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에 대한 규례를 담고 있는 레위기 11장은 먹으면 안 되는 동물에 대해 ‘너희에게 부정하다'(레 11:4,8,31등) 혹은 ‘너희에게 가증하다'(11:10,11)는 판단을 내리고 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피조물이 보시기에 좋았던 것을 고려할 때, 이 판단들이 먹지 못하는 짐승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더럽고 괘씸하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할 것이다. 이 동물들은 ‘너희에게’ 즉, 하나님께서 구별하신 이스라엘에게 부정하고 가증하기에, 이스라엘은 이들을 먹는 것이 금지되었다. 그런데 시편의 한 구절은 레위기에 쓰인 ‘가증’ 라는 단어의 흥미로운 적용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얼굴을 그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그가 울부짖을 때에 들으셨도다.”(시 22:24)

위 구절에서 ‘싫어하다’로 번역된 단어가 바로 위에서 다루었던 ‘가증’과 동일한 어근의 동사이다. 여호와께서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가증하거나 혐오스러운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신다. 왜 이러한 선언이 굳이 존재하는 것일까? 왜냐하면 실제로 이스라엘의 현실 속에서 곤고하고 힘겨운 사람들의 삶이 사람들에게 가증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면 당연히 그는 형통해야 하며 풍성해야 한다. 그런데 이 시편 기자의 삶은 참으로 곤고한 것이었으며, 그로 인해 사람들로부터 조롱 받았다. 시편 기자의 삶이 어떠했는지는 스스로 자신의 상태에 대해 표현하고 있는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시 22:6).

여기에서 ‘벌레’는 히브리말로 ‘톨라아트’인데 개역개정판에서 ‘벌레'(신 28:39; 욥 25:6; 사 66:24; 욘 4:7), ‘버러지'(사 41:14) 혹은 ‘지렁이'(사 14:11)로 번역된다. 사람이 죽으면 음부(스올)로 내려가는데, 이렇게 스올에 떨어진 시체는 이 벌레 혹은 지렁이에 덮이게 된다(사 14:11; 66:24). 레위기 11장41-42절에 따르면 땅을 배로 기어 다니는 것들은 모두 ‘가증하다’. 스올에 지렁이가 있는 것으로 표현된다는 것은 지렁이와 같은 것들이 땅 속 세상, 즉 죽음의 세상과 밀접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땅에 기어 다니는 것들이 부정한 까닭은 이렇듯 죽음의 세력과 가깝다는 점이 그 원인일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러한 지렁이 혹 버러지와 같은 존재다. :

“버러지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니라.”(사 41:14)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이 얼마나 처참하고 초라하던지 가까이 하면 부정 탈 것 같았기에, 가증한 동물인 버러지에 비유했을 것이다. 일상에서의 누추하고 초라한 삶이 종교적이고 신앙적인 가치 판단과 결합되는 것은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시편 기자 역시 자신이 벌레 같은 존재임을 고백한다. 이러한 고백은 그의 삶의 현실이 어떠했을지 능히 짐작하게 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를 가증하다 여기고 조롱했을 것도 짐작할 만하다. 더더욱 사람들이 이 시편 기자를 조롱하고 비웃게 만든 것은 이렇게 처참한 삶인데도 그가 여호와를 의지한다는 점이다. :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시 22:8-9)

벌레 같은 삶을 사는 이 시편 기자는 황소(시 22:12), 사자(시22:13,21), 개들(시 22:16)로 비유되는 그의 대적들에 둘러 싸여 있다. 그의 인생은 하찮고 실패한 인생이며 혐오스러운 인생이라고 어찌 사람들이 생각지 않을 수 있을까. 벌레는 가증하며 혐오스럽다. 벌레 같은 인생도 혐오스럽다. 이러한 배경에서 처음에 보았던 시편 22편 24절을 이해할 수 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초라한 삶을 살면서도 여호와를 의지한다는 이 시편 기자를 조롱하고 가증하다 여길 수 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이토록 곤고한 자들의 그 곤고함을 결코 ‘가증하다’ 여기지 않으시며 그 얼굴을 숨기지 않으시되, 도리어 그 울부짖음을 들으신다. 사실, 이 시편 기자가 받았던 조롱은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께서 들으신 조롱이기도 하다: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였도다.”(마 27:43)

여기에 쓰인 표현들은 시편 기자를 향한 조롱의 내용과 흡사하다. 마태 기자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향한 당시 종교 권력들의 조롱이 시편 기자를 향한 대적들의 조롱과 같은 맥락에 있음을 보여준다. 시편에서도 이들의 조롱에 이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다는 시편 기자의 고백이 나오거니와, 마태복음에서도 예수를 향한 이들의 조롱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예수님의 선언을 향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시편 기자를 예수님과 동일시하는 것은 복음서들에 있는 시편 22편의 여러 구절들의 인용에서도 확연히 볼 수 있다. (마 27:35,43,46; 막 15:24,34; 요 19:24)
의인을 향한 이러한 조롱은 중간기 문헌이며 외경에 포함되어 있는 솔로몬의 지혜(Wisdom of Solomon)에서도 볼 수 있다. 부활을 믿지 않고 이 땅에서 먹고 즐기는 삶을 추구하는 악인들은 의인들을 핍박하고 억압하면서 조롱한다. : “의인이 정녕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하느님께서 그를 도우시어 적대자들의 손에서 그를 구해 주실 것이다. 그러니 그를 모욕과 고통으로 시험해 보자 … 자기 말로 하느님께서 돌보신다고 하니 그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내리자.” (지혜 2:18-20) 여기에서도 의인의 고난과 ‘하나님의 아들’ 선언이 결합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마태 기자의 표현은 시편 22편을 활용한 것이면서, 이 시기 의인의 고난에 대해 솔로몬의 지혜와 동일한 사고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세상에서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이들은 비웃음거리가 되기 쉽고 그들을 가까이 하면 부정 탄다는 생각이 오늘날과 같은 사회에서도 고스란히 믿지 않는 사람들이나 심지어는 믿는 사람들의 의식 속에 내재해 있는 것을 본다. 더욱이 그렇게 초라하게 살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노라 하면 실용과 성공 가치관이 지배하는 오늘의 현실은 더더욱 이들을 향해 코웃음 칠 것이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이 곤고한 자들의 곤고한 삶을 결코 가증하다 여기지 아니하시되, 도리어 그들의 기도를 들으신다. 아울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그렇게 사람들의 조롱과 비웃음을 들으신 분이셨다. 하나님께서 조롱 받는 시편 기자의 기도를 들으실 때에 그는 여호와를 경배하며 찬송한다. 이 시편 기자의 찬양과 감사는 단지 자신의 개인적인 차원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모든 나라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예배하리니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모든 나라의 주재심이로다.” (22:27-28) 즉, 극심한 곤고와 참담한 현실 속에서 도리어 이 시편 기자는 여호와의 들으심을 확신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며 내다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편 22편은 가증하고 혐오스러워 보이는 초라한 인생이 도리어 하나님나라를 미리 경험하는 인생이 될 것임을 전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초라한 인생의 첫 자리에 이 땅 낮은 곳에 오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

 

 

김근주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