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님들 보세요-황성준 논설위원 나는 왜 좌파사상을 버렸나?

작성자
애국자
작성일
2019-03-23 12:55
조회
320
나는 왜 좌파사상을 버렸나?

황성준 문화일보 논설위원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졸 (83학번)
서울대학교 대학원 정치학과 석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정치학과 박사과정 수료
1980년대 골수 좌익 운동권 출신
1986년 시위도중 부상으로 왼쪽 눈 시력 상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대 경제학부 대학원 소련경제사 연구
동 대학교 동방학부에서 한국어와 한국정치 강의

저서 <유령과의 역사 투쟁>, <보수주의 여행>


#장면 1, 1983년 5월 봉천 사거리의 어느 중국집

“너희는 완전 포위됐다. 손을 머리에 올리고 한 사람씩 내려와라”

학우들과 함께 중국집에서 짬뽕 국물을 안주 삼아 소주를 마시며 ‘운동가요’를 부르고 있는데, 갑자기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창문을 열고 내다 봤더니, 전경차가 와 있고 주변에 전경이 쫙 깔려 있었다. 취해서 환상을 보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현실이었다. 함께 술을 마시던 학생 전원이 관악경찰서로 연행됐다. 이름, 학번, 학과명을 적은 종이를 들고 사진을 찍었다. 다시는 불법(?) 집단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반성문도 썼다. 다음날 새벽 나는 1학년인 덕분에 훈방됐다. 3학년인 경우엔 강제 징집된 사람도 있었다.

이 날 술을 마시게 된 것은 학내 시위 때문이었다. 점심 때 중앙도서관 쪽에서 데모가 터졌다. 학교 공부만 착실하게 하겠다고 결심했던 필자는 이를 피해 아예 정반대 쪽에 위치한 당시 사범대 쪽의 일명 깡통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었다. 그 뒤 데모가 소강상태인 것을 보고 수업에 들어가려고 사회대 건물로 들어갔다. 갑자기 “짭새다! 짭새!”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회대 건물 곳곳에서 난투극이 벌어졌다. 데모대가 건물로 피해 들어오니까 경찰이 따라 들어온 것이었다. 얼떨결에 화장실로 도망친 뒤 문을 걸어 잠갔다. 이미 많은 학생들이 그곳에 피신해 있었다. 밖에서 “문 열어! 개새끼들아!”라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창문을 열고 밖으로 뛰어 내렸다. 다행히 높지 않았다. 사범대 쪽으로 마구 달렸다. 이때 함께 도망쳐온 몇몇 동기생들과 함께 술을 마시기 위해 봉천 사거리에 위치한 중국집에 갔다. 시간이 흐르면서 많은 학생들이 속속 몰려 들어왔다. 함께 술을 마시고 운동권 노래를 불렸다. 그러다가 체포된 것이었다.

이날 새벽에 관악경찰서를 나오면서 한 가지 맹세를 했다. “절대로 이놈의 정권과는 같이 숨을 쉬지 않겠다.”라고. 다음날 운동권 서클 가입을 권유했던 한 선배를 찾아가, 운동권 지하서클에 가입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한이 있더라도 이 세상을 부숴 버리겠다.”는 것이 당시의 심정이었다. 지하서클에서의 학습은 정말 재미있었다. 서울대학교에 입학하면서 대한민국 최고 석학이라는 서울대 교수님들에 대한 기대가 대단했었다. 그러나 수업 몇 번 참석하고 나서 기대를 접었다. 사회과학을 전공으로 선택한 것은 사회가 무엇이며 어떻게 구성되느냐에 대한 지적 호기심 때문이었다. 그러나 대학교 1학년 1학기 수업 내용은 그런 갈증을 채워주는 것과 너무나 거리가 멀었다. 그나마도 휴강과 결강으로 수업이 제대로 이뤄지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결국 대학 신입생의 왕성한 호기심과 지식욕을 채워 준 것은 운동권의 ‘지하 대학’이었다.

당시 기성세대는 운동권 학생들이 공부를 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하라는 학교 공부는 하지 않고 하지 말라는 공부를 해서 그렇지, 정말 지독하게 공부했다. 정치학·경제학·사회학 등 사회과학은 물론, 철학과 역사 그리고 문화·예술까지 학습했다. 문제는 모두 마르크스주의 세계관에 입각한 것이었다. 2학년이 됐을 때는 이른바 ‘총체성’을 이해했다고 확신하게 됐으며, 따라서 세상을 마르크스주의로 개조할 수 있다고 자만하기 시작했다. 즉, 이 세상을 다 이해했으니, 이제는 실천할 때가 됐다는 지적 오만으로 가득 차기 시작한 것이다.


#장면 2, 1987년 1월 가리봉 5거리 어느 디스코텍

구로공단 야학 팀으로부터 지원 요청이 들어왔다. 응징해야 할 놈이 있으니, 병력(?)을 보내 달라는 것이었다. 이에 ‘시위 전투’에서 무용을 떨치던 조직원 5명을 데리고 직접 현장으로 출동했다. 이날 지원 나간 것은 야학 팀의 한 여공이 건달에게 속아 ‘몸도 돈도 다 털린’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털리기만 했어도 다행인데 더욱 문제가 된 것은 임신까지 한 것이었다. 이 여공은 지난 2년 동안 밥도 제대로 먹지 않고 모든 돈을 한 건달에게 모두 갖다 바쳤는데, 이 건달이 단물을 다 빼먹은 것을 알고 다른 사냥감을 찾아서 다시 가리봉 5거리 디스코텍에 출몰하고 있다는 정보가 입수된 것이었다. “바로 저 놈입니다” 두꺼운 안경을 쓴 야학교사가 손가락을 가리켰다.

이 야학교사는 귀가 조치시킨 뒤, 그날 디스코텍에서 사냥한 여공을 데리고 디스코텍을 빠져 나가는 건달을 미행했다. 그가 자취방으로 들어가는 순간 쫓아 들어가 미리 준비했던 각목으로 마구 두들겨 팼다. 이 건달은 비명을 지르며 “어느 파냐?”고 물었다. 엉겁결에 “PD파(운동권의 한 분파)”라고 대답했다. 이 건달에게 받은 돈을 가지고 임신한 여공과 함께 부천에 위치한 모 산부인과를 방문했던 일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애 아빠인줄 알고 경멸하는 눈초리로 쳐다보던 간호사들. 지레 짐작인지도 모르겠지만... 이런 유사 사건은 당시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다. 시골에서 막 상경한 젊은 아니 ‘어린’ 여공들은 외로움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이에 젊은 남성들의 유혹에 약한 경우가 많았다. 바로 이런 점을 노리고 건달들이 여공을 유혹해서 등쳐먹는 일이 비일비재했던 것이다.

처음 공장 생활을 해 본 것은 84년 1월 구로공단에 위치한 영세 봉제공장에서다. 당시 겨울방학을 이용, 이른바 ‘공활’을 한 것이다. 공활이란 ‘공장생활’을 줄인 말인데 대학생 신분을 감추고 공장에 취업, 노동자적 계급의식을 함양하기 위한 훈련 과정이었다. 주로 여름방학에 진행되는 ‘농활(농촌활동)’과 유사한 활동이나, 농활을 공개적으로, 그리고 대대적으로 이뤄진 반면, 공활은 은밀하게 소수에 의해 진행됐다. 이때 한 달 간의 공활은 필자의 사고방식을 완전히 뒤흔들어 놓았으며, 지하 서클에서 학습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몸으로 체화하는 과정이었다. 비교적 곱게(?) 자란 필자의 공장생활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시다’ 중에서도 가장 무능한 시다였다. 일이 서툰 탓에 온갖 구박을 받아야만 했으며, 심지어 ‘조금 모자란 사람’ 취급을 받기도 했다. 어쨌든 이 과정을 통해 프롤레타리아 혁명만이 이 세상을 구제해 줄 것이란 신념을 갖게 됐었다. 그러나 훗날 생각해 보면, 필자가 생각했던 노동자 혹은 민중은 실재하는 노동자·민중이 아니었다. 이념으로 포장된 관념의 산물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어쨌든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세상을 구제하겠다는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장면 3, 1992년 1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한 식료품 가게 앞

“그래도 사회주의 이상은 올바르다?!”

달걀을 배급받기 위한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당시 러시아에서는 생활필수품을 구매하려면, 일명 ‘탈론’이라 불리는 배급표가 있어야 했다. 신분과 직업에 따라 다소 차이가 났지만, 일반 사무원이나 대학교원의 경우엔 성인 1인당 한 달에 달걀 10개였다. 정말 긴 줄이었다. 구불구불 이어진 줄은 끝이 보이질 않았다. 이날따라 날씨도 유독 춥게 느껴졌다. 거리 수은주는 영하 25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세 시간 쯤 줄서 있었더니 차례가 다가왔다. 그런데 남은 달걀도 얼마 없어 보였다. 앞에 줄 선 사람 수를 세어 보았다. 내 차례까지 올까? 심장박동 소리마저 들렸다. 다행히 달걀 10개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내 뒤에 두 세 사람 정도 더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달걀을 받지 못한 러시아 할머니들의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우리 같으면, 소리라도 질렀을 텐데... 벙어리 털장갑 낀 손으로 눈물을 훔치면서, 각자의 길로 총총히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달걀 못 받은 할머니들에 대한 동정은 정말 잠깐이었다. 솔직한 심정은 ‘나는 달걀을 받았다’는 환의였다. 그러나 아뿔싸! 들떠서 걸음을 옮기던 중 빙판에 미끄러져 달걀을 모두 깨트려 버리고 말았다. 기숙사로 들어와 화장실에서 필터 없는 담배 1개비를 입에 물고 성냥으로 불을 붙이자니 눈물이 나왔다.

당시만 하더라도 현실 국가 중에서 가장 이상적인 체제는 소련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물론 완벽한 천국이라고까지 생각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존 국가 중에선 최소한 가장 우월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 소련을 찾아갔다. 그러나 1991년 12월 소련은 붕괴됐다. 눈으로 목도한 ‘현실 사회주의’는 반공주의자들의 악질(?) 선동이라고 생각했던 것보다 더 심각했다. 그러나 그런 현실을 직접 보고도, 사상이 흔들리지 않았다. 현실 사회주의의 실패가 사회주의 이념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스스로를 변호했다.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된다고 했던가... 압도적인 부정적 팩트의 홍수 속에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마어마한 ‘인지부조화’의 고통을 맛봐야만 했다.


#장면 4, 1995년 12월 모스크바 근교의 한 다차

“모든 이론은 회색이요, 푸르른 것은 생명의 나무”

모스크바 근교에서 차량으로 약 2시간 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어느 러시아 기자의 다차(러시아 주말 농장)에서 줄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함께 온 사람들은 저녁 때 마신 보드카 탓인지 모두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새벽에 혼자 일찍 일어나 페치카에 장작을 갖다 넣었다. 가방에서 박사학위 논문 초고를 꺼냈다. 한 장 씩 음미하면서 다시 읽었다. 입에서 “가브노(‘똥’이란 뜻의 러시아 비속어)”가 입에서 새어 나왔다. 논문의 결론은 스탈린식 사회주의는 틀렸지만, 이는 레닌식 사회주의로부터의 일탈이었으며, 따라서 레닌식 사회주의 전망은 실패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즉 1917년 볼셰비키 혁명에서 1928년 ‘대전환’까지의 레닌주의 길은 옳았는데, 스탈린의 성급한 농업 수탈형 공업화로 인해 소련 현실사회주의가 왜곡됐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는 글이었다.

참을 수 없는 갈증을 느꼈다. 보드카를 한 잔 할까 하다가 왠지 취하면 안 된다는 느낌을 받았다. 밖으로 나가 펌프로 끌어올린 냉수를 한 바가지 들이켰다. 오장육부가 시원해지는 것 같았다. 다시 페치카로 돌아왔다. 그리고 논문을 한 장씩 페치카 안으로 던지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본 영화 ‘새벽의 7인’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최후의 순간에 영국군 특공대원 한 사람이 애지중지하던 트럼프 카드를 한 장 씩 버리는 장면이...

소련 생활 경험은 소련 사회주의가 실패했다는 점을 쉽게 인지시켜줬다. 그러나 ‘이념으로서의 사회주의’, ‘이론으로서의 사회주의’가 파산했다는 논리적 근거를 갖지 못했다. 이에 왜 현실 사회주의가 실패했는지에 대한 단서를 얻고자 1920년대 소련 경제사를 공부했다.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그리고 사회주의를 옹호하고자 했다. 그러던 중 당시 친하게 지내던 한 러시아 대학원생이 종이뭉치를 건네 줬다. 하이에크의 <치명적 자만>이었다.(이것은 우리나라에서 책으로 출판되었다. 인터넷 교보문고 중고온라인이나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구입가능 )

갱지에 타이프 친 것을 복사한 것으로서, 이른바 ‘사미즈다트’라 불린 지하 간행물 형태였다. 만 2일 동안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고 읽었다. 사회주의 경제의 모순을 너무도 명쾌하게 설명해 놓은 것이었다. 현실과 이론의 괴리가 극복되는 순간이었다. 물론 사회주의 이론에 대한 애착은 이미 사라지고 있었다. 당시 러시아의 삶 자체가 사회주의 이론을 거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생계를 위해 시작한 취재활동도 현실과 사회주의 이론의 괴리를 더욱 깨닫게 만들었다. 각종 분쟁지역에서의 취재경험, 탈북 벌목공들의 실태를 접하면서 더 이상 사회주의 이론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미련과 아집은 남아 있었다. 그리고 이론적으로 정리하지 못하고 있었다.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의 하이에크와의 만남은 지적 패러다임의 전환을 가져다 줬다. 논문을 다 태우고 나니, 뭔가 울컥하는 것이 속으로부터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뭔가 허전했다. 잠에서 깬 다차 주인(러시아 기자)이 “체첸 취재 계획이 있는데 함께 가자”고 제안했다. 전쟁터의 화약 냄새라도 맡아야 속이 후련해질 것 같았다. 그 후 며칠 뒤 체첸반군의 해방구 베데노 마을에서 당시 체첸반군 사령관이었던 샤밀 바사예프와 마주 앉았다. 러시아 공적(公敵) 제1호와 인터뷰하는데 성공한 것이었다.

#장면 5, 2001년 11월 아프가니스탄 힌두쿠시 산맥

“나는 더 이상 학생(탈레반)이 아니다”

탈레반하면 괴물쯤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막상 ‘살아있는 탈레반’을 만나 보면 이 처럼 순진무구한 사람들을 만나기 힘들다. 탈레반은 현지어로 ‘학생’이란 뜻이다. 당시 탈레반 주력의 연령은 16∼18세다. 20세가 넘으면 지휘관급이며, 30대면 최고 간부급이다. 이들의 대부분은 파키스탄의 난민촌에서 자라며 이슬람 급진주의 사상으로 무장된 소년들이다. 이들은 수학도 과학도 배운 적이 없다. 오직 이슬람 급진주의로 해석된 쿠란과 하디스(무함마드 언행록) 일부를 공부하고, 기초 군사훈련을 받았을 뿐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확신하고 있다. ‘양심수’였다. 그리고 자신들의 생각에 현실을 끼워 맞춘 ‘혁명’을 실행에 옮기고 있었다. 이처럼 ‘때 묻지 않은’ 학생(?)이기에 정말로 잔인한 짐승이 될 수 있다는 역설을 이해한 것은 전쟁터의 경험 덕분이었다. 아프가니스탄 산중에서 포로로 잡힌 탈레반 소년병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이들처럼 ‘순진한’ 사람이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이들에겐 가족도 전통도 없다. 건설해야 할 ‘구성된 현실’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들을 보면서, 또 전쟁터를 다니면서 ‘인간의 본성’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나는 대학 시절 이래 간직해 온 사회주의 사상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사회주의적 사고의 여진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된 것은 아니었다. 과거의 낡은 사상은 청산했지만, 새로운 사상이 정립되진 못했다. 그 공백으로 밀고 들어온 것은 허무주의였다. 그 허무주의를 극복하는 데는 정말 많은 시간이 걸렸다. 천국으로 인도하겠다는 많은 지적 교만들이 실제 상황에선 지옥으로의 지름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사랑하는 민중, 혹은 노동자란 존재도 실상은 관념 속에서 만들어낸 또 다른 ‘우상’이었던 것이다. ​(끝)



<자유민주주의 추천도서>

<나를 깨우는 33한 책> 송복, 복거일 엮음./ 백년동안
33권의 자유주의 명저에 대한 33인의 서평과 해설을 담은 이 책은 우리가 그간 오해하고 있던 자유주의에 대한 잘못된 관념을 해소하는 길로 안내하고 있다. 이 책은 청년 대학생들이 자칫 왜곡된 좌파의 독서에 노출돼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을 방지해주는 일종의 나침반 혹은 예방주사와 같다.

<대한민국 보수가 지켜야 할 가치> 복거일 저.
<딱 맞게 풀어쓴 <자본주의 정신과 반자본주의 심리>> 박종운 저 / 자유경제원
<망명노인 이승만 박사를 변호함> 김인서·이주영 편 / 비봉
<시간을 달리는 남자> 남정욱·윤서인 편 / 백년동안
<자본주의 오해와 진실> 권혁철·민경국·안재욱 외 2인 공저 / 북앤피플
<자본주의는 도덕적인가> 탐 G. 팔머 저, 김광동 역 / 비봉
<자유주의 자본론> 김승욱 편 / 백년동안
<자유주의 틀 깨기> 윤서인·복거일 편 / 백년동안
<진보에서 진보하라> 이종철 / 베가북스/ 주사파 고려대 총학생회장 출신
<치명적 자만> 하이에크 / 자유경제원
<다시 강철로 살아> 김영환 /시대정신/ 서울법대 주사파의 대부, <강철서신> 주인공
<벼랑 끝에 선 한국의 자유민주주의> 양동안 /인영사
<보수주의 여행> 황성준 / 미래한국
<유령과의 역사투쟁> 황성준 / 미래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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