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교회와 공공성 포럼 칼럼 #47 (2026.08.25)
히즈라 공동체와 보편주의
최현종 교수(서울신학대학교)
아는 사람은 잘 아는 나의 취미 중 하나는 ‘영화감상’이다. 다만, 요즈음에는 영화관에는 거의 가지 않고, 넷플릭스 같은 OTT 서비스도 이용하지 않는다. 내가 보고 싶은 영화 목록을 작성하고, 그 영화를 인터넷 사이트에서 찾아 다운로드 해 두었다가, 보고 싶을 때 보는 것이 나의 영화감상방식이다. 21세기 영화는 거의 보지 않는 것도 하나의 특징일 수 있는데, 최근에 우연히 ‘몽키 맨’ (Monkey Man)이라는 2024년 영화를 보게 되었다. 영화는 데브 파텔(Dev Patel)이라는 인도계 영국인 배우의 감독 데뷔작인데(주연도 겸한다), 이 배우는 2008년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인 ‘슬럼독 밀리어네어’ (Slumdog Millionaire)의 주연으로 유명해졌다. 영화는 미국, 캐나다, 싱가포르 등의 자본으로, 인도계 영국인이 만든, 인도를 배경으로 한, 하지만 실제 촬영지는 인도네시아인, 말 그대로 ‘글로벌 다국적 프로젝트’의 영화다.
영화의 배경은 현재, 혹은 미래 어느 시점의 인도라고 할 수 있는데, 내게 1차적으로 흥미로웠던 것은 영화 속에 주요 모티프로 인도의 서사시 ‘라마야나’에 나오는 ‘하누만’이라는 캐릭터를 사용한 것이었다. 라마야나에서 하누만은 신화 속 원숭이-인간 종족인 ‘바나라’에 속하며, 바람의 신 ‘바유’의 아들로 여겨지는데, 이 때문에 바람처럼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비할 데 없는 속도와 힘을 지니고 있다. 실제로 이러한 하누만의 주요 특성은 중국소설 ‘서유기’의 주인공인 ‘손오공’의 캐릭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하누만은 손오공처럼 몸의 크기를 줄이거나 거대하게 키울 수 있는 변신 능력도 지닌다). 하누만은 라마야나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라마의 아내인 ‘시타’가 악마의 왕 ‘라바나’에게 납치되었을 때, 원숭이 군대를 이끌고 바다를 뛰어넘어 적진으로 들어가 그녀를 찾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이러한 모티프는 영화에서 감독의 현대적 해석 속에 반복된다(영화 초반부에는 주인공의 어머니가 어린 소년인 주인공에게 하누만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
그런데 나에게 더 흥미로웠던 것은 주인공이 패배의식에 갇혀, 자신에 잠재된 힘을 망각하고 있을 때, 이를 일깨워주고, 나중에 함께 부패한 권력과 종교 지도자에 맞서 싸우는 역할을 하는 ‘히즈라’ 공동체의 역할이었다. ‘히즈라’ 공동체는 현대적으로 말하면, ‘성소수자’ 공동체이다. 히즈라는 본래 생물학적으로는 남성으로 태어났으나 남성의 성을 포기하고, 여성의 옷차림과 언행을 하며 남성도 여성도 아닌 ‘제3의 성’으로 살아가는 이들로, 가족과 사회로부터 버림받거나 집을 나온 이들이 함께 모여서, 구루를 중심으로 엄격한 위계질서와 유대감을 형성하며, 가족과 같은 대안공동체를 이루어 살아 왔다. 하지만 남아시아 문화권에서 히즈라 공동체는 단순히 현대적 의미의 성소수자나 트랜스젠더 범주를 넘어, 수천 년의 역사와 독특한 사회·종교적 맥락을 지닌 고유한 집단이다. 영화 ‘몽키 맨’에서 이들이 단순한 조연 이상의 상징적 의미를 갖는 이유도 바로 이러한 히즈라 공동체의 역사적·문화적 배경과 맞닿아 있다.
이들과 유사한 성별 경계인의 모습은 인도의 고대 신화나 라마야나, 마하바라타 등의 서사시에서도 등장하며, 특히 중세 무굴제국 시절에는 궁중의 하렘을 지키는 내시나 왕실의 신뢰받는 관리로 중용되어 상당한 권력과 부를 누리기도 했다. 하지만, 19세기 영국이 식민 지배를 하게 되면서, 이들은 ‘범죄 부족(Criminal Tribes)’으로 지정되었고, 탄압과 불법화 속에서 사회적 양지로부터 밀려나 극심한 차별과 빈곤의 늪에 빠지게 된다. 힌두 전통에서 이들은 대지의 여신이나 특정 신과 영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여겨졌고, 이 때문에 전통적으로 결혼식을 올리거나, 아기가 태어날 때 찾아가 축복을 빌어주고 덕담을 건네며 돈이나 선물을 받기도 하지만, 현실 사회에서는 기피 대상이자 최하층민으로 여겨지졌고, 합법적인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워 상당수가 구걸이나 성매매 등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비극적 현실을 겪었다. 하지만, 오랜 투쟁 끝에 2014년 인도 대법원은 히즈라를 공식적인 ‘제3의 성’으로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고, 공공 문서에 자신의 성별을 따로 기재할 수 있게 되면서, 정치적, 사회적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길도 열리게 되었다. 영화 ‘몽키 맨’은 이러한 히즈라 공동체의 역사적 명암을 그대로 차용한다. 사회로부터 철저히 배제당하고 지하에 숨어 지내야 하는 존재들이지만, 내면에는 신성한 영적 치유력과 생명력, 그리고 억압에 맞서는 강인한 연대의 힘을 품고 있는 집단으로 묘사하는 것이다.
지난 번 내가 썼던 칼럼의 제목은 “보편주의의 충돌”이었다. 히즈라 공동체는 보편주의를 주장하지 않는다. 그들은 보편주의자들이 ‘남성/여성’, ‘동성애자/이성애자’로 그들의 정체를 보편적으로 규정하고자 할 때, ‘제 3의 성’으로 보편적 범주의 틀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보편주의, 나아가 이것이 좀 더 극단화된 형태라고 할 수 있는 ‘근본주의자’들은 이러한 회색지대를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물론 ‘근본주의’는 종교에서 비롯되었고, 일반적으로 강한 ‘보수적’ 입장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하지만, 피아를 흑백논리로 구분하고, 나와 같지 않는 이들을 ‘대화’의 대상이 아닌, ‘척결’의 대상으로 삼는 ‘근본주의적’ 형태는 ‘보수’와 ‘진보’를 가리지 않고 나타난다. 히즈라 공동체가 자신의 정체성을 보편화하면서 이들을 모두에게 적용하고자 한다면, 이들 또한 또 하나의 ‘보편주의자’, 나아가 ‘근본주의자’가 될 수 있다. 히즈라 공동체가 ‘히즈라적’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그러한 보편주의의 입장을 포기할 때인 것이다.
동양의, 특히 중국 문화권 사고의 주요한 범주 중 하나는 ‘음’과 ‘양’이다. 일반적으로는 ‘음’에 비해 ‘양’을 선호하지만, ‘양’으로만 이루어진 ‘건위천(乾爲天)’ 괘는 강력한 에너지와 성공을 상징하면서도, 동시에 지나침과 교만에 대한 엄중한 경고와 부정적인 해석을 함께 품고 있다. 주역은 “음이 극에 달하면 양이 되고, 양이 극에 달하면 반드시 꺾인다”는 순환의 원리를 담고 있기에, 건위천은 오히려 “가장 위험한 순간을 내포한 괘”이기도 하다. 또한, ‘양’이 본래의 자리인 위에 있고, ‘음’이 본래의 자리인 아래에 몰려 있는 ‘천지비(天地否)’ 괘도 좋지 않다. 하늘이 위에 있고 땅이 아래에 고정되어 있어, 두 기운이 서로 영영 만나지 못하고 멀어지기만 하는 ‘불통’의 괘이기 때문이다. 이는 세상 만물이 소통을 멈추고 고립된 상태를 의미한다. 결국,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도 ‘하나’만 있다면, 그리고 ‘소통’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좋지 못한 결과를 초래하는 것은 아닐까? ‘양’ 또는 ‘음’의 ‘지배’가 아닌, ‘조화’와 ‘소통’이 더 좋은 사회로 가는 길은 아닐까? 영화 속 히즈라 공동체의 모습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