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교회와 공공성 포럼 칼럼 #48 (2026.09.01)
크세니아(ξενία) 시대의 종언
한수현 목사(청수감리교회)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는 모두 보는 편이다. 다작을 하는 감독도 아니고 워낙 유명한 영화만을 만드는 사람이니 대단할 것 없는 취미이다. 그의 영화 중 ‘다크 나이트’를 최고로 여기고 있었는데 최근 개봉한 ‘오딧세이’를 보고 마음이 흔들리는 중이다. 다음은 한 번 봤을 뿐인 필자의 느낌과 생각을 적은 것이니, 독자는 너무 큰 의미를 두지 않아도 될듯하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로 표현된 패도의 시대, 힘과 야만이 대의와 명분을 짓누르는 시대를 보고 있다. 이미 오래전에 시작되었지만, 이제 피부로 깊이 느껴지는 날들이 계속되고 있다. ‘오딧세이’는 그러한 시대 정신을 노골적으로 논하는 영화이다. 호머의 ‘일리아스’와 ‘오딧세이아’는 흔히 트로이 전쟁과 오딧세우스의 귀환 이야기를 다루는 서사시로 알려져 있다. 첫 번째 이야기는 지난한 10년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지략가 오디세우스로 끝나고(물론 주인공은 아킬레스이다), 두 번째 이야기는 모험과 신비가 가득한 오디세우스의 10년이 걸린 귀환을 다루고 있다. 승리와 귀환이라는 흔한 줄거리이지만, 놀란 감독이 그리는 주인공의 얼굴은 언제나 우울하다. 영민하고 용맹한 지휘관이지만, 시종일관 자신의 선택에 확신을 가지지 못해 부하들의 마음을 살피지 못하고, 급변하는 상황 속에서 시련을 뚫고 나가는 영웅이 아닌, 멍한 표정으로 앞만 바라보는 부적응자의 모습을 보인다. 집으로 돌아가려고 몸부림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마다 주저하고 망설이는 오디세우스는 영웅이 아니다. 마치 사춘기 청소년이 혼자 방황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이유는 영화가 진행됨에 따라 서서히 밝혀진다.
호머가 기록한 두 서사시의 배경은 BC 13세기로, 본격적인 그리스의 고대사가 기록되기 전의 이른바 ‘역사적 암흑기’이다. 그런데 영화는 이 시기를 ‘제우스의 법’, ‘크세니아’가 지배하던 시대라고 말한다. ‘크세니아’란 나그네에 대한 환대를 가장 근원적인 법으로 여기는 문화를 뜻한다. 제국과 거대 국가가 아니라 여러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이 환대의 법을 중심으로 번영과 평화를 누리던 시대, 그 평화의 시대를 뒤집은 영웅들이 등장했다. 무역과 교역으로 풍요를 누리던 트로이(지금의 터키 지역)를 힘으로 몰락시켜 패도의 시대를 열고자 했던 그리스의 왕 아가멤논에 의해 시작된 전쟁은 트로이의 완강한 저항 앞에 실패로 끝나고 있었다. 그때, 귀환만이 소망이었던 지략가 오디세우스는 패배를 인정하고, 여신 아테나(트로이와 그리스가 함께 숭배하던 여신)에게 바치는 제물로 거대한 목마를 남겨 둔 채 후퇴를 가장한다. 그 속에는 수십명의 결사대가 숨어 있었다. 신을 위한 공물이기에 트로이 도시 중심의 신전에 세워진 목마 안에 숨은 결사대원들은 밤을 틈타 성문을 연다. 그리고 크세니아가 아닌 거짓에 기반한 약탈과 살인, 강간, 방화가 시작되고, 이는 위대한 승리로 귀결된다. 크세니아, 환대의 법으로 평화를 누리던 시대를 자신의 사악한 속임수로 끝장낸 것을 깨달은 오딧세우스는 이제 돌아갈 고향을 영원히 잃어버렸음을 깨닫게 된다. 전쟁에서는 승리했지만, 평화의 땅인 크세니아가 번영하던 고향은 이제 없어진 것이다. 이제 모두 승리가 목표인 악한 영웅이 추앙받는 시대이다. 크세니아가 없기에, 환대가 아닌 거짓과 패도가 시작되었기에, 승리한 ‘나그네’ 또한 돌아갈 곳은 없다.
패도의 그리스가 마케도니아 제국으로 바뀌고 이후 로마 제국으로 바뀐 후 유대 예루살렘의 주변부에서 세계사적으로 보면 작은 소요가 일어났다. 크세니아의 횃불을 다시 밝힌 한 유대 청년이 크세니아를 실천하며 십자가에 매달린 사건이었다. 그를 따르던 자들은 그의 부활을 전하며 신을 아버지로 모시는 크세니아의 공동체를 발흥시켰다. 2,000년이 지났다. 영화 ‘오딧세이’는 3,000년 전 크세니아의 숨통을 끊었던 오딧세우스의 후회를 다시금 일깨우고 있다. 승자도 돌아갈 곳이 없는 시대,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