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음과상황 2008년 4월호에 실린 배덕만 연구위원의 글을 3부에 걸쳐 연재합니다.

신학의 자리

이제 결론적으로, 과학과 종교, 창조와 진화 간의 이처럼 복잡한 관계를 염두에 두면서, 복음주의 신학이 설 자리, 복음주의 신학자들이 감당할 사명에 대해 몇 가지 언급하고자 한다. 먼저, 신학자들은 미국 복음주의 내에 창조와 진화에 대한 다양한 입장들이 공존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현재 복음주의 내에는 창조과학회의 입장, 즉 성경에 대한 문자적 해석을 근거로, 성경의 창조기록을 과학적으로 입증하려는 노력이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복음주의 내의 유일한 목소리는 아니었다. 진화론의 출현이후 지금까지 창조와 진화를 조화시키려는 노력들이 소위 “유신론적 진화론자들”에 의해 줄기차게 지속되었고, 적지 않은 수의 복음주의자들이 이런 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해 왔다. 또 복음주의 창조론자들 내에도 창조과학운동과는 달리, 보다 유연한 성서해석에 근거하여, 지구의 나이를 훨씬 많게 계산하는 그룹이 있으며, 창조주에 대해서도 전통적 개념의 신적 존재로 신앙하는 진영과 “지적 설계자”라는 보다 추상적 개념을 옹호하는 진영 등, 그 범위가 매우 다양하다. 이런 면에서 창조와 진화의 관계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배제한 채, 특정한 입장만을 일방적으로 추종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따라서 이런 다양한 입장들에 대한 신학자들의 폭넓은 연구와 소개가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다.

둘째, 신학자들은 전통적으로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이 과학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과학의 자연주의적 세계관을 비판했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미국은 18세기 이후 계몽주의 영향 하에 자신의 정신문화를 형성해 왔다. 복음주의도 그런 영향 하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해 온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복음주의자들은 과학의 귀납법과 합리적 사고방식을 적극 수용하며, 자신들의 부흥운동과 신학적 변증작업에 활용했었다. 따라서 부흥운동과 과학이 본질적으로 양립 불가능한 사이는 아니다. 다만 진화론으로 대표되는 과학적 세계관이 전통적 성서해석을 부정하고, 무신론적 세계관을 과도하게 신봉하기 때문이다. 그런 세계관이 기독교적 세계관과 상충될 뿐 아니라, 그것의 부정적인 윤리적․사회적 파장을 염려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학자들은 이 같은 과학과 종교, 진화와 창조 간의 복잡한 관계를 정확히 파악함으로써 과학과 종교 간의 적절한 관계를 탐색하고, 과학의 자연주의적 세계관이 지닌 한계와 위험을 면밀히 검토/분석함으로써, 과학의 건강한 발전을 위해 권위 있는 조언자 역할을 충실히 감당해야 할 것이다.

셋째, 신학자들은 창조론이 본질을 상실한 채 정치․경제적으로 악용되는 것에 대해 비판적 감시자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미국 복음주의의 경우, 창조론이 근본주의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대다수의 창조론자들은 근본주의적 반(反) 낙태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에 제기된 복음주의 내부의 자기반성에 의하면, 창조론자들이 태아의 생명에 대해 과민반응을 보이는 반면, 정작 환경문제에 대해서는 지나칠 정도로 소극적․부정적 입장을 고집하는, 이해하기 어려운 내적 모순에 빠져 있다고 한다. 사실, 근본주의자들은 처음부터 자본주의의 절대적 옹호자들이었고, 현재에도 상당수의 근본주의적 기관들 및 연구단체들이 대기업들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고 있다. 그런데 미국의 기업들 대부분이 환경운동이나 환경관련 법규와 심각한 갈등 속에 있으므로, 이들과 정치적․이념적 유대관계를 맺고 있는 창조론자들이 현실적으로 그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으며, 그 결과 환경문제에 침묵하거나 소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태아의 생명에 관심을 갖는 것과 동일한 논리와 이유에서, 자연을 하나님의 창조물로 간주하며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환경문제에 관심을 가져야함에도 불구하고, 경제 및 정치와의 미묘한 그러나 끈끈한 이해관계 때문에, 자신들의 주장과 모순되는 상황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복음주의 신학자들은 창조론이 정치 및 경제와 맺고 있는 교묘한 유착관계를 파헤치면서, 창조론이 자신들의 본래적 사명에 충실할 수 있도록 예언자적 기능을 용감하게 수행해야 한다.

끝으로, 신학자들은 진화론의 다양한 차원들을 인식하고, 그것의 부정적 혹은 긍정적 적용 가능성을 검토해야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필자는 신학자들이 생물학적 진화론만큼, 혹은 그것보다 더 깊이 사회적 진화론에 대해 학문적 관심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1925년도 스코프스 재판에서 창조론 측을 변호했던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이 진화론을 반대했던 이유는 진화론이 지닌 사회적 함의에 대해 깊이 우려했기 때문이다. 물론 보수적 장로교인으로서 그가 생물학적 진화론을 쉽게 용납할 수 없었지만, 민주당의 대표적 지도자였던 그가 진화론에 담긴 사회적․경제적 차원의 부정적 가능성도 결코 간과할 수 없었었던 것이다. 생물학적 진화론에 근거한 우생학은 제국주의적 통치이념으로 악용될 소지가 있고, 적자생존의 법칙이 경제학에 무비판적으로 적용될 때, 무자비한 자본주의의 정글법칙으로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복음주의 신학자들이 진화론의 다양한 차원과 가능성을 날카롭게 포착하여, 긍정적 측면성은 지속적으로 발굴해서 탄력적으로 현실에 적용하되, 부정적 가능성에 대해서는 현명하고 단호하게 대처하는 지혜와 용기가 필요하다. 따라서 현재 복음주의 신학에서 진화와 창조의 문제는 단순한 지적 호기심의 대상이 아니라, 복음주의 신학이 보다 책임 있고 실천적인 학문으로 성숙하기 위해 반드시 씨름해야 할 버거운 그러나 가치 있는 상대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