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와 공공성 포럼 칼럼 #43 (2026.07.28)

 

놀이로 세우는 공동체

 

윤영훈 교수 (성결대학교)

 

여름을 맞아 대부분 교회는 수련회를 준비한다. 수련회에서 가장 기대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지친 일상에서 벗어나 즐거움과 안식을 누리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어느 때부터인가 교회 수련회는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아내기 위한 특별한 훈련과 사역의 장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다. ‘훈련’과 ‘사역,’ 이 두 단어가 오늘날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얼마나 살벌한 용어인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초등학교 1학년 국어 교과서 첫 페이지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었다. “철수야 놀자. 영희야 놀자. 바둑이도 같이 놀자.” 곱씹어보면, 이 세 문장에 많은 통찰이 담겨있다. 그렇게 우리는 함께 어울려 노는 삶의 지혜를 제일 먼저 배웠다.

요한 하위징아는 자신의 책 <호모 루덴스>(1944)에서 이렇게 말한다. “인간에게 생각하는 것보다 더 근원적 본성은 놀이이다. 결국 모든 인간 행동의 동기는 즐거움을 위한 것 아닐까?” 하위징아는 놀이의 성격에 가장 중요한 요소를 ‘자발성’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가장 열중하는 순간은 그것이 정말로 즐거울 때이다. 하위징아는 놀이에서 노동을 뛰어넘은 문화의 원리를 발견한다. 자발적 즐거움으로 하는 활동이란 의미에서 놀이는 가장 지적이며 능동적인 창의성의 원천이 되기 때문이다.

개신교 신학에서 기인한 자본주의 산업사회의 일상에서 성실한 노동은 인간 구원의 객관적 증명이며 게으름은 신의 소명을 낭비하는 것으로 만든다. 하나님은 창조와 구원을 위해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고”(시편 121:4) 일하는 분이시다. 이렇게 노동이란 새로운 신앙이 탄생한다.위르겐 몰트만은 <놀이의 신학>에서 기독교 신학은 ‘윤리적 요구’(ethical Claims)보다 ‘미학적 즐거움’(aesthetic joy)의 가치를 더 강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말처럼 우리는 시대 흐름 때문만이 아니라 성경의 본질에 근거해 신학과 활동의 재구성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창조세계는 안식일의 영원한 축제이며 하나님과 함께, 자연과 더불어, 벗었으나 부끄럽지 않고 흉보지 않는 온전한 인간관계를 누리는 흥겨운 에덴의 놀이터였다(창 2:25). 이 창조 세계 안에서 노동은 함께 나누는 놀이의 연장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은 놀이로 충만했다. 그분은 밤새 노동에 지친 사람들을 마술같은 퍼포먼스로 새로운 세상을 꿈꾸게 하신다. 그분은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염려하며 아등바등하며 살지 말라고 하시며 자연의 섭리에 눈을 돌리게 하신다(마 6:26-33). 예수의 첫 기적은 잔치집에 바닥난 포도주를 채우신 것이다(요 2:1-11). 그분은 당대의 종교인들과는 달리 걸쭉한 입담과 해학으로 이야기하며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셨다(마 7:31; 13:34; 막 4:33).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이야기할 때면 자주 잔치를 모티브로 사용하셨다(마 22:2; 눅 14:16). 이런 예수의 놀이는 종말론적 파티로 우리를 초대하신다. 진정한 놀이인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 법이다. 그분은 세리들과 매춘부, 이방인과 한센병 환자들과 같이 당대 율법 밖의 부랑자들과 먹고 마시며 어울렸다. 바리새인들은 그런 예수를 먹보와 술꾼이며 죄인들의 친구라고 비난했다(마 11:19; 막 2:15-16; 눅 7:34).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제자훈련’이란 이름으로 따르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모습인가? 놀이인인가, 아니면 놀이의 훼방꾼인가? 교회 설교는 예수님을 따르는가 아니면 서기관들의 방식인가? 죄인과 부랑인들의 친구인가 아니면 그들을 정죄하고 그들로부터 교인들을 분리하는 파수꾼인가?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며 바라보는 것은 환희와 경이로움으로 전복된 새로운 나라인가, 아니면 더 많은 수확을 통한 풍요의 세계인가? 그분은 은혜를 놀이에 불러들였다. 예수는 그 은혜를 통해 수치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치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당당하고 ‘명예롭게’ 사는 법을 알게 하신다. 그렇게 구원은 그분의 놀이를 통해 값없이 주어진다. ‘은혜’는 그분과 누리는 게임의 법칙이다.

물론 현대 놀이문화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다. 놀이는 거대한 산업으로 우리 일상을 지배한다. 버라이어티한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전시하는 놀이 방식과 유행은 감각을 자극하고 욕망을 일깨운다. 이는 고스란히 노동에의 욕망으로 연결된다. 매체가 자극하는 욕망을 채우려면 무엇보다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이다. 미국 기업가 헨리 포드가 영리하게 제안했듯이 “사람들을 착실한 노동자로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들을 탐욕스러운 소비자로 만드는 것이다.” 새로운 자극 없이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현대인들은 소비적 놀이산업에 중독되어 있다. 그 자체로 일상의 리듬을 타며 함께 즐기던 공동체적 놀이는 자극에 밀려 사라지고 말았다.

세속 놀이문화에 대한 경계와 함께 교회는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개발하며 성도들의 이탈을 막고자 노력하였다. 이렇게 개발된 교회 문화는 산업화된 이벤트 프로그램의 조악한 모방을 벗어나지 못했다. 오히려 이런 행사들을 준비하기 위해 일해야 하는 역설에 빠지고 만다. 그 근저에 순수한 즐거움이 아니라 성장이라는 ‘생산성’을 목표로 한다면 교회 놀이문화는 점차 식상해질 것이 자명하다. 교회의 시대적 사명은 재미를 넘어 삶의 의미와 진정한 희락을 제공하는 새로운 놀이문화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놀이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프로그램이 아니라 동무라는 사실이다.

행복한 사람 주위 사람들은 행복해진다. 특히 리더의 행복은 아주 쉽게 전이된다. 아버지가 놀 줄 알아야 가족이 화목하다. 사장님이 놀아야 직원들이 즐겁다. 마찬가지로 목사님이 놀 줄 아셔야 교인들도 행복해지지 않을까? 불행히도 어려운 시대를 지나온 우리 사회 어른들은 젊은 시절부터 열심히 목표지향적 삶을 살아왔다. 그들은 자신처럼 성도들도 성실하게 훈련받고 사역할 것을 강조한다. 기독교의 모든 활동이 자발적 즐거움으로 함께 어울리는 놀이의 연속이었으면 좋겠다.

놀이는 공동체를 만드는 최선의 방식이다. 신과 함께, 자연과 함께, 또한 이웃과 함께 논다는 것은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내고 기존 관계를 깊게 한다. 그 순간 내가 아니라 우리로 존재하는 집합적인 몸을 만드는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다. 공동체적 놀이는 공동체적 배움과 나눔으로 승화될 수 있다. 놀이는 피로와 경쟁에 지친 삶의 시스템에서의 해방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다시 놀 수 있는 자유를 회복시켜주신다. 성경은 이상적인 예배 모습으로 “주의 자녀들이 주의 전에서 즐거이 뛰논다”고 표현하고 있다. 나는 교회가 즐거운 웃음소리가 가득한 기쁨의 성소가 되기를 소망한다. 그것이 우리가 그토록 바라는 천국의 진짜 모형일 테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