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상생활사역연구소에서 발행하는 Seize Life 3호 (2009년 8월)에 실린 전성민 연구위원의 “새로운 신학교가 올까”라는 글을 5회에 나누어 연재합니다. 이 글은 기독연구원 느헤미야가 설립되기 얼마 전에 발표된 글입니다. 이 글에는 기독연구원 느헤미야가 설립되게 된 문제의식과 느헤미야가 세워지기까지 직간접적인 여정이 담겨 있습니다. 또한 느헤미야의 앞으로의 방향을 가늠해 볼 수 있는 글입니다.

 

(4부: 보냄받은 신학교의 가능성)

 

IV. 제안: “보냄받은 신학교”(A Missional Seminary)의 가능성을 타진하며

중간정리의 결론은 일상생활신학 혹은 평신도를 위한 신학교육이 의미 있게 뿌리내리려면 현재 한국에 존재하는 신학교에 대한 패러다임을 근본부터 재고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학생 구성원이 바뀌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 신학 교육의 목적 또한 새롭게 정립되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더 고민해 봐야 할 문제가 있다. 그것은 신학교의 운영 구조에 관한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일상생활신학의 근본정신은 “모든 성도가 사역자”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주일에 성도들이 모이는 교회뿐 아니라 성도들이 “흩어져” 나머지 엿새 동안 지내는 그 생활의 자리들이 사역의 자리들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과연 학생들을 “끌어 모아” 일상생활신학을 가르치는 구조가 그러한 근본정신을 얼마나 잘 드러낼 수 있는지 질문해볼 필요가 있다. 정말 “미디어가 메시지”라면 일반 성도들의 “흩어진” 일상생활이 의미가 있다고 가르치기 위해 학생들을 “끌어 모으는 것”은 어색한 일이 될 것이다. 요컨대 “보냄받은 교회” (Missional Church)가 던지는 질문들을 나름대로 변용하여 신학교에도 적용해 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신학교에 건물이 필요한가? 매주 수업을 해야 하는가? 교수가 필요한가? 공식 학위를 제공해주어야 하는가? 등의 질문을 던져 볼 수 있다. [주7]여기서 필자는 상상력을 발휘해 본다면 이 질문들에 대해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는 답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왜 학생들이 학교에 와야만 하는가? 교수가 학생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서 강의를 하면 되지 않을까? 같은 직장이니 직종에 있는 동료들끼리 모여 관심 있는 신학 분야의 “전문가”를 초청해 몇 번의 주말을 이용해 집중 강의를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이럴 경우 현재의 교육법상 정규 학위 수여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그렇게 문제가 될까? 물론 학교의 연구 기능에 대한 고려는 반드시 필요하다. 지속적인 탁월한 연구가 없다면 내실 있는 강의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연구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자료(도서관), 공간, 그리고 학교의 행정 구조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그 규모는 이러한 상상력을 발휘하기 전에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보다는 (많이) 작을 수 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이미 이러한 형태의 신학교육이 진행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마지막으로 살펴볼 기독청년아카데미(이하 기청아)이다. 기청아는 이번 가을에 21회 과정을 개설한다. 개설되는 과목들은 다음과 같다.

사회선교학교 / 공동체지도력 훈련원 4기, 심화과정 / 목회사랑방 4기 / 자본주의와 한국 기독교 / 글쓰기 교실 / 공의정치학교 / 살림있는 교육 / 토지학교 / 예비기독교사 아카데미 / 기독교세계관과 현대사상 / 갈라디아서 강해 / 말씀과함께 2009 / 해방 후 한국 기독교의 역사 / 소저너스 원문강독 / ‘팔복’으로 성극만들기 / 공정무역과 착한소비운동 / 함께하는 임신출산육아 / 소명과 직장선교사

이번 개설되는 강의들의 특징은 여기 옮겨오지는 않았지만, 웨신의 기독교경제학과 사회윤리 과정에 출강하는 교수들과 예전 성세 과정을 기획했던 교수를 포함해 강사들의 전문성이 예전 보다 높아졌다는 인상이다.[주8] 이는 기청아 과정이 회를 거듭할수록 처음 기청아를 접하는 사람들과 이미 많은 강의를 들었던 사람들 모두에게 적합한 강의를 제공하기 위해서 생기는 필연적인 (그리고 바람적인) 변화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변화가 어떤 계기를 만나 연구 기능까지 수행하는 교육기관으로 발전하게 된다면 보통 예상했던 방향 – 즉, 기존의 신학교에 일상생활신학이 자리를 잡게되는 방향 – 과는 반대로 일상생활신학이 자리잡은 신학교육기관이 탄생하게 될지도 모른다. 무엇보다도, 이 강의 목록을 보면, 여지껏 살펴보았던 여느 신학교의 교과과정들이나 이 글에서 언급하지는 못했지만 여러 계기들을 통해 필자가 접한 다른 어느 신학교의 교과과정들 보다 일상생활신학적인 내용들이 두드러지게 많다. 기청아의 소개 문안을 읽어 보면 이러한 특징이 기청아의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자연스러운 결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대학사회라는 지극히 특정한 정황에 적합하게 양육된 제자도는 졸업과 동시에 전혀 다른 생활현장에서 그 역동성을 급속히 상실하기 십상입니다.
‘온전한 복음, 총체적 선교’를 다양한 생활 현장에서 실질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지도력을 양성하기 위해서는 성서, 철학, 역사, 경제, 문화 등을 통전적으로 공부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회선교현장과 생활현장에서 하나님나라를 창출해 가고 있는 청년지도력들과의 지속적인 교제와 연대를 통해 보다 효과적인 사회 진출을 준비해야 합니다.
해외선교 전략은 많으나, 정작 대부분의 청년학생들이 살아가게 될 사회생활 현장에 대한 선교 전략은 지극히 부족한 실정입니다. 기독청년아카데미는 이를 위한 논의와 교육, 협력의 장이 되길 소망합니다.“ [주9]

이 소개 문구에는 사회선교와 생활현장이라는 표현이 두드러진다(생활현장이라는 표현은 무려 네 번이나 나온다). 비록 사회생활현장을 “선교”라는 틀 속에서 이야기하고 있어 일상생활자체의 의미를 다루는데 약간의 한계 혹은 차이가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현재 신학교를 포함해 한국 기독교 사회 속에서 이만큼의 다양함과 지속성을 가지고 일상생활과 관련된 “신학 교육”이 제공되고 있는 곳이 없다는 것이다. 상상은 이미 현실로 만들어지고 있었다.

 

*주 –

[주7] 마이클 프로스트-앨런 허쉬, <새로운 교회가 온다>, 151 비교.

[주8] 강사들의 전문성을 측정하는 방식이나 그것에 기초한 정확한 통계를 제시하지 못하고 인상으로만 처리한 것에 양해를 구한다. 그러나 기청아의 개설과목과 강사들을 꾸준히 살펴본 사람들이라면 필자가 설명한 변화에 대부분 수긍하리라고 생각한다.

[주9] http://lordyear.cyworld.com에 있는 소개글을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