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상생활사역연구소에서 발행하는 Seize Life 3호 (2009년 8월)에 실린 전성민 연구위원의 “새로운 신학교가 올까”라는 글을 5회에 나누어 연재합니다. 이 글은 기독연구원 느헤미야가 설립되기 얼마 전에 발표된 글입니다. 이 글에는 기독연구원 느헤미야가 설립되게 된 문제의식과 느헤미야가 세워지기까지 직간접적인 여정이 담겨 있습니다. 또한 느헤미야의 앞으로의 방향을 가늠해 볼 수 있는 글입니다.

 

(3부: 비관적 전망)

 

III. 중간 정리

웨신에서 제공되었거나 제공되고 있는 일상생활신학 관련 과정들을 살펴본 것을 토대로 이제 일상생활 관련 과정이 한국의 신학교라는 맥락 속에서 자리 잡기 위해서 어떤 것들이 필요한지 정리할 단계가 되었다. 첫 번째로, 일상생활신학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교수 요원들이 안정적으로 확보되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성세 과정의 변화에서 보았듯이 명시적으로 일상생활신학을 표방하지 않고 기존의 신학 과목들 속에서 일상생활신학을 다루려는 시도는 틀은 유지되어도(성세과정의 경우 성경연구라는 틀) 내용은 일상생활신학을 놓쳐버리는 일이 생기기 쉽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일상생활신학을 전공으로 하는 교원이 확보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실천 신학이 아닌 다른 전공을 가지고 있는 교원들의 경우, 그들에게 일상생활신학 관련 강의를 따로 개설하기를 요구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무리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교 전체가 일상생활신학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한 두 명의 교원의 관심사로는 장기적인 변화를 만들어 내기가 힘들다. 즉, 학교 전체의 신학적 분위기가 중요하다. 물론 앞서 말한 이상적인 상황처럼 일상생활신학 전공 교원이 있다면 학교 전체적으로도 일상생활신학에 대한 이해가 깊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 두 가지가 항상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신학교육은 목회자 양성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일상생활신학을 전공하거나 관심을 가지고 있는 교원의 존재를 넘어 학교 전체가 일상생활신학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교원과 학교, 이 두 가지가 확보된다면 현재의 신학교 틀에서 일상생활신학 관련 강의를 안정적으로 개설하거나 일상생활신학 전공을 만드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이 말은 일상생활신학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아는 교원과 학교의 신학적 분위기를 확보하는 것이 그 만큼 어렵고 근본적인 문제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에 또 한 가지 요소가 있다. 그것은 학생이다. 이것은 앞에서 잠시 언급했듯이, 설령 현재의 한국 신학교들에서 일상생활신학 관련 강의들이 개설된다고 했을 때, 그 강의를 누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수강하겠느냐는 질문과 관계되어 있다. 즉, 지금 신학교의 학생 구성 상황에서는 일상생활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보통 성도들의 일상생활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신학교에 일반성도들이 학생으로 참여하지 않는 상황에서 일상생활신학과 평신도 신학은 성도들의 삶의 자리를 신학적으로 규명하고, 그곳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에 대한 신학적 통찰을 제공하여 성도들을 그들의 사역의 자리에 세우는 신학이 아니라 성도들을 자신 스스로의 사역이 아니라 목회자들의 사역을 돕는 자들로만 세우는 동원방법론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비슷한 말의 반복이지만, 이러한 우려는 소위 “평신도를 깨우는” 목적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과 맥을 같이 한다. 평신도 신학의 근본정신은 “모든 성도가 사역자”라는 것이다. 이 말은 세상에서의 사역의 주체는 평신도이며 교회의 전임 사역자들은 그러한 사역의 주체인 평신도들을 구비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한국 교회 내에서 평신도를 깨우는 목적은 평신도들을 세상 가운데 벌어지는 그들 자신의 사역의 주체로 세우기 위함이 아니라 교회 내외에서 벌어지는 담임목사의 사역을 돕는 자로 동원하기 위한 경우가 많다. 이런 한국교회의 상황에서 일상생활신학 혹은 평신도 신학 관련 강의들을 수강하는 학생들이 교회전임사역을 준비하는 사람들이라면 그 강의의 의의가 축소, 왜곡, 혹은 오용될 수 있다. 물론 교회전임사역을 준비하는 학생들이라도 일상생활신학의 의의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그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평신도들이 자신의 삶 자체가 사역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과연 한국적 상황에서 일상생활신학이 그런 간접적 통로를 통과한 후 얼마나 온전하고 효과적으로 전달될지 필자는 회의적이다. 이런 점에서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은 것이 일상생활신학은 일반성도들에게 직접 강의되어져야 하며, 이런 점에서 한국 신학교의 일반적인 교육목적과 이에 따르는 학생 구성이 크게 변화하지 않는 한 현재의 신학교 구조와 분위기 속에서 일상생활신학이 의미 있게 자리 잡기는 힘들어 보인다. 이것이 나의 전망이다. 그렇지만 이런 비관적 전망을 새로운 상상력 속에서 벗어나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