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이 끝나간다. 16강 진출이 확정되었을 때, 차두리 선수가 웃통을 벗고 기뻐하는 모습이 사진에 찍혔다. 사진에 찍힌 차 선수의 옆구리에는 두 줄의 “코드” 같아 보인다는 문신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 동안 떠돌던 차두리 선수가 로봇이라는 소문이 사실로 드러났다며 재미있어했다. 그 코드는 차두리 로봇의 제품 생산 번호라는 것이었다. 사실 그건 차두리 선수의 아내와 딸의 생일을 로마숫자로 쓴 것이었다. 그런데 그 문신 사진을 보면서 떠오른 말씀이 있었다. “죽은 자 때문에 너희의 살에 문신을 하지 말며 무늬를 놓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레위기 19:28).

구약 율법을 현대에 적용하는 전통적 방법은 적용하고자하는 율법이 제의법인가, 도덕법인가, 사회법인가를 구별하는데에서 시작된다. 제사법은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성취되어 더 지키지 않게 되었다. “너희는 화목제물을 여호와께 드릴 때에 기쁘게 받으시도록 드리고 그 제물은 드리는 날과 이튿날에 먹고 셋째 날까지 남았거든 불사르라” (레위기 19:5-6)는 말씀은 제의법으로 구속력이 없다는 것이다. 대신 십계명으로 대표되는 구약의 도덕법들이 여전히 우리가 지켜야 하는 율법이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레위기 19:18)라는 말씀이 그 예다. 그리고 사회법은 당시 고대 이스라엘의 문화와 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현대에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방법에 의하면 율법의 종류를 구분하면 문제의 반 이상이 해결된다.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 어려운 율법들은 이스라엘에만 특별히 적용되었던 사회법인 경우가 많고 도덕법들의 경우는 문자 혹은 약간의 응용을 하게 되면 거의 바로 적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신의 문제를 따지자면 문신을 하지 말라는 레위기 말씀은 어떤 종류의 율법인지 판단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구별이 실제로는 쉽지 않다는 것이다. 앞에 언급한 율법들은 모두 레위기 19장에 나오는 것들로 레위기 19장에는 제의법, 사회법, 도덕법으로 보이는 율법들이 섞여 있다. 어떤 율법들은 명확하게 그 종류를 구분하기도 어렵다. “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네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10절). 이 율법은 사회법일까 아니면 도덕법일까. “너희 그 땅에 들어가 각종 과목을 심거든 그 열매는 아직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기되 곧 삼 년 동안 여희는 그것을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겨 먹지 말 것이요”. 이것은 제의법일까 사회법일까?

이렇게 모호한 경우를 만나게 되면 율법의 종류의 대한 판단은 율법 자체에 근거하기 보다는 그것을 해석하는 사람의 자의적인 기준을 따르기 쉽다는 것을 알수 있다. 내 자녀가 문신을 하고 싶다로 말할때, 내가 그게 싫으면 “얘야, 하나님 말씀에 문신하지 말라는 말씀이 있다. 문신하지 말아라”라며 문신을 하지 말라는 율법을 도덕법으로 이해할 것이고, 그래도 하고 싶다는 자녀는 그건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사회법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구약 율법을 세 종류로 구분해서 각 종류마다 적용의 가능성과 방식을 다르게 이해하는 방법의 한계를 보여준다.

다른 방법은 없는가? <현대를 위한 구약윤리>의 저자 크리스토퍼 라이트는 구약 율법들을 세 종류로 구분하지 말고 전체적으로 살펴보자고 제안한다. 그에 따르면 구약의 모든 율법들 전체가 당시 이스라엘의 역사적 문화적 신학적 상황에서 어떠한 이스라엘 사회를 그리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는 것이 먼저해야 할 작업이다. 안식일 규례를 현대에 바로 적용하려고 시도하는 것보다 7일에 한 번씩 종들을 포함해 모든 사람들에 쉬는 것을 통해 이루고자 했던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 그 쉼을 통애 드러내고자 했던 신학적 의미가 무엇인지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는 것이 먼저라는 것이다. 간음하지 말라는 개인적이도 도덕적인 율법의 경우에도 이 율법이 다른 율법들과 더불어 어떤 사회를 만드는지 살피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요컨데 각 율법이 개별적으로 현대에 바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구약 율법은 그것을 전체적으로 살필 때 하나님이 원하셨던 고대 이스라엘 사회의 모습을 이해할 수 있고 그 사회 전체의 모습을 현대 사회 전체에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율법이 함께 어우러져 이루고자하는 이스라엘 사회를 파악할 수 있을 때, 그 이스라엘 사회가 현대 사회의 밑그림 (크리스토퍼 라이트의 용어를 빌자면 “패러다임”)이 되며 이러한 방법을 통할 때 구약 율법을 현대 사회에 보다 적절하게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의 장점은 구약의 모든 율법들이 다 의미가 있게 된다는 점이다. 도덕법만이 현대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그 도덕법을 바르게 적용하기 위해서라도 다른 모든 율법들이 다 동등한 중요성을 가지고 연구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 도덕법이 하나님이 만들고자 하시는 사회 속에서 어떤 기능을 하는지 잘 이해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말씀의 자의적 선택의 위험을 그나마 좀 더 벗어날 수 있게 된다. 두 번째는 구약 율법의 사회적 의미를 잘 드러낼 수 있다. 율법은 개인이 따라야 하는 규정 이상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회가 어떤 것인지를 알려주는 통로가 된다. 개인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들의 살아가는 사회가 어떤 모습이기를 원하시는지를 이러한 방법을 통해 좀 더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회와 고대 근동에서 행해지던 문신의 관계는? 이건 숙제다.

(참고. 차두리의 오른 쪽 팔에도 문신이 하나 더 있다. 그건 히브리어 알파벳 “아인”이고 차두리 선수의 첫 딸 이름이 “아인”이다. )

 

전성민

벤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 세계관 및 구약학 교수 /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초빙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