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유진 피터슨이 “한국교회(목회자)들에게 영향력 있는 작가 베스트 12″에 들어갔다는 소식은 의외였다. 그의 주장들이 한국교회에 필요하고 도전이 되는 것은 분명하다. 「성공주의 목회 신화를 포기하라」라는 책에서 그는 요나의 이야기를 통해 참된 목회자는 성공이 아니라 소명을 추구한다고 주장한다. 그가 마르바 던과 공저한「껍데기 목회자는 가라」는 그 제목만큼이나 (영어 원제는 “불필요한 목회자”이다) 우리를 움찔하게 만드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목회자들을 단순히 좋은 사람으로만 한정하지 않는다면, 권력과 영향력과 특권을 추구하는 데 혈안이 된 문화 지도자들의 복제품 정도로 여길지도 모른다. 목회자도 성공한 사업가나 연예인들에 필적하는 인물이 되어 최고의 위치에 올라야 한다고 말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목회자들은 용기를 내어 교회를 지도상에 표시하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교회를 만들려고 노력하게 된다.” (껍데기 목회자는 가라, 14쪽)

목회에 대한 피터슨의 글들을 읽을 때면 이런 식의 비인격화되고 기능화된 목회에 대한 통렬한 지적을 피할 수 없다. 그는 어느덧 한국교회도 깊숙이 젖어버린 신앙을 소비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린 북미적 삶의 방식에 대해 반대한다. 그런데 한국교회와 목회(자)의 관심은 여전히 성장에 있고, 대형화된 교회를 목회하는 것을 “큰 목회”라고 부르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보인다. 유진 피터슨이 진정 영향력이 있다면 크기를 모든 허물을 덮어주는 성공으로 여기는 한국교회의 상황은 바뀌고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정말 그러한가. 이것이 필자의 의문이었다.

사실 유진 피터슨의 글을 읽을 때면 성경에 뿌리를 둔 그의 묵상과 수려한 문장에 매료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그의 글을 좋아한다. 그리고 어느 정도 영향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바를 현실과 공동체 속에 체화해 볼 마음을 먹으면 그의 문장이 수려할수록 그의 묵상이 성경에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을수록 그의 이야기를 우리 삶과 한국교회의 상황에 적용하는 것이 얼마나 급진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것인지 생생하게 느끼게 된다. 피상적인 것에 일희일비하며 살다가 본질과 충돌하게 될 때 느끼게 되는 당혹감, 그것이 우리가 유진 피터슨을 읽을 때 느끼게 되는 것이다.

유진 피터슨의 저작들은 네 가지 키워드로 종합해 볼 수 있다. 그것은 영성, 현실(혹은 일상), 성경, 이야기이다. 사실 이 키워드들은 현재 한국기독학생회 출판부에서 시리즈로 출판되고 있는 유진 피터슨의 영성 시리즈에 속한 책들의 주제와 어느 정도 상응한다. 이 시리즈는 유진 피터슨의 영성 신학을 집대성한 것으로 그의 신학과 사상을 전체적으로 조망 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영성 신학”이라는 머리말이 달린 이 시리즈의 첫 번째 책은「현실, 하나님의 세계」이다. 그는 이 책에서 자신의 “영성 신학”을 창조, 역사, 공동체라는 주제와 예수님의 탄생, 죽음, 부활이라는 케리그마를 통해 서술한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은 것 중 하나는 그의 “영성”에 대한 설명이다. 그는 ” ‘영성’은 하나님이 자신과 자신의 일에 대해 계시하시는 모든 것은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의 가정과 일터에서 살아낼 수 있는 것들이라는 주장을 담고 있다”고 말한다(26쪽). 이 설명을 잘 살펴보라. 영성을 설명하는데 “평범”과 “일터”라는 단어들을 사용했다. 우리는 영성을 평범한 생활, 일터의 시간과는 다른 고결한 무언가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유진 피터슨에게 영성은 무엇보다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삶”(현실: 하나님의 세계, 24쪽)이며 그 삶은 지극히 일상적인 것이다. 경이로운 창조에서 지저분한 “역사”(좀 더 직관적으로는 “현실”)로 주제를 옮기면서 그는 현실을 외면하는 영성이해를 안타까워한다. 그는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영성은 역사를, 적어도 그 지저분한 측면들을 회피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다(현실:, 240쪽). 그러나 피터슨은 “폭력, 전쟁, 기근, 증오, 다툼, 착취”의 기록들로 가득 찬 역사와 현실 또한 그리스도의 “놀이터”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 그가 말하는 영성은 그의 또 다른 책의 제목이 말해주듯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이다. 이러한 현실, 혹은 일상에 대한 유진 피터슨의 강조는 그의 저술의 근간이 된다. 그에게 있어 영성은 현실을 도피하는 기술이나 잊어버리는 상태가 아니라 현실에서 하나님과 생생하게 동행하는 삶에 관한 것이다.

이러한 일상의 영성에 대한 추구는 “평신도”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교정하고자하는 노력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그는 자신이 목사라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이 “비굴할 정도의 존경심”을 가지고 자신을 대하는 것을 당혹스러워한다(그 길을 걸으라, 28쪽). 그리고 예수의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두 단계의 계급이 있다는 잘못된 통념을 지적한다. 그리고 그는 변명이나 비하의 명칭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담대하고 자랑스러운 명칭으로서 모든 성도들이 “평신도라는 명칭을 달고 일터와 시장을, 그리고 가정과 교회를 활보하기를 바란다”고 말한다(그 길을 걸으라, 29쪽).

유진 피터슨의 영성 신학은 철저하게 성경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그가 가르쳤던 리젠트칼리지에서는 영성 신학을 연구하는 데 크게 두 가지 방법을 사용했다. 하나는 역사적인 방법으로 교회사에 등장한 영성가들과 그들의 신학을 연구하는 것이다(이것이 주로 제임스 휴스턴와 제임스 패커의 접근법이기도 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방법은 성경을 중심으로 영성 신학을 전개하는 것으로, 유진 피터슨이 추구한 방식이다. 그의 저작들이 그의 성경 읽기의 결과물이라는 사실은 그가 성경에 바탕을 두고 영성을 추구해 왔음을 잘 보여준다. 그의 초기 작품「자유」(영문 출판 1988년)는 갈라디아서 읽기에 바탕을 두었다. 그는 당시 목회하던 회중에게 “읽히는” 성경을 제공하고자 현대어로 갈라디아서를 번역해 회중들과 함께 읽고 공부했다. 그리고 이것은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된 「메세지」가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때 그가 겪고 깨달았던 일들은「이 책을 먹으라」에 잘 나와있다 (271-292쪽).

성경에 뿌리를 둔 영성 신학을 추구하는 피터슨은 주해의 유익과 필요성을 강조한다. “지성에서 영성으로”라는 영성에 대한 절름발이 이해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철저하게 지성적이고 딱딱하게만 느껴질 수 있는 주해라는 작업을 강조하는 것이 어색할지 모르겠지만 피터슨에게는 지성과 영성을 분리하는 것이 어리석을 뿐이다.

“그러나 주해가 없다면 영성은 어리석고 우둔해진다. 주해 없는 영성은 방종에 빠지게 된다. 훈련된 주해가 없다면 영성은 내 경험을 가지고 내가 모든 핵심 동사와 명사를 정의해 버리는 혼잣말로 발전하게 된다. 그리고 기도는 결국 한숨과 더듬거리는 말로 힘겹게 진행된다. 기독교 공동체는 여러 세기 동안 지속적으로 주해의 기술을 연마했고 방법론을 개선해 왔다. 성경 주해 중에서도 최고의 것을 접할 수 있게 된 세대가 대체로 그것에 관심이 없다는 것은 엄청난 모순이다. 심지어 ‘교육 받은 성직자들’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조차도 주해에 관심이 없다” (이 책을 먹으라, 106쪽).

그는 다윗에 관한 대중적인 책을 썼을 뿐 아니라 Westminster Bible Companion 시리즈의 사무엘서 주석을 집필하기도 할 만큼 전문적인 주석가이기도 하다. 실제로 그의 묵상은 때론 매우 전문적인 주해의 결과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영성 신학에 관한 책에 “syntagm”(‘한데 묶인 어구’)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현실, 87쪽) 그러나 이러한 전문적인 작업들이야 말로 피터슨의 영성 신학이 성경에 탄탄하게 기초할 수 있도록 하는 비결이며 지성과 영성의 통합은 그의 영성 신학이 통전적이라는 사실을 생각할 때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유진 피터슨의 언어는 창백한 연구실의 언어가 아니다. 그는 이야기꾼(storyteller)이자 시인이다. 리젠트 칼리지 채플에서 그의 특유의 허스키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할 때면 채플을 가득 매운 학생들은 그의 이야기에 빠져들곤 했다. 그는 「다시 일어서는 목회」(「목회오경」의 바뀐 제목)라는 책에서 스토리텔링의 중요성을 설명한다. 보편적인 원칙들이 아니라 개별적인 이야기들이 생생하게 살아 올 때, 그 구체적인 하나님의 현장에 우리는 초대되고, 그 현장과 우리 현장이 실존적으로 닿을 때 우리의 삶에 치고 들어오는 하나님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리고는 우리의 이야기 또한 하나님의 이야기의 일부로 변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그의 언어에 대한 통찰 또한 피상적인 거룩에 빠진 한국 교회에 경종을 울린다. 교회 생활을 오래 할수록 우리는 말을 잊어버린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만 알아듣는 종교적 언어만 남게 된다. 그러나 신앙의 언어는 시장의 언어이며 세상의 언어라는 사실을 피터슨은 강조한다. 성령의 언어와 세속적인 언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일상의 언어에 하나님을 말하는 언어와 같은 위엄을 주고 싶어하는 것이다(비유로 말하라, 14쪽).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우리가 하나님을 대할 때 사용하는 언어와 주변의 사람을 대할 때 사용하는 언어 사이에 세워 놓은 장벽을 무너뜨리고 싶다. 결국 그것은 모두 같은 언어다” (비유로 말하라, 15쪽). 설교하시거나 가르치실 뿐 아니라 격의 없이 대화하시는 예수님의 가벼운 언어, 이러한 “잡담의 영성”을 피터슨은 보여준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을 종교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으로 구획 짓지 않으신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렇게 하는가? 나는 우리가 성경 공부를 할 때 사용하는 말과 무지개 송어를 낚으러 가서 사용하는 말 사이에는 연속성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비유, 16쪽). 이러한 언어에 대한 통찰의 결정체가 바로 「메세지」이다.

글을 시작하면서 말했듯 유진 피터슨의 성경에 뿌리는 둔 일상의 영성은 현재 한국교회의 모습과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세속과 신앙을 분리하고, “평신도”와 “목사”를 차별하고, 위엄 있어 보이는 종교적 언어 가운데 일상의 언어가 질식하는 한국 교회가 유진 피터슨을 좋아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진정 유진 피터슨의 영향을 받았다면, 우리는 그의 주장을 따라 성공주의 목회를 포기할 수 있을까? 그가 동네 작은 교회인 Christ Our King Church 에서 성도들과 일상을 나누며 소명을 따라 사역하면서 자신의 영성을 가꾸어 온 것은 대형화, 세계화를 앞다투어 지향하고 있는 한국 교회의 많은 목회자들에게 분명한 도전이 될 것이다. (구글맵과 같은 프로그램으로 이 자그마한 교회의 위성사진을 볼 수 있다. A4용지를 세 단으로 접어 사용하는 이 교회의 주보는 http://www.christourking.net 에 가면 구할 수 있다.) 유진 피터슨이 인기 있는 작가에 그치지 않고 한국 교회가 “일요일과 일요일 사이”에 있는 일상과 세상을 사랑하게 하는 진정한 영향력 있는 작가가 되기를 바래본다.

* 목회와신학 2010년 9월호에 실린 전성민 연구위원의 글입니다.

 

전성민

벤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 세계관 및 구약학 교수 /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초빙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