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교회와 공공성 포럼 칼럼 #50 (2026.09.15)
지워진 존재를 복원하는 하나님의 방식
손주환 목사(걷는교회,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고통은 모두에게 똑같이 보이지 않는다. 영향력을 가진 사람의 사소한 불편은 곧장 뉴스가 되지만, 누군가의 절박한 생존은 좀처럼 관심을 받지 못한다. 누구의 고통이 더 큰가보다 누구에게 더 큰 힘이 있는가에 따라 관심의 크기가 달라진다. 출애굽기 3장 7절은 이 익숙한 질서와 다른 방향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이집트에서 억압받던 이들의 고통을 보셨고, 부르짖음을 들으셨으며, 그들의 고난을 아셨다. 이 세 동사는 오늘 우리가 약자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지워진 존재를 어떻게 복원해야 하는 지를 성찰하게 한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의 괴로움을 내가 똑똑히 보았다. 이집트 노동 감독관들 때문에 그들이 울부짖는 소리를 내가 들었다. 그들의 아픔을 내가 알고 있다.(출 3:7, 새한글성경)
하나님이 고통을 보셨다는 것은 보이지 않던 사람을 보이게 하는 일, 곧 ‘가시화’의 요청으로 다가온다. 이집트의 지배 질서에서 히브리 노예는 벽돌을 만드는 노동력이었다. 생산량은 계산되었지만, 그것을 채우느라 소진되는 사람의 삶은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았다. 하나님은 그들을 보시고 ‘내 백성’이라 부르신다. 노동력으로만 환산되었던, 그래서 가려졌던 사람의 존재가 드러나는 순간이다.
오늘도 우리 사회는 누군가의 노동과 희생 위에서 움직이면서 그 사람의 삶은 쉽게 지워 버린다. 깨끗한 건물은 보지만 청소하는 사람은 보지 못하고, 빠른 배송은 원하지만 배달하는 사람의 위험은 외면한다. 돌봄의 필요성에는 동의하면서도 그 책임을 감당하는 가족과 노동자의 하루에는 무심하다. 가시화는 이들을 불쌍한 모습으로 전시하는 일이 아니다. 편리한 일상 뒤에 가려진 얼굴을 드러내고, 개인의 불운이나 무능으로 처리되던 고통을 공동체가 함께 다룰 문제로 가져오는 일이다.
하나님이 부르짖음을 들으셨다는 것은 약자들의 ‘발언권’을 생각하게 한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의 응답을 불러온 것은 힘 있는 사람의 유려한 연설이 아니었다. 고된 노동에 지친 사람들의 탄식과 부르짖음이었다. 그 소리는 정돈된 언어도, 충분한 논거를 갖춘 주장도 아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말할 자격을 심사하지 않으셨다. 고통 속에서 터져 나온 소리에 응답하셨다.
우리는 약자를 위한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당사자가 말할 자리는 충분히 마련하지 않는다. 대신 설명하고, 대신 판단하며, 무엇이 필요한지까지 대신 결정한다. 발언권을 보장한다는 것은 이미 그들에게 있는 말할 권리를 인정하고, 그 말이 공동체의 결정에 영향을 미치도록 하는 일이다. 장애인에게 필요한 것을 논의한다면 장애인의 목소리가 중심에 있어야 하고, 돌봄의 문제를 다룬다면 돌보는 사람과 돌봄받는 사람 모두가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발언 시간을 주었더라도 결론이 이미 정해져 있다면 충분한 경청이라 하기 어렵다. 듣는다는 것은 그 말을 통해 우리의 판단과 계획이 달라질 가능성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하나님이 고난을 아신다는 것은 약자를 향한 ‘이해와 공감’으로 우리를 이끈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의 앎은 고통에 관한 정보를 확보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 고난을 아시고, 그들을 구하기 위해 내려오겠다고 말씀하신다. 앎은 고통받는 사람의 현실에 관계를 맺고 응답하는 행동으로 이어진다.
우리의 공감도 상대방의 삶이 놓인 조건을 헤아리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가난한 사람에게 절약을 권하기 전에 그의 소득과 주거비를 살펴야 하고, 지친 돌봄 가족에게 힘내라고 말하기 전에 쉴 시간과 지원이 있는지 물어야 한다. 불안정한 노동과 부족한 돌봄을 개인의 의지 문제로 돌리는 순간, 위로의 말조차 상처가 될 수 있다. 이해는 내가 모르는 삶이 있음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된다. 공감은 상대의 다차원적 삶의 자리에 대해 이해하고, 당사자가 원하는 변화를 함께 찾아가는 과정에서 깊어진다.
가시화와 발언권, 이해와 공감은 서로 이어져 있다. 보이게 하되 말할 기회를 막으면 약자는 구경거리가 되기 쉽다. 말을 듣되 삶의 조건을 이해하지 않으면 증언은 잠깐의 감동으로 소비된다. 이해했다고 말하면서 아무런 책임도 나누지 않는다면 고통의 무게는 여전히 당사자에게만 남는다. 하나님의 관심은 보고 듣고 아는 데서 구원의 행동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 일에 모세를 부르셨다.
교회의 관심도 여기에 있어야 한다. 우리 가운데 누구의 삶이 보이지 않는가. 누가 말하지 못하고 있는가. 누구의 고통이 개인의 몫으로 남겨져 있는가. 그 질문 앞에 자리를 내어 주고 우리의 결정과 자원을 바꾸어 갈 때,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 공동체의 구체적인 삶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