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교회와 공공성 포럼 칼럼 #46 (2026.08.18)
이분법을 넘어 모두를 위한 공공적 감수성을 향하여
최은영 목사(실천여성회 판)
대한민국이 일제 강점기에서 해방된 지 81주년이 지났다. E. H. 카의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는 정의를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의 과거사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과제로 남아 있다. 일제에 의해 강제로 끌려간 피해자들에 대한 진정한 사죄나 친일 잔재의 청산, 그리고 당시 나라를 되찾기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들의 명예회복은 아직 완전하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민족문제연구소에서는 2009년 반민족 행위자 4,389명의 이름과 행위 내용을 기록한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했고, 최근 정부에서는 친일재산을 환수하여 독립유공자 및 그 후손들의 복지를 위해 사용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역사를 되짚고 청산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경계해야 할 또 다른 지점이 있다. 그것은 과거와 현재의 인물을 오직 ‘선과 악’,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성급한 이분법의 논리로만 단정 짓는 태도이다. 최근 특정 인물의 조상이나 배경을 이유로 가해지는 가혹한 낙인찍기와 진영 논리 역시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와 무관하지 않다.
이분법적 선악 구도에 몰입할 때, 거대한 역사적 서사 사이에 존재했던 수많은 개인의 복잡한 행적과 희생은 손쉽게 마모된다. 예컨대 우리는 나라의 독립을 위해 투쟁한 한 명의 영웅적 가장은 기억하지만, 그 그늘에서 묵묵히 삶을 견뎌내며 가정을 지킨 아내와 자녀들의 희생은 역사 표면으로 드러내지 못하곤 한다. 몇 세대가 지나면서 친일파와 독립운동가 모두의 후손이 된 경우나, 제국주의 만행에 항거하며 개인적 사죄와 연대를 이어온 일본인들의 존재 역시 단편적인 획일화 속에서 사라진다.
이러한 권력과 역사 기록의 상호작용은 성경 본문을 읽는 과정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역사의 기록과 기억은 당대의 권력 구도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예수의 가르침과는 달리, 인류사의 정치, 사회, 심지어 종교(교회) 제도조차 강자·남성·승자 중심의 기득권 도식에서 자유롭다고 할 수 없다. 이러한 시각에서 이스라엘 왕조가 형성되기 전 사사기에 나오는 삼손과 들릴라 이야기(삿 13-16장)를 다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잘 알려진 대로 삼손은 하나님의 사자에 의해 수태고지를 받고 나실인으로 구분되어 이스라엘을 구원할 사사로 자란 인물이다. 하지만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삼손은 자신의 소명을 망각한 채 블레셋 치하의 백성들을 돌보기는커녕 사적인 욕망과 힘을 남용한다. 삼손의 행패로 피해를 본 블레셋 방백(지도자)들은 ‘삼손이 사랑한’ 들릴라에게 접근해 ‘각각 은 1,100개’라는 막대한 물질과 권력으로 그녀를 압박한다(삿 16:4-5). 생존이 달린 절박한 처지의 들릴라와 달리, 삼손은 세 번이나 거짓말을 하며 자신의 소명을 가볍게 여겼고, 끝내 머리카락이 잘려 눈이 뽑힌 후 블레셋에 맞서 함께 자멸하게 된다.
한편 들릴라는 딤나의 여성(삿 14장)과 달리 부모나 형제에 대한 언급 없이 등장한다. 이는 사회적·법적 안전망조차 없었던 이방 여성이었음을 의미한다. 즉 이 사건은 단순한 개인의 배신극이 아니라 집단 간의 권력 문제였다. 삼손은 사사로서의 공적 역할을 망각했고, 블레셋 방백들은 들릴라라는 사회적 약자를 위협해 정치적 도구로 이용했다. 그럼에도 후대의 역사는 구조적 맥락을 지운 채 그녀에게 ‘탐욕으로 영웅을 배신한 악녀’라는 주홍글씨만 덧씌워 왔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수많은 갈등도 이와 닮아있다. 개인에게 손쉽게 비난의 화살을 돌리기 전에, 그 인물이 처했던 사회적·구조적 불의를 먼저 들여다보는 공공적 감수성이 시급하다. 이 땅에는 성, 인종, 계급 등에 따른 차별과 낙인, 구조적 폭력이 지속되고 있다. 진정한 성평등, 사회적 정의와 바른 역사 정립으로 나아가는 길은 지난하고 복잡하다. 그럼에도 모두를 위한 공공적 감수성을 바탕으로 그동안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의 위치를 헤아리고, 우리의 시선을 더 넓고 깊은 곳으로 확장해 나가는 것이야말로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참된 소명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