 전문 보기
열왕기상하에 나타난 부 – 솔로몬, 아합, 나아만, 수넴 여인을 중심으로
이 글의 목적은 열왕기상하에 등장하는 왕들과 부자들이 재물에 대해 가진 태도를 살피고 그에 대한 성경의 평가에 관심을 가지고 관련 본문들을 주해하는 것이다. 또한 그러한 논의 가운데 배울 수 있는 적용점들을 정리하는 것이다.
열왕기서에 등장하는 부자로는 누구보다 솔로몬을 빼 놓을 수 없다. 또한 다른 왕들의 경우, 그들의 부에 대해 직접적은 서술을 드물지만, 그들이 부자였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그렇기에 그들의 재물을 대하는 모습이 이 글의 중요한 소재가 될 것이다. 물론 왕들의 부는 현대의 일반 시민, 혹은 개인의 부와는 다른 성격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부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궁극적인 사실은 변함이 없을 것이며, 이에 왕들의 부와 그들의 부를 대하는 태도는 충분히 현대에도 의미 있는 시사점을 던져줄 것이다. 솔로몬과 더불어 특별히 아합을 살펴볼 것이다.
왕들 외에 재물에 대한 태도와 사용과 관련해 우리가 주목할 수 있는 부유한 인물들로는 나아만(왕하 5장)과 수넴 여인(왕하 4:8-37; 8:1-6)이 있다. 이들이 얼마나 부유했는지는 성경이 명시적으로 묘사하지는 않지만 이들이 등장하는 본문의 살펴보면 부자였다고 말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런데 그런 부유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삶에 결정적인 부족함이 있었다는 사실은 흥미로운 시사점을 준다. 마지막으로 주목해보고 싶은 인물들은 부자가 아니라 그 반대인 “가난한 사람들”이다. 특히 나아만 아내의 여종과 나아만의 종들을 살필 것이다. 이들의 경제적 상황에 대해서 성경은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지만 이들의 사회적 신분을 고려할 때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경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러한 부자가 아닌 “가난한 자”들에 대한 논의는 열왕기상하에 나타난 부에 대한 논의를 풍성하게 할 것이다.
1. 솔로몬 (열왕기상 3-11장)
솔로몬의 생애를 흔히 긍정적인 전반기와 부정적인 후반기로 나누기도 한다. 그러나 본문을 면밀히 살펴보면 그의 통치 초기부터 배교의 씨앗이 뿌려졌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본문은 열왕기상 3장 1절이다. 2장 마지막에서 “나라가 솔로몬의 손에서 견고”해진 다음 첫 사건으로 열왕기 저자가 제시하는 사건이 솔로몬이 애굽의 왕 바로와 혼인 관계를 맺은 것이다. 구약 성경에서 애굽은 부정적인 함의가 뚜렷하다. 특히 왕이 범할 수 있는 잘못들에 대해 경고한 신명기 17장 14-17절는 군마를 얻으려고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해서는 안된다는 말씀을 포함하고 있다 (신 17:16). 솔로몬은 애굽과 결혼 동맹을 맺어 국제정치적 안정을 도모했던 것이다. 이러한 솔로몬의 정치적 외도는 경제적 신실과 신학적 불충과 함께 했다. 성전을 건축하는 것이 미루어졌으며(1절하) 그로 인해 여호와에게 온전한 예배가 드려지지 못했다(2-3절). 솔로몬은 여호와를 사랑하면서도 동시에 애굽의 힘을 의지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결국 그의 치명적 배교로 발전하게 된다 (왕상 11:1-2). 또한 이런 솔로몬의 하나님의 대한 온전하지 못한 사랑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선물은 지혜와 부를 사용하는데 있어서도 결국은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말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큰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그 속을 면밀히 살폈을 때 솔로몬의 배교의 씨앗이 그의 통치 초기에 이미 뿌려졌음을 보여주는 3장 1-3절 이후, 솔로몬은 여호와로부터 지혜와 총명을 받는다(3:4-15). 그리고 그 지혜를 사회에서 멸시 받는 사람들을 위해 사용한다(3:16-28). 창기를 위한 재판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나라의 조직을 정비한다(4:1-20).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를 통해 이런 이들을 이룬다. 이런 지혜의 성공적 사용에 관해 4장 20절은 솔로몬이 왕으로 있던 통일 왕국의 모든 사람들이 정말 행복했다고 말하며 마무리한다. 솔로몬이 하나님께 지혜를 구했던 이유는 백성들의 수가 많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주께서 택하신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 그들은 큰 백성이라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사오니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왕상 3:7하-9). 그런데 정말로 이스라엘의 인구가 바닷가의 모래 같이 많아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솔로몬이 여호와께서 주신 지혜를 잘 사용한 덕분에 행복할 수 있었다(왕상 4:20). 솔로몬의 지혜와 그로 인한 나라의 부강함은 솔로몬 자신의 부유함을 가져왔을 뿐 아니라 (4:21-23) 백성들이 압제가 착취 없이 경제적 풍요를 누리는 토대가 되었다. 백성들이 “단에서 브엘세바에 이르기 까지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 나무 아래에서 평안히 살았더라”라는 열왕기상 4장 25절의 표현은 이상적인 경제 상황을 묘사하는 것이다. 솔로몬이 여호와께 받은 지혜의 복을 온 백성이 누렸던 것이다. 요컨대 솔로몬이 자신의 지혜를 바르게 사용했을 때 그 자신이 부유함을 누릴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풍성한 부를 동일하게 누릴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런 이상적인 상황은 10장에 이르면 바뀌고 만다.
열왕기상 10장에는 솔로몬의 명성을 듣고 찾아온 스바 여왕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그녀는 “어려운 문제”를 내어 솔로몬의 지혜를 확인해 보고자 했다(1절). 그리고 솔로몬은 스바 여왕의 모든 질문에 대답을 한다(3절). 그리고 스바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 외에도 그의 왕궁과 음식 건축 장식 등을 보고 넋을 잃는다(4-5절). 개역개정에서 “크게 감동”되었다고 번역된 표현은 문자적으로 “그녀 안에 더 이상 “루아흐”가 없었다”는 문장으로 “넋을 잃었다”는 새번역이 좀 더 히브리어 본문의 느낌을 잘 살려준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사실은 스바 여왕이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솔로몬의 말의 지혜와 그의 왕궁과 성전의 화려함 때문에 넋을 잃었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은 6-9절에 있는 스바 여왕의 말을 통해 다시 직접 확인 할 수 있다. 솔로몬의 지혜와 부에 대한 찬양은 앞에 살펴 보았던 열왕기상 4장에 이미 등장했다. 그러나 솔로몬에 대한 4장의 나레이터의 평가와 10장의 스바 여왕의 평가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4장에서는 솔로몬의 지혜가 백성들에게 유익이 되었다(4:20, 25). 그리고 백성들이 누린 경제적 풍성함이 그 유익의 중요한 측면이었다. 그런데 10장에 있는 스바 여왕의 말은 솔로몬의 지혜의 유익을 누리는 사람들로 그의 왕궁의 신하들만을 언급하고 있다 (10:8). 8절에서 개역개정이 “당신의 사람들”이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구문을 새번역은 “임금님의 백성”이라고 번역해 마치 10장에서도 솔로모의 지혜의 덕을 이스라엘 온 백성이 누리는 듯한 인상을 주며 4장과 10장의 차이를 없애 버렸다. 그러나 이 표현에 쓰인 히브리어 단어는 일반적인 사람을 나타내는 단어 “이쉬”의 복수형으로 개역개정의 번역이 좀 더 적절하다. 여기서 “당신의 사람들이여”라는 표현은 이어지는 “당신의 이 신하들이여”와 평행을 이루며 왕궁 안에 있는 솔로몬의 대신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더 흥미로운 사실은 새번역의 난외주가 밝히듯이 “당신의 사람들이여”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구문을 칠십인역과 시리아역은 “당신의 부인들이여”라고 번역했다는 사실이다. “사람들”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첫 자음이 없다면 “부인들”로 번역되어질 수 단어다. 만일 칠십인역과 시리아역이 원문을 반영하는 것이라면 솔로몬의 지혜와 부의 유익이 백성들이 아니라 솔로몬 왕궁 안에 있는 사람들만 누리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스바 여왕의 칭찬의 특징이 더욱 도드라진다. 이러한 스바 여왕의 칭송의 특징은 10장 전체의 분위기와도 잘 어울린다. 10장 전체는 솔로몬의 지혜가 백성들에게 준 유익이 아니라 그것이 왕궁에 가져온 유익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인다. 열왕기상 4장에서는 음식이 이스라엘로 들어왔다(4:22). 그러나 이제 10장에서 솔로몬이 통치하는 나라에 들어오는 것은 사치품들이다. 향품, 금, 보석(10:2); 금, 향품, 보석, 금, 백단목 (10:10-12); 금, 은, 상아, 원숭이, 공작 (10:22); 금 그릇, 의복, 갑옷, 향품, 말, 노새(10:25) 등이 10장이 기록하고 있는 솔로몬 왕국의 수입품들이다. 비록 이것들이 솔로몬 왕국의 부강함과 왕궁의 부유함을 보여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하나 같이 백성들의 생활에 필요한 것이 아니라 왕궁의 화려함을 꾸미는 사치품들이라는 점에서 4장이 보여준 솔로몬 왕국의 풍성함과는 대조되는 물건들이다. 25절은 금, 은, 상아, 원숭이, 공작을 다시스의 배가 삼 년에 한 번씩 실어 왔다고 말한다. 삼 년이라는 시간은 아마도 배가 이스라엘과 그 물품들의 원산지를 왕복하는데 걸리는 시간으로 매우 먼 진기한 장소에서 온 물품들이 솔로몬의 부를 더해주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런 재화와 물건들은 솔로몬의 탐닉에 사용된다. 비록 9절에서 스바 여왕이 여호와께서 솔로몬을 “왕으로 삼아 정의와 공의를 행”하게 하신 여호와를 송축하지만 이 표현은 솔로몬의 현재 상태를 묘사하는 현실적 표현이라기 보다 고대 근동에서 왕의 역할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를 표현한 외교적인 수사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왜냐하면 10장의 전후 문맥에서 솔로몬이 행한 정의와 공의의 구체적인 모습을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10장의 이어지는 문맥은 솔로몬이 자신의 물질적 부요함을 전적으로 자신의 탐닉에 사용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삼상 8:10-18은 왕이 백성들을 어떻게 착취하는지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솔로몬이 자신만을 위해 부를 사용하는 모습을 이어지는 10장 14-29절은 더 확실하게 보여준다. 이 본문에서 “금”이 최소한 10번 언급되면서 솔로몬이 금을 계속해서 축적하는 것을 보여준다(14, 16-18, 21-22, 25절). 이렇게 많이 모인 금을 솔로몬은 왕궁을 장식하는데 사용했다(16-17절). 그는 금을 두드려 펴 방패를 수백 개 만들었다. 큰 방패 이백 개, 작은 방패 삼백 개를 만들었는데, 큰 방패는 약 3.5킬로그램(600 세겔), 작은 방패는 약 900그램(300 세겔) 정도의 무게였다. 그는 또한 자신의 보좌를 금으로 입혔다(18절). 왕궁의 모든 식기구도 금으로 만들었다. 은은 귀하게 여기지 않을 정도로 솔로몬의 부는 대단했다(21절). 그런데 이러한 솔로몬의 물질적인 부는 사치한 왕궁을 만드는데 그치지 않고 군사력을 증강하는 데에도 사용되었다. 이것이 26절에서 이어지는 내용이다. 그는 병거와 마병을 모았다. 솔로몬이 병거와 마병을 모았다는 기록은 4장 26절에 이미 나왔으나 10장의 구절은 솔로몬이 말을 애굽에서 수입했다는 사실을 추가로 알려준다(28-29절). 29절 마지막의 기록은 요즘 표현으로 하자만 솔로몬이 무기 무역에도 관여했음을 보여준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신명기 17장은 왕에게 주는 경고를 기록하고 있다. “그는 병마를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병마를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하지 말 것이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 후에는 그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 것이라 하셨음이며. 그에게 아내를 많이 두어 그의 마음이 미혹되게 하지 말 것이며 자기를 위하여 은금을 많이 쌓지 말 것이니라” (신명기 17:16-17). 이 경고에서 솔로몬은 열왕기상 10장에서 아내를 많이 두지 말라는 것 외에 모든 것을 어기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이어지는 열왕기상 11장은 다름 아닌 솔로몬이 많은 아내를 두고 그들을 사랑하여 결국 마음을 돌려 여호와를 떠났음을 보여준다. 여호와께서 주신 지혜를 통해 얻은 부요함을 백성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탐닉을 위해 사용했던 솔로몬은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잘못된 마지막을 맞이하고 만다. 그리고 그의 화려했던 왕국은 결국 둘도 쪼개지고 만다.
<설교를 위한 적용>
하나님이 주신 선물은 이웃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 재물도 이웃을 위해 사용해야 하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를 처음에는 백성들을 풍요롭고 행복하게 하는데 사용했었다. 그러나 바르게 사용되었던 솔로몬의 지혜와 부가 10장에 이르면 솔로몬 개인의 영화를 위해 왕궁을 화려하게 만드는 데에만 사용되고 만다. 솔로몬은 지혜를 통해 명성을 쌓았고 그 명성으로 많은 부를 모으게 되었다. 그리고 그만 그 부에 탐닉했다. 상아 보좌를 만들고 그것을 금으로 입혔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신 목적은 백성들을 위한 것이었지 그 지혜를 만방에 자랑하고 그것을 이용해 금을 모으고, 그것으로 자신의 왕궁을 꾸미고 금 보좌를 만들라고 지혜를 주신 것은 결코 아니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여러 선물을 주신다. 하나님이 모든 것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에서 지혜와 그것을 통한 부를 선물로 주셨듯이 우리에게도 여러 가지 선물을 주신다. 그리고 물질적인 풍요와 재물 또한 분명히 하나님의 선물이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 어떻게 사용될 수 있는지 솔로몬은 잘 보여준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이웃을 행복하게 하는데 사용될 수 있다. 그러나 또한 하나님의 선물을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얼마든지 사용될 수도 있다는 것을 솔로몬은 보여준다.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재물을 사용하라는 도전은 사실 많이 듣는 도전이다. 그런데 중요해서 강하고 자주 말할 수록 그 도전이 식상해지는 역설적인 상황에 처하게 된다. 어쩌면 솔로몬에게는 금과 은, 아내와 말을 많이 두지 말라는 신명기 17장의 경고가 그러한 도전이었을 수 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재물을 이웃과 공동체,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유익되게 사용해야 한다는 도전은 너무 많이 들어서 진부하고 식상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이 진부해 보이는 도전은 매우 심각한 도전이다. 솔로몬이 “진부한 경고”를 무시했을 때, 그의 왕국이 쪼개지고 말았듯이 우리도 재물로 이웃을 섬기라는 “평범한 진리”를 무시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던 재물을 필요한 곳으로 직접 개입해서 옮기실지도 모른다.
2. 아합 (열왕기상 21장)
아합은 이스라엘의 가장 악한 왕으로 평가된다(왕상 16:30; 21:25). 이러한 아합에 대한 평가는 그의 이야기의 첫 부분에 기록되었을 뿐아니라(왕상 16:30) 그의 생애에 있었던 한 사건 뒤에 한 번 더 반복된다(왕상 21:25). 그 사건이 바로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한 사건이다.
아합은 자기 왕궁에 가까이 있는 나봇의 포도원을 탐낸다. 아합은 나봇에게 그가 원한다면 포도원 값을 계산해서 주거나 다른 포도원으로 바꾸어 줄 수 있다는 제안을 했다(21:1-2). 이 제안은 아합이 무작정 더 많은 재물을 탐한 것은 아니라는 인상을 준다. 만일 나봇이 아합의 제안에 응했다면 아합과 나봇의 총 재산 가치는 변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합이 제안한 거래는 아합에게 더 큰 무형의 만족을 주었을 것이다. 물질적 가치만으로는 동등한 거래로 보이지만,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고 그 포도원을 자신의 원대로 “개발”하여 “채소 밭”(개역개정) 혹은 “정원” (새번역)으로 만들었을 때 그가 지불한 경제적 비용보다 더 큰 만족을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봇은 아합의 제안을 거절한다. 그 이유는 아합의 제안을 따르는 것이 여호와의 법을 어기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나봇이 염두에 두고 있는 법은 하나님이 각 가정들에게 정당한 소유로 준 땅의 경계를 바꾸지 말라는 신명기 19장 14절이었을 것이다. 이 신명기 구절의 정신은 모든 땅이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땅을 아주 팔지 말라는 레위기 25:23의 정신과 맥을 같이 한다. 나봇이 땅의 궁극적 소유주에 관한 율법과 그 정신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율법에 근거해 아합의 제안을 거절했을 때 아합이 낙심한다. 그가 왕의 권위를 사용해 강제로 거래를 성사시키지 않은 것으로 보아 아합도 이 법의 중요성을 인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지식적 인식이 자신의 바람을 이루려는 아합의 감정적 욕구를 잠재우지는 못했다. 개역개정에서 “근심하고 답답했다”라고 번역된 당시 아합의 감정 상태를 새번역은 “마음이 상하여 화를 냈다”라고 번역한다(새번역 20:43도 참고). 화는 나지만 아합은 어쩔 수 없었다.
이 때 그의 아내 이세벨이 개입한다. 그녀는 시돈 왕 엣바알의 딸로 아합과 그녀의 결혼은 이스라엘에 바알과 아세라 숭배를 도입하는 계기가 되었다(왕상 16:31-33). 이세벨은 나봇에 불리한 증언을 하는 거짓 증인을 세우라는 편지를 나봇의 성읍의 장로와 귀족들에게 아합의 이름으로 보낸다. 편지를 받은 장로와 귀족들을 성읍의 정의를 세워야 하는 그들의 의무를 저버리고 권력의 요구에 굴한다(신 19:11-13 참고). “이세벨의 지시”대로 그들은 나봇에 대해 거짓 증거하는 불량자 두 사람을 세워 나봇을 돌에 맞아 처형당하게 한다. 이렇게 나봇이 죽은 후 아합은 그의 포도원을 차지한다. 여기서 나레이터는 이미 나봇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아합이 차지하려고 했던 포도원을 마지막까지 “나봇의 포도원”이라고 부름으로써 아합의 잘못을 꾸짖고 있다(21:16).
이러한 행동들은 그동안 미루어져 왔던 오므리 왕조와 아합 집안에 대한 명시적인 심판을 초래한다. 심판의 메시지를 엘리야를 통해 아합에게 선포하실 때 여호와께서도 “나봇의 포도원”이라는 표현을 사용해 아합의 잘못을 드러내신다(21:18). 심판의 메시지는 아합 개인에 대한 심판(21:19), 아합 집안에 대한 심판 (21-22, 24절), 이세벨에 대한 심판(23절)으로 이루어져있다. 심판의 선언 마지막에 아합이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악한 자였다는 평가가 내려진다(25-26절).
<설교를 위한 적용>
첫 째, 재물에 대한 욕심이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는 것을 막는다. 아합은 자신의 바람이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내면의 욕망을 잠재우지 못했다. 한 번 불 붙은 그의 재물에 대한 탐심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도 꺼뜨릴 수가 없었다. 오히려 하나님의 법 때문에 자신의 탐심이 채워지지 못하는 것 때문에 마음이 상해 화를 내기까지도 했다. 우리는 재물을 추구하는 것을 중립적인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재물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면 재물 자체는 중립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재물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힘이 세다. 그 센 힘은 하나님이냐 재물이냐를 선택하는 기로 앞에 우리를 세우기도 한다. 재물이 가지고 있는 물신적 힘을 과소 평가하는 것은 하나님을 버리고 재물을 택하는 잘못된 결과로 이르는 시작이 될 수 있다. 재물의 힘과 재물이 주는 힘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어리석다. 재물에 대한 욕망은 하나님의 법을 거추장스럽고 싫어하게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위험한 것이다.
두 번째로,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취하게 된 과정은 절차적으로는 합법적이라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우리가 어떤 재물을 소유하게 되는 과정이 하나님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서도 세상의 법 아래에서는 얼마든지 합법적일 수 있다. 성읍의 정의를 세우고 지켜야 하는 장로와 귀족들이 권력의 힘 아래 그 의무를 저버렸을 때, 그 후에 벌어진 일들은 율법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었다. 권력의 요구에 따라 불량자들이 거짓 증언을 했을 때, 그 증언 자체를 제외한 다른 모든 과정은 철자적으로 “합법적”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이세벨이 이 일을 꾸밀 때 두 명의 증인을 요구했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신명기 19장 15절은 사람의 죄를 판정할 때 한 명의 증인으로는 부족하며 두 명 이상의 증인이 필요하다는 법을 기록하고 있다. 이세벨이 나봇을 죽인 절차는 불량자들의 증언이 거짓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철저하게 합법적인 과정으로 보였을 것이다. 이렇게 절차적 합법성을 지키며 아합은 자신의 재물에 대한 욕심을 채울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재물의 형성 과정이 “합법적”이었다는 것 만으로는 하나님의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다. 법은 도덕의 최소한의 요구이며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요구하시는 기준은 준법이나 합법을 넘어서는 것이다. 내가 법을 어기며 재물을 취득하거나 재산을 형성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만 스스로 만족하기 않고 과연 나를 통해 이웃의 필요를 채우시려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행해 왔는지, 이웃 사랑을 저버리지 않고 재물을 취해 왔는지 정직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다.
세 번째로, 재물에 대한 탐욕은 죄악의 연쇄 반응을 일으킨다. 아합의 이야기는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는 열 번째 계명을 어기면서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 잘못은 한 잘못에서 멈추지 않고 이어서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기는 것으로, 그 다음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기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나봇의 포도원을 아합이 취한 것을 궁극적으로 도둑질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긴 셈이었다. 이처럼 아합의 탐욕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십계명의 대 부분을 어기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파멸을 초래했다. 재물에 대한 탐욕을 채우는 과정에 우리도 이러한 죄악의 연쇄 반응에 빠질 수 있다. 그야말로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라는 것을, “돈을 좇다가 믿음에서 떠나 헤매기도 하고 많은 고통을 겪기도”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딤전 6:10, 새번역).
3. 나아만과 수넴 여인, 나아만의 종들과 게하시 (열왕기하 5장, 4장 8-37절; 8장 1-6절)
3.1. 나아만과 수넴 여인의 경제적 상황과 실존적 필요
나아만은 크고 존귀한 자였다. 또한 “큰 용사”로 소개된다(왕하 5:1). 여기서 “큰 용사”로 번역된 히브리어 표현은 “깁보르 하일”이다. 이 표현은 맥락에 따라 군사적인 함의를 가질 수 있으나(삿 6:12) 어떤 경우에는 경제적인 능력을 설명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룻기 2장 1절에서 보아스가 “깁보르 하일”로 소개되어지는데 새번역은 “재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번역하기도 했다. 나아만의 경우는 일차적으로 군사적인 함의가 있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두 가지 점에서 이 표현을 경제적인 표현으로 이해해 볼 수 있다. 첫 째, 1절 상반부에서 그의 군사적인 특징이 여러번 이미 충분히 소개되었다(“군대 장관”, “크고 존귀한 자”, “여호와께서 그에게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다”). 물론 이 특징들을 다시 한 번 “깁보르 하일”로 요약했다고도 볼 수 있지만, 그에 대한 “나병 환자”라는 새로운 소개와 더불어 그의 경제적 능력에 대한 새로운 정보로 이해할 수도 있다. 특히 1절 하반부가 “그 사람은 ~였다”(“브하잇쉬 하야”)라는 접속사와 함께 나오는 새로운 명시적 주어와 동사로 시작하는 점에서 그러하다. 요컨대, 그는 군사적(혹은 정치적)으로 힘이 있었고, 경제적으로도 부유했다. 그러나 그는 결정적으로 나병환자였다는 것이다. 두 번째, 만일 “깁보르 하일”을 이렇게 경제적으로 이해한다면 나아만의 정치적 힘, 경제적 능력, 그리고 나병이라는 실존적 상황은 그가 나병의 치료를 받기위해 이스라엘로 향했을 때 각각 왕이 써준 편지과 그가 지참했던 “은 십 달란트와 금 육천 개와 의복 열 벌”로 상징된다. 그가 지참했던 재물들이 아람 왕이 내어준 것들일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5절에 연속적으로 묘사된 나아만의 행동은(“그가 떠났다. 그가 취했다”) 그 재물들이 나아만 자신의 것이라는 인상을 준다. 나아만은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힘이 있는 자였다. 그러나 그 힘으로 인해 그의 인생에 아무런 걱정이 없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나병환자였다.
수넴 여인은 “귀한 여인”(개역개정)이라고 소개된다(왕하 4:8). 문자적으로는 “큰 여인”(“잇샤 그돌라”)이며 새번역은 “부유한 여인”이라고 번역한다. 이 여인의 부유함은 그가 엘리사를 위해 방을 마련하고 필요한 가구들을 채워 넣을 수 있었다는 사실에서 엿볼 수 있다. 또한 그러한 도움에 감사해 엘리사가 왕이나 사령관에게 그녀가 필요한 것을 구하겠다고 말했을 때 특별한 도움을 구하지 않았다. “나는 내 백성 중에 거주한다”는 표현은 문자적 번역으로 그 함의를 바로 파악하기가 조금 어렵다. 그러나 근접 맥락에서 볼 때 이 대답을 여인의 생활의 만족스러움을 보여주며 특별한 필요가 없음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에서 “저는 저의 백성과 한데 어울려 잘 지내고 있습니다”(새번역)는 번역을 적절해 보인다. 그리고 열왕기하 8장에 보면 수넴 땅에 기근이 들었을 때 이 여인이 자신의 집을 떠나 블레셋 땅에 칠년 간 거주한다. 7년이 지나고 돌아왔을 때, 그녀는 되 찾아야 할 집과 전토가 있었다. 이런 관찰들로 미루어 보아 그녀의 경제적 환경은 부족함이 없이 부유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런데 이 두 부자의 공통점이 있었다. 그것은 그들 모두 재물을 가지고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다.
<설교를 위한 적용>
재물이 인간의 삶에 모든 만족을 가져오지 못한다. 나아만과 수넴 여인은 재물이 풍족했다. 그러나 이들의 재물의 풍성함이 그들의 실존적 필요의 전부가 아니었다. 나아만은 나병환자였으며 수넴 여인은 남편이 늙기까지 아들이 없었다. 결국 물질은 그들 인생의 깊은 아픔을 치유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나아만의 경우 그가 가지고 있었던 정치적 경제적 힘과 그 힘 때문에 누렸던 삶의 습관이 그가 치유 받을 수 있던 기회를 놓치게 만들 뻔까지 했다. 우리는 돈을 벌면, 부자가 되면 모든 문제가 해결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에 자주 빠진다. 그러나 나아만과 수넴 여인이 보여주는 것은 재물이 결코 해결 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문제는 두 사람 모두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는 것을 통해 해결되었다.
3.2. 재물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재물이 전부는 아니다.
수넴 여인이 엘리사를 잘 섬긴 것은 칭찬받을 만한 일이었다. 이 사실은 대접을 받은 엘리사가 여인에게 무언가 보답하고자 했던 일을 통해 알 수 있다. 또한 칠 년의 기근 후에 여인과 그의 가족이 블레셋 땅에서 돌아와 집과 밭을 돌려 받기 위해 왕에게 나아갔을 때 벌어진 일을 통해 알 수 있다(왕하 8:1-6). 이 여인이 왕에게 나아갔을 때 왕은 게하시와 엘리사가 한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것은 아무도 계획하지 않았던 “우연”이다. 그리고 이 “우연”적 상황을 히브리어 구문은 세 가지 장치를 통해 두드러지게 묘사한다. 첫 째, 와우연계미완료형을 통해 진행해 오던 내러티브의 흐름(“칠년이 지났다”, “여인이 돌아왔다”, “그녀가 나왔다”)을 4절의 분사구문이 끊고 있다. 이는 부대상황을 묘사하는 전형적인 방법으로 3절 마지막의 사건이 벌어졌을 바로 그 순간 4절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음을 명확하게 알려준다. 여인이 왕에게 나왔을 바로 그 때 왕은 게하시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두 번째, 여인은 단순히 왕과 게하시가 이야기 하고 있었을 때 나아온 것 만이 아니었다. 그 여인이 왕에게 나아왔던 그 순간에 게하시는 다른 내용이 아니라 바로 그 여인의 아이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5절). 세 번째로, 5절에 사용된 “히네”는 독자의 시선을 수넴 여인에게 모은다. 개역개정에는 이 “히네”가 번역되어 있지 않다. 만일 넣어서 번역한다면 “게하시가 ... 왕에게 이야기 할 때에, 보라! 그 다시 살린 아이의 어머니가 ... 호소하는 지라”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예기지 못하게 벌어진 우호적인 상황에서 여인은 자신을 소개하고 집과 밭에 대한 호소를 하는 것이 훨씬 쉬웠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녀는 자신이 원했던 것 이상의 도움을 얻게 된다. 나레이터가 이 상황이 하나님의 섭리라고 명시적으로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이 “우연”의 사건이 자신의 재물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람을 도왔던 수넴 여인의 섬김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적” 보답으로 이해하는 것을 막을 만한 본분의 증거 또한 없다. 수넴 여인은 자신의 재물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람을 돌보는 일을 했으며 그로 인해 그녀는 나중에 하나님의 돌보심을 입는다.
나아만은 많은 재물을 예물로 가지고 와 엘리사 집 앞에 이른다. 그런데 엘리사는 전혀 나오지 않고 사환을 시켜 요단 강에서 몸을 씻으라고 말을 전한다. 이 때 나아만은 화를 내며 돌아가려고 한다(왕하 5:12). 정치적 경제적 힘을 누리며 살아왔던 나아만의 삶의 습관이 은혜을 경험할 수 있는 순간 바로 앞에서 그를 방해했다. 그의 재물이 그의 구원의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 순간 나아만의 이름 없는 종들이 끊어지려는 여호와의 은혜의 역사를 계속 이어내고 있다(13절). 나아만의 종들이 나아만을 다시 권하고 그 권고에 따라 나아만이 요단강에서 몸을 씻었을때 그의 살이 (그리고 그의 마음이) 회복되었다(14절). 이 회복의 역사에 나아만의 재물은 방해가 될 뻔 했을 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심지어 나아만의 재물은 엘리사에게 감사를 표하는데에도 아무런 소용이 되지 않았다(5:15-16). 나아만에게 벌어진 하나님의 일은 재물이나 부자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이름 없는 그의 종들을 통해 벌어졌다. 사실 나아만에게 임한 여호와의 은혜의 역사는 이스라엘 땅에서 아람 사람들에게 잡혀가 나아만의 아내의 몸종이 된 이름 없는 어린 소녀에게서 시작되었던 것이다(5:2)
<설교를 위한 적용>
재물로 하나님을 일을 할 수 있지만 재물만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통로는 아니다. 수넴 여인은 재물을 통해 하나님의 사람을 도왔고 하나님은 그 섬김을 인정해 주셨다. 그녀의 재물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도구가 된 것이다. 그러나 나아만의 경우는 그의 부유함이 하나님의 일을 그르칠 뻔한 걸림돌이 되었다. 오히려 재물과는 거리가 먼 아람으로 잡혀간 이름 없는 어린 소녀 몸종과 푸대접에 익숙했던 나아만의 이름 없는 종들이 하나님의 일의 통로가 되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고 싶어 재물을 구한다. 필요한 경우 하나님께서 재물을 허락하시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겠지만 재물이 없다고 하나님 역사의 통로가 될 수 없는 것을 결코 아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역사를 위해 재물을 쓰실 수도 있고 이름 없는 작은 성도의 말 한마디를 사용하실 수도 있다.
결론
재물은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힘이 있다. 이 힘을 쉽게 간과해서는 안된다. 이 힘에 넘어 갈 때, 우리는 재물을 사랑하는 데에서 부터 시작해 온갖 종류의 악을 행하게 된다.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아 간 이야기는 이것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재물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기도 하신다.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실 때에는 그것을 통해 이웃의 유익을 추구하라는 목적이 있다. 솔로몬은 초기에 이 목적에 맞게 그의 지혜와 부를 사용했으며 수넴 여인도 하나님의 사람을 돕는데 재물을 잘 사용했다. 그러나 이러한 목적을 잊을 때, 솔로몬이 그러했듯이 재물의 물신적인 힘에 지게 되고 결국은 개인적으로 또한 공동체 적으로 파멸에 이르게 될 것이다. 재물에 관해서도 “선 줄로 생각한 자는 넘어질까 주의하라”라는 바울의 권면과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당으면 하나님의 사랑은” 그 안에 없다는 요한의 외침은 여전히 유효하다.
진정한 힘과 능력은 재물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부터 나온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름 없는 작은 자들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자신의 일을 이루실 수 있다. 커져야만 하나님의 일을 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재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참 신이시다.
(주) 이 글을 작성하는데 Iain W. Provan, 1 and 2 Kings (NIBC; Peabody: Hendrickson, 1995)이 많은 정보와 통찰을 주었음을 밝힙니다.
전성민. 서울대 수학과를 졸업하고 캐나다 리젠트 칼리지에서 성서언어(M.C.S.)와 구약학(Th.M.)을, 영국 옥스포드대학교에 구약학을 공부했다(D.Phil.). 현재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연구위원이며 용인의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구약학 교수로 있다.
이 글의 목적은 열왕기상하에 등장하는 왕들과 부자들이 재물에 대해 가진 태도를 살피고 그에 대한 성경의 평가에 관심을 가지고 관련 본문들을 주해하는 것이다. 또한 그러한 논의 가운데 배울 수 있는 적용점들을 정리하는 것이다.
열왕기서에 등장하는 부자로는 누구보다 솔로몬을 빼 놓을 수 없다. 또한 다른 왕들의 경우, 그들의 부에 대해 직접적은 서술을 드물지만, 그들이 부자였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그렇기에 그들의 재물을 대하는 모습이 이 글의 중요한 소재가 될 것이다. 물론 왕들의 부는 현대의 일반 시민, 혹은 개인의 부와는 다른 성격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부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궁극적인 사실은 변함이 없을 것이며, 이에 왕들의 부와 그들의 부를 대하는 태도는 충분히 현대에도 의미 있는 시사점을 던져줄 것이다. 솔로몬과 더불어 특별히 아합을 살펴볼 것이다.
왕들 외에 재물에 대한 태도와 사용과 관련해 우리가 주목할 수 있는 부유한 인물들로는 나아만(왕하 5장)과 수넴 여인(왕하 4:8-37; 8:1-6)이 있다. 이들이 얼마나 부유했는지는 성경이 명시적으로 묘사하지는 않지만 이들이 등장하는 본문의 살펴보면 부자였다고 말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런데 그런 부유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삶에 결정적인 부족함이 있었다는 사실은 흥미로운 시사점을 준다. 마지막으로 주목해보고 싶은 인물들은 부자가 아니라 그 반대인 “가난한 사람들”이다. 특히 나아만 아내의 여종과 나아만의 종들을 살필 것이다. 이들의 경제적 상황에 대해서 성경은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지만 이들의 사회적 신분을 고려할 때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경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러한 부자가 아닌 “가난한 자”들에 대한 논의는 열왕기상하에 나타난 부에 대한 논의를 풍성하게 할 것이다.
1. 솔로몬 (열왕기상 3-11장)
솔로몬의 생애를 흔히 긍정적인 전반기와 부정적인 후반기로 나누기도 한다. 그러나 본문을 면밀히 살펴보면 그의 통치 초기부터 배교의 씨앗이 뿌려졌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본문은 열왕기상 3장 1절이다. 2장 마지막에서 “나라가 솔로몬의 손에서 견고”해진 다음 첫 사건으로 열왕기 저자가 제시하는 사건이 솔로몬이 애굽의 왕 바로와 혼인 관계를 맺은 것이다. 구약 성경에서 애굽은 부정적인 함의가 뚜렷하다. 특히 왕이 범할 수 있는 잘못들에 대해 경고한 신명기 17장 14-17절는 군마를 얻으려고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해서는 안된다는 말씀을 포함하고 있다 (신 17:16). 솔로몬은 애굽과 결혼 동맹을 맺어 국제정치적 안정을 도모했던 것이다. 이러한 솔로몬의 정치적 외도는 경제적 신실과 신학적 불충과 함께 했다. 성전을 건축하는 것이 미루어졌으며(1절하) 그로 인해 여호와에게 온전한 예배가 드려지지 못했다(2-3절). 솔로몬은 여호와를 사랑하면서도 동시에 애굽의 힘을 의지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결국 그의 치명적 배교로 발전하게 된다 (왕상 11:1-2). 또한 이런 솔로몬의 하나님의 대한 온전하지 못한 사랑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선물은 지혜와 부를 사용하는데 있어서도 결국은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말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큰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그 속을 면밀히 살폈을 때 솔로몬의 배교의 씨앗이 그의 통치 초기에 이미 뿌려졌음을 보여주는 3장 1-3절 이후, 솔로몬은 여호와로부터 지혜와 총명을 받는다(3:4-15). 그리고 그 지혜를 사회에서 멸시 받는 사람들을 위해 사용한다(3:16-28). 창기를 위한 재판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나라의 조직을 정비한다(4:1-20).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를 통해 이런 이들을 이룬다. 이런 지혜의 성공적 사용에 관해 4장 20절은 솔로몬이 왕으로 있던 통일 왕국의 모든 사람들이 정말 행복했다고 말하며 마무리한다. 솔로몬이 하나님께 지혜를 구했던 이유는 백성들의 수가 많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주께서 택하신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 그들은 큰 백성이라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사오니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왕상 3:7하-9). 그런데 정말로 이스라엘의 인구가 바닷가의 모래 같이 많아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솔로몬이 여호와께서 주신 지혜를 잘 사용한 덕분에 행복할 수 있었다(왕상 4:20). 솔로몬의 지혜와 그로 인한 나라의 부강함은 솔로몬 자신의 부유함을 가져왔을 뿐 아니라 (4:21-23) 백성들이 압제가 착취 없이 경제적 풍요를 누리는 토대가 되었다. 백성들이 “단에서 브엘세바에 이르기 까지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 나무 아래에서 평안히 살았더라”라는 열왕기상 4장 25절의 표현은 이상적인 경제 상황을 묘사하는 것이다. 솔로몬이 여호와께 받은 지혜의 복을 온 백성이 누렸던 것이다. 요컨대 솔로몬이 자신의 지혜를 바르게 사용했을 때 그 자신이 부유함을 누릴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풍성한 부를 동일하게 누릴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런 이상적인 상황은 10장에 이르면 바뀌고 만다.
열왕기상 10장에는 솔로몬의 명성을 듣고 찾아온 스바 여왕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그녀는 “어려운 문제”를 내어 솔로몬의 지혜를 확인해 보고자 했다(1절). 그리고 솔로몬은 스바 여왕의 모든 질문에 대답을 한다(3절). 그리고 스바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 외에도 그의 왕궁과 음식 건축 장식 등을 보고 넋을 잃는다(4-5절). 개역개정에서 “크게 감동”되었다고 번역된 표현은 문자적으로 “그녀 안에 더 이상 “루아흐”가 없었다”는 문장으로 “넋을 잃었다”는 새번역이 좀 더 히브리어 본문의 느낌을 잘 살려준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사실은 스바 여왕이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솔로몬의 말의 지혜와 그의 왕궁과 성전의 화려함 때문에 넋을 잃었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은 6-9절에 있는 스바 여왕의 말을 통해 다시 직접 확인 할 수 있다. 솔로몬의 지혜와 부에 대한 찬양은 앞에 살펴 보았던 열왕기상 4장에 이미 등장했다. 그러나 솔로몬에 대한 4장의 나레이터의 평가와 10장의 스바 여왕의 평가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4장에서는 솔로몬의 지혜가 백성들에게 유익이 되었다(4:20, 25). 그리고 백성들이 누린 경제적 풍성함이 그 유익의 중요한 측면이었다. 그런데 10장에 있는 스바 여왕의 말은 솔로몬의 지혜의 유익을 누리는 사람들로 그의 왕궁의 신하들만을 언급하고 있다 (10:8). 8절에서 개역개정이 “당신의 사람들”이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구문을 새번역은 “임금님의 백성”이라고 번역해 마치 10장에서도 솔로모의 지혜의 덕을 이스라엘 온 백성이 누리는 듯한 인상을 주며 4장과 10장의 차이를 없애 버렸다. 그러나 이 표현에 쓰인 히브리어 단어는 일반적인 사람을 나타내는 단어 “이쉬”의 복수형으로 개역개정의 번역이 좀 더 적절하다. 여기서 “당신의 사람들이여”라는 표현은 이어지는 “당신의 이 신하들이여”와 평행을 이루며 왕궁 안에 있는 솔로몬의 대신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더 흥미로운 사실은 새번역의 난외주가 밝히듯이 “당신의 사람들이여”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구문을 칠십인역과 시리아역은 “당신의 부인들이여”라고 번역했다는 사실이다. “사람들”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첫 자음이 없다면 “부인들”로 번역되어질 수 단어다. 만일 칠십인역과 시리아역이 원문을 반영하는 것이라면 솔로몬의 지혜와 부의 유익이 백성들이 아니라 솔로몬 왕궁 안에 있는 사람들만 누리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스바 여왕의 칭찬의 특징이 더욱 도드라진다. 이러한 스바 여왕의 칭송의 특징은 10장 전체의 분위기와도 잘 어울린다. 10장 전체는 솔로몬의 지혜가 백성들에게 준 유익이 아니라 그것이 왕궁에 가져온 유익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인다. 열왕기상 4장에서는 음식이 이스라엘로 들어왔다(4:22). 그러나 이제 10장에서 솔로몬이 통치하는 나라에 들어오는 것은 사치품들이다. 향품, 금, 보석(10:2); 금, 향품, 보석, 금, 백단목 (10:10-12); 금, 은, 상아, 원숭이, 공작 (10:22); 금 그릇, 의복, 갑옷, 향품, 말, 노새(10:25) 등이 10장이 기록하고 있는 솔로몬 왕국의 수입품들이다. 비록 이것들이 솔로몬 왕국의 부강함과 왕궁의 부유함을 보여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하나 같이 백성들의 생활에 필요한 것이 아니라 왕궁의 화려함을 꾸미는 사치품들이라는 점에서 4장이 보여준 솔로몬 왕국의 풍성함과는 대조되는 물건들이다. 25절은 금, 은, 상아, 원숭이, 공작을 다시스의 배가 삼 년에 한 번씩 실어 왔다고 말한다. 삼 년이라는 시간은 아마도 배가 이스라엘과 그 물품들의 원산지를 왕복하는데 걸리는 시간으로 매우 먼 진기한 장소에서 온 물품들이 솔로몬의 부를 더해주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런 재화와 물건들은 솔로몬의 탐닉에 사용된다. 비록 9절에서 스바 여왕이 여호와께서 솔로몬을 “왕으로 삼아 정의와 공의를 행”하게 하신 여호와를 송축하지만 이 표현은 솔로몬의 현재 상태를 묘사하는 현실적 표현이라기 보다 고대 근동에서 왕의 역할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를 표현한 외교적인 수사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왜냐하면 10장의 전후 문맥에서 솔로몬이 행한 정의와 공의의 구체적인 모습을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10장의 이어지는 문맥은 솔로몬이 자신의 물질적 부요함을 전적으로 자신의 탐닉에 사용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삼상 8:10-18은 왕이 백성들을 어떻게 착취하는지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솔로몬이 자신만을 위해 부를 사용하는 모습을 이어지는 10장 14-29절은 더 확실하게 보여준다. 이 본문에서 “금”이 최소한 10번 언급되면서 솔로몬이 금을 계속해서 축적하는 것을 보여준다(14, 16-18, 21-22, 25절). 이렇게 많이 모인 금을 솔로몬은 왕궁을 장식하는데 사용했다(16-17절). 그는 금을 두드려 펴 방패를 수백 개 만들었다. 큰 방패 이백 개, 작은 방패 삼백 개를 만들었는데, 큰 방패는 약 3.5킬로그램(600 세겔), 작은 방패는 약 900그램(300 세겔) 정도의 무게였다. 그는 또한 자신의 보좌를 금으로 입혔다(18절). 왕궁의 모든 식기구도 금으로 만들었다. 은은 귀하게 여기지 않을 정도로 솔로몬의 부는 대단했다(21절). 그런데 이러한 솔로몬의 물질적인 부는 사치한 왕궁을 만드는데 그치지 않고 군사력을 증강하는 데에도 사용되었다. 이것이 26절에서 이어지는 내용이다. 그는 병거와 마병을 모았다. 솔로몬이 병거와 마병을 모았다는 기록은 4장 26절에 이미 나왔으나 10장의 구절은 솔로몬이 말을 애굽에서 수입했다는 사실을 추가로 알려준다(28-29절). 29절 마지막의 기록은 요즘 표현으로 하자만 솔로몬이 무기 무역에도 관여했음을 보여준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신명기 17장은 왕에게 주는 경고를 기록하고 있다. “그는 병마를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병마를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하지 말 것이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 후에는 그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 것이라 하셨음이며. 그에게 아내를 많이 두어 그의 마음이 미혹되게 하지 말 것이며 자기를 위하여 은금을 많이 쌓지 말 것이니라” (신명기 17:16-17). 이 경고에서 솔로몬은 열왕기상 10장에서 아내를 많이 두지 말라는 것 외에 모든 것을 어기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이어지는 열왕기상 11장은 다름 아닌 솔로몬이 많은 아내를 두고 그들을 사랑하여 결국 마음을 돌려 여호와를 떠났음을 보여준다. 여호와께서 주신 지혜를 통해 얻은 부요함을 백성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탐닉을 위해 사용했던 솔로몬은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잘못된 마지막을 맞이하고 만다. 그리고 그의 화려했던 왕국은 결국 둘도 쪼개지고 만다.
<설교를 위한 적용>
하나님이 주신 선물은 이웃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 재물도 이웃을 위해 사용해야 하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를 처음에는 백성들을 풍요롭고 행복하게 하는데 사용했었다. 그러나 바르게 사용되었던 솔로몬의 지혜와 부가 10장에 이르면 솔로몬 개인의 영화를 위해 왕궁을 화려하게 만드는 데에만 사용되고 만다. 솔로몬은 지혜를 통해 명성을 쌓았고 그 명성으로 많은 부를 모으게 되었다. 그리고 그만 그 부에 탐닉했다. 상아 보좌를 만들고 그것을 금으로 입혔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신 목적은 백성들을 위한 것이었지 그 지혜를 만방에 자랑하고 그것을 이용해 금을 모으고, 그것으로 자신의 왕궁을 꾸미고 금 보좌를 만들라고 지혜를 주신 것은 결코 아니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여러 선물을 주신다. 하나님이 모든 것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에서 지혜와 그것을 통한 부를 선물로 주셨듯이 우리에게도 여러 가지 선물을 주신다. 그리고 물질적인 풍요와 재물 또한 분명히 하나님의 선물이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 어떻게 사용될 수 있는지 솔로몬은 잘 보여준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이웃을 행복하게 하는데 사용될 수 있다. 그러나 또한 하나님의 선물을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얼마든지 사용될 수도 있다는 것을 솔로몬은 보여준다.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재물을 사용하라는 도전은 사실 많이 듣는 도전이다. 그런데 중요해서 강하고 자주 말할 수록 그 도전이 식상해지는 역설적인 상황에 처하게 된다. 어쩌면 솔로몬에게는 금과 은, 아내와 말을 많이 두지 말라는 신명기 17장의 경고가 그러한 도전이었을 수 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재물을 이웃과 공동체,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유익되게 사용해야 한다는 도전은 너무 많이 들어서 진부하고 식상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이 진부해 보이는 도전은 매우 심각한 도전이다. 솔로몬이 “진부한 경고”를 무시했을 때, 그의 왕국이 쪼개지고 말았듯이 우리도 재물로 이웃을 섬기라는 “평범한 진리”를 무시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던 재물을 필요한 곳으로 직접 개입해서 옮기실지도 모른다.
2. 아합 (열왕기상 21장)
아합은 이스라엘의 가장 악한 왕으로 평가된다(왕상 16:30; 21:25). 이러한 아합에 대한 평가는 그의 이야기의 첫 부분에 기록되었을 뿐아니라(왕상 16:30) 그의 생애에 있었던 한 사건 뒤에 한 번 더 반복된다(왕상 21:25). 그 사건이 바로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한 사건이다.
아합은 자기 왕궁에 가까이 있는 나봇의 포도원을 탐낸다. 아합은 나봇에게 그가 원한다면 포도원 값을 계산해서 주거나 다른 포도원으로 바꾸어 줄 수 있다는 제안을 했다(21:1-2). 이 제안은 아합이 무작정 더 많은 재물을 탐한 것은 아니라는 인상을 준다. 만일 나봇이 아합의 제안에 응했다면 아합과 나봇의 총 재산 가치는 변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합이 제안한 거래는 아합에게 더 큰 무형의 만족을 주었을 것이다. 물질적 가치만으로는 동등한 거래로 보이지만,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고 그 포도원을 자신의 원대로 “개발”하여 “채소 밭”(개역개정) 혹은 “정원” (새번역)으로 만들었을 때 그가 지불한 경제적 비용보다 더 큰 만족을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봇은 아합의 제안을 거절한다. 그 이유는 아합의 제안을 따르는 것이 여호와의 법을 어기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나봇이 염두에 두고 있는 법은 하나님이 각 가정들에게 정당한 소유로 준 땅의 경계를 바꾸지 말라는 신명기 19장 14절이었을 것이다. 이 신명기 구절의 정신은 모든 땅이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땅을 아주 팔지 말라는 레위기 25:23의 정신과 맥을 같이 한다. 나봇이 땅의 궁극적 소유주에 관한 율법과 그 정신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율법에 근거해 아합의 제안을 거절했을 때 아합이 낙심한다. 그가 왕의 권위를 사용해 강제로 거래를 성사시키지 않은 것으로 보아 아합도 이 법의 중요성을 인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지식적 인식이 자신의 바람을 이루려는 아합의 감정적 욕구를 잠재우지는 못했다. 개역개정에서 “근심하고 답답했다”라고 번역된 당시 아합의 감정 상태를 새번역은 “마음이 상하여 화를 냈다”라고 번역한다(새번역 20:43도 참고). 화는 나지만 아합은 어쩔 수 없었다.
이 때 그의 아내 이세벨이 개입한다. 그녀는 시돈 왕 엣바알의 딸로 아합과 그녀의 결혼은 이스라엘에 바알과 아세라 숭배를 도입하는 계기가 되었다(왕상 16:31-33). 이세벨은 나봇에 불리한 증언을 하는 거짓 증인을 세우라는 편지를 나봇의 성읍의 장로와 귀족들에게 아합의 이름으로 보낸다. 편지를 받은 장로와 귀족들을 성읍의 정의를 세워야 하는 그들의 의무를 저버리고 권력의 요구에 굴한다(신 19:11-13 참고). “이세벨의 지시”대로 그들은 나봇에 대해 거짓 증거하는 불량자 두 사람을 세워 나봇을 돌에 맞아 처형당하게 한다. 이렇게 나봇이 죽은 후 아합은 그의 포도원을 차지한다. 여기서 나레이터는 이미 나봇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아합이 차지하려고 했던 포도원을 마지막까지 “나봇의 포도원”이라고 부름으로써 아합의 잘못을 꾸짖고 있다(21:16).
이러한 행동들은 그동안 미루어져 왔던 오므리 왕조와 아합 집안에 대한 명시적인 심판을 초래한다. 심판의 메시지를 엘리야를 통해 아합에게 선포하실 때 여호와께서도 “나봇의 포도원”이라는 표현을 사용해 아합의 잘못을 드러내신다(21:18). 심판의 메시지는 아합 개인에 대한 심판(21:19), 아합 집안에 대한 심판 (21-22, 24절), 이세벨에 대한 심판(23절)으로 이루어져있다. 심판의 선언 마지막에 아합이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악한 자였다는 평가가 내려진다(25-26절).
<설교를 위한 적용>
첫 째, 재물에 대한 욕심이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는 것을 막는다. 아합은 자신의 바람이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내면의 욕망을 잠재우지 못했다. 한 번 불 붙은 그의 재물에 대한 탐심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도 꺼뜨릴 수가 없었다. 오히려 하나님의 법 때문에 자신의 탐심이 채워지지 못하는 것 때문에 마음이 상해 화를 내기까지도 했다. 우리는 재물을 추구하는 것을 중립적인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재물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면 재물 자체는 중립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재물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힘이 세다. 그 센 힘은 하나님이냐 재물이냐를 선택하는 기로 앞에 우리를 세우기도 한다. 재물이 가지고 있는 물신적 힘을 과소 평가하는 것은 하나님을 버리고 재물을 택하는 잘못된 결과로 이르는 시작이 될 수 있다. 재물의 힘과 재물이 주는 힘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어리석다. 재물에 대한 욕망은 하나님의 법을 거추장스럽고 싫어하게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위험한 것이다.
두 번째로,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취하게 된 과정은 절차적으로는 합법적이라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우리가 어떤 재물을 소유하게 되는 과정이 하나님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서도 세상의 법 아래에서는 얼마든지 합법적일 수 있다. 성읍의 정의를 세우고 지켜야 하는 장로와 귀족들이 권력의 힘 아래 그 의무를 저버렸을 때, 그 후에 벌어진 일들은 율법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었다. 권력의 요구에 따라 불량자들이 거짓 증언을 했을 때, 그 증언 자체를 제외한 다른 모든 과정은 철자적으로 “합법적”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이세벨이 이 일을 꾸밀 때 두 명의 증인을 요구했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신명기 19장 15절은 사람의 죄를 판정할 때 한 명의 증인으로는 부족하며 두 명 이상의 증인이 필요하다는 법을 기록하고 있다. 이세벨이 나봇을 죽인 절차는 불량자들의 증언이 거짓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철저하게 합법적인 과정으로 보였을 것이다. 이렇게 절차적 합법성을 지키며 아합은 자신의 재물에 대한 욕심을 채울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재물의 형성 과정이 “합법적”이었다는 것 만으로는 하나님의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다. 법은 도덕의 최소한의 요구이며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요구하시는 기준은 준법이나 합법을 넘어서는 것이다. 내가 법을 어기며 재물을 취득하거나 재산을 형성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만 스스로 만족하기 않고 과연 나를 통해 이웃의 필요를 채우시려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행해 왔는지, 이웃 사랑을 저버리지 않고 재물을 취해 왔는지 정직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다.
세 번째로, 재물에 대한 탐욕은 죄악의 연쇄 반응을 일으킨다. 아합의 이야기는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는 열 번째 계명을 어기면서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 잘못은 한 잘못에서 멈추지 않고 이어서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기는 것으로, 그 다음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기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나봇의 포도원을 아합이 취한 것을 궁극적으로 도둑질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긴 셈이었다. 이처럼 아합의 탐욕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십계명의 대 부분을 어기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파멸을 초래했다. 재물에 대한 탐욕을 채우는 과정에 우리도 이러한 죄악의 연쇄 반응에 빠질 수 있다. 그야말로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라는 것을, “돈을 좇다가 믿음에서 떠나 헤매기도 하고 많은 고통을 겪기도”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딤전 6:10, 새번역).
3. 나아만과 수넴 여인, 나아만의 종들과 게하시 (열왕기하 5장, 4장 8-37절; 8장 1-6절)
3.1. 나아만과 수넴 여인의 경제적 상황과 실존적 필요
나아만은 크고 존귀한 자였다. 또한 “큰 용사”로 소개된다(왕하 5:1). 여기서 “큰 용사”로 번역된 히브리어 표현은 “깁보르 하일”이다. 이 표현은 맥락에 따라 군사적인 함의를 가질 수 있으나(삿 6:12) 어떤 경우에는 경제적인 능력을 설명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룻기 2장 1절에서 보아스가 “깁보르 하일”로 소개되어지는데 새번역은 “재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번역하기도 했다. 나아만의 경우는 일차적으로 군사적인 함의가 있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두 가지 점에서 이 표현을 경제적인 표현으로 이해해 볼 수 있다. 첫 째, 1절 상반부에서 그의 군사적인 특징이 여러번 이미 충분히 소개되었다(“군대 장관”, “크고 존귀한 자”, “여호와께서 그에게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다”). 물론 이 특징들을 다시 한 번 “깁보르 하일”로 요약했다고도 볼 수 있지만, 그에 대한 “나병 환자”라는 새로운 소개와 더불어 그의 경제적 능력에 대한 새로운 정보로 이해할 수도 있다. 특히 1절 하반부가 “그 사람은 ~였다”(“브하잇쉬 하야”)라는 접속사와 함께 나오는 새로운 명시적 주어와 동사로 시작하는 점에서 그러하다. 요컨대, 그는 군사적(혹은 정치적)으로 힘이 있었고, 경제적으로도 부유했다. 그러나 그는 결정적으로 나병환자였다는 것이다. 두 번째, 만일 “깁보르 하일”을 이렇게 경제적으로 이해한다면 나아만의 정치적 힘, 경제적 능력, 그리고 나병이라는 실존적 상황은 그가 나병의 치료를 받기위해 이스라엘로 향했을 때 각각 왕이 써준 편지과 그가 지참했던 “은 십 달란트와 금 육천 개와 의복 열 벌”로 상징된다. 그가 지참했던 재물들이 아람 왕이 내어준 것들일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5절에 연속적으로 묘사된 나아만의 행동은(“그가 떠났다. 그가 취했다”) 그 재물들이 나아만 자신의 것이라는 인상을 준다. 나아만은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힘이 있는 자였다. 그러나 그 힘으로 인해 그의 인생에 아무런 걱정이 없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나병환자였다.
수넴 여인은 “귀한 여인”(개역개정)이라고 소개된다(왕하 4:8). 문자적으로는 “큰 여인”(“잇샤 그돌라”)이며 새번역은 “부유한 여인”이라고 번역한다. 이 여인의 부유함은 그가 엘리사를 위해 방을 마련하고 필요한 가구들을 채워 넣을 수 있었다는 사실에서 엿볼 수 있다. 또한 그러한 도움에 감사해 엘리사가 왕이나 사령관에게 그녀가 필요한 것을 구하겠다고 말했을 때 특별한 도움을 구하지 않았다. “나는 내 백성 중에 거주한다”는 표현은 문자적 번역으로 그 함의를 바로 파악하기가 조금 어렵다. 그러나 근접 맥락에서 볼 때 이 대답을 여인의 생활의 만족스러움을 보여주며 특별한 필요가 없음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에서 “저는 저의 백성과 한데 어울려 잘 지내고 있습니다”(새번역)는 번역을 적절해 보인다. 그리고 열왕기하 8장에 보면 수넴 땅에 기근이 들었을 때 이 여인이 자신의 집을 떠나 블레셋 땅에 칠년 간 거주한다. 7년이 지나고 돌아왔을 때, 그녀는 되 찾아야 할 집과 전토가 있었다. 이런 관찰들로 미루어 보아 그녀의 경제적 환경은 부족함이 없이 부유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런데 이 두 부자의 공통점이 있었다. 그것은 그들 모두 재물을 가지고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다.
<설교를 위한 적용>
재물이 인간의 삶에 모든 만족을 가져오지 못한다. 나아만과 수넴 여인은 재물이 풍족했다. 그러나 이들의 재물의 풍성함이 그들의 실존적 필요의 전부가 아니었다. 나아만은 나병환자였으며 수넴 여인은 남편이 늙기까지 아들이 없었다. 결국 물질은 그들 인생의 깊은 아픔을 치유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나아만의 경우 그가 가지고 있었던 정치적 경제적 힘과 그 힘 때문에 누렸던 삶의 습관이 그가 치유 받을 수 있던 기회를 놓치게 만들 뻔까지 했다. 우리는 돈을 벌면, 부자가 되면 모든 문제가 해결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에 자주 빠진다. 그러나 나아만과 수넴 여인이 보여주는 것은 재물이 결코 해결 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문제는 두 사람 모두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는 것을 통해 해결되었다.
3.2. 재물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재물이 전부는 아니다.
수넴 여인이 엘리사를 잘 섬긴 것은 칭찬받을 만한 일이었다. 이 사실은 대접을 받은 엘리사가 여인에게 무언가 보답하고자 했던 일을 통해 알 수 있다. 또한 칠 년의 기근 후에 여인과 그의 가족이 블레셋 땅에서 돌아와 집과 밭을 돌려 받기 위해 왕에게 나아갔을 때 벌어진 일을 통해 알 수 있다(왕하 8:1-6). 이 여인이 왕에게 나아갔을 때 왕은 게하시와 엘리사가 한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것은 아무도 계획하지 않았던 “우연”이다. 그리고 이 “우연”적 상황을 히브리어 구문은 세 가지 장치를 통해 두드러지게 묘사한다. 첫 째, 와우연계미완료형을 통해 진행해 오던 내러티브의 흐름(“칠년이 지났다”, “여인이 돌아왔다”, “그녀가 나왔다”)을 4절의 분사구문이 끊고 있다. 이는 부대상황을 묘사하는 전형적인 방법으로 3절 마지막의 사건이 벌어졌을 바로 그 순간 4절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음을 명확하게 알려준다. 여인이 왕에게 나왔을 바로 그 때 왕은 게하시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두 번째, 여인은 단순히 왕과 게하시가 이야기 하고 있었을 때 나아온 것 만이 아니었다. 그 여인이 왕에게 나아왔던 그 순간에 게하시는 다른 내용이 아니라 바로 그 여인의 아이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5절). 세 번째로, 5절에 사용된 “히네”는 독자의 시선을 수넴 여인에게 모은다. 개역개정에는 이 “히네”가 번역되어 있지 않다. 만일 넣어서 번역한다면 “게하시가 ... 왕에게 이야기 할 때에, 보라! 그 다시 살린 아이의 어머니가 ... 호소하는 지라”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예기지 못하게 벌어진 우호적인 상황에서 여인은 자신을 소개하고 집과 밭에 대한 호소를 하는 것이 훨씬 쉬웠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녀는 자신이 원했던 것 이상의 도움을 얻게 된다. 나레이터가 이 상황이 하나님의 섭리라고 명시적으로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이 “우연”의 사건이 자신의 재물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람을 도왔던 수넴 여인의 섬김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적” 보답으로 이해하는 것을 막을 만한 본분의 증거 또한 없다. 수넴 여인은 자신의 재물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람을 돌보는 일을 했으며 그로 인해 그녀는 나중에 하나님의 돌보심을 입는다.
나아만은 많은 재물을 예물로 가지고 와 엘리사 집 앞에 이른다. 그런데 엘리사는 전혀 나오지 않고 사환을 시켜 요단 강에서 몸을 씻으라고 말을 전한다. 이 때 나아만은 화를 내며 돌아가려고 한다(왕하 5:12). 정치적 경제적 힘을 누리며 살아왔던 나아만의 삶의 습관이 은혜을 경험할 수 있는 순간 바로 앞에서 그를 방해했다. 그의 재물이 그의 구원의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 순간 나아만의 이름 없는 종들이 끊어지려는 여호와의 은혜의 역사를 계속 이어내고 있다(13절). 나아만의 종들이 나아만을 다시 권하고 그 권고에 따라 나아만이 요단강에서 몸을 씻었을때 그의 살이 (그리고 그의 마음이) 회복되었다(14절). 이 회복의 역사에 나아만의 재물은 방해가 될 뻔 했을 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심지어 나아만의 재물은 엘리사에게 감사를 표하는데에도 아무런 소용이 되지 않았다(5:15-16). 나아만에게 벌어진 하나님의 일은 재물이나 부자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이름 없는 그의 종들을 통해 벌어졌다. 사실 나아만에게 임한 여호와의 은혜의 역사는 이스라엘 땅에서 아람 사람들에게 잡혀가 나아만의 아내의 몸종이 된 이름 없는 어린 소녀에게서 시작되었던 것이다(5:2)
<설교를 위한 적용>
재물로 하나님을 일을 할 수 있지만 재물만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통로는 아니다. 수넴 여인은 재물을 통해 하나님의 사람을 도왔고 하나님은 그 섬김을 인정해 주셨다. 그녀의 재물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도구가 된 것이다. 그러나 나아만의 경우는 그의 부유함이 하나님의 일을 그르칠 뻔한 걸림돌이 되었다. 오히려 재물과는 거리가 먼 아람으로 잡혀간 이름 없는 어린 소녀 몸종과 푸대접에 익숙했던 나아만의 이름 없는 종들이 하나님의 일의 통로가 되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고 싶어 재물을 구한다. 필요한 경우 하나님께서 재물을 허락하시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겠지만 재물이 없다고 하나님 역사의 통로가 될 수 없는 것을 결코 아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역사를 위해 재물을 쓰실 수도 있고 이름 없는 작은 성도의 말 한마디를 사용하실 수도 있다.
결론
재물은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힘이 있다. 이 힘을 쉽게 간과해서는 안된다. 이 힘에 넘어 갈 때, 우리는 재물을 사랑하는 데에서 부터 시작해 온갖 종류의 악을 행하게 된다.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아 간 이야기는 이것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재물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기도 하신다.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실 때에는 그것을 통해 이웃의 유익을 추구하라는 목적이 있다. 솔로몬은 초기에 이 목적에 맞게 그의 지혜와 부를 사용했으며 수넴 여인도 하나님의 사람을 돕는데 재물을 잘 사용했다. 그러나 이러한 목적을 잊을 때, 솔로몬이 그러했듯이 재물의 물신적인 힘에 지게 되고 결국은 개인적으로 또한 공동체 적으로 파멸에 이르게 될 것이다. 재물에 관해서도 “선 줄로 생각한 자는 넘어질까 주의하라”라는 바울의 권면과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당으면 하나님의 사랑은” 그 안에 없다는 요한의 외침은 여전히 유효하다.
진정한 힘과 능력은 재물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부터 나온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름 없는 작은 자들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자신의 일을 이루실 수 있다. 커져야만 하나님의 일을 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재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참 신이시다.
(주) 이 글을 작성하는데 Iain W. Provan, 1 and 2 Kings (NIBC; Peabody: Hendrickson, 1995)이 많은 정보와 통찰을 주었음을 밝힙니다.
전성민. 서울대 수학과를 졸업하고 캐나다 리젠트 칼리지에서 성서언어(M.C.S.)와 구약학(Th.M.)을, 영국 옥스포드대학교에 구약학을 공부했다(D.Phil.). 현재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연구위원이며 용인의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구약학 교수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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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베이트레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