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와 공공성 포럼 칼럼 #30 (2026.04.28)

라헬의 눈물

김근주 교수(기독연구원 느헤미야)

 

자신의 왕위를 위협하는 존재를 제거하기 위해서라면 아무리 비상식적인 일이라도 자행하는 이가 마태복음이 그리는 헤롯이다. 이미 그의 나이가 70세 가량 되었음에도, 그는 이제 갓 태어난 아이와 미래의 왕이 연관된다는 것을 도무지 견뎌내지 못하면서, 베들레헴 인근의 두 살 이하 사내아이를 모두 죽이라는 참혹한 명령을 내린다. 자신이 동방 박사들에게 알아본 때를 기준으로 두 살 이하를 다 죽이도록 명령했는데, 동방박사들이 자신에게 찾아왔을 때 이미 아이가 태어났을 수도 있음을 고려해서 한 살 이전의 아이가 아니라 두 살 이전의 아기를 다 죽이도록 했다. 광기에 사로잡힌 왕은 혹시 모를 위험을 대비해서 넉넉하게 폭을 잡아 싹 다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 권력을 유지하겠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아내건 아들이건 무차별적으로 죽인 헤롯의 광기 가득한 행태는 요세푸스를 통해 잘 알려져 있다. 광적으로 사랑했던 마리암네를 죽인 이래 그는 내내 죄책감에 시달리며 정신적으로 붕괴되었고(<유대 고대사> 15.7.4-7), 마리암네와의 사이에 태어난 두 아들이 어머니의 복수를 꾀한다는 의심에 사로잡혀 둘다 죽여버렸으며(16.11.7), 그의 장남까지도 처형시켰는데(17.7.1), 이 때는 헤롯 자신이 죽기 5일 전이었다. 자신이 곧 죽을 것을 알고는 유대 지도자들을 여리고 경기장에 가두어 자신의 죽음 때에 그들도 죽이라고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17.6.5). 그들을 위한 온 백성의 슬픔과 눈물을 자신의 죽음으로 인한 것처럼 만들기 위해서였다. 권력에 사로잡힌 광기에서 벌어지는 광란은 그저 오래 전의 일이 아님을 오늘 우리는 미국과 이스라엘에서 역력히 목격하고 있다.

그렇게 헤롯이 죽여버린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는 몇 명이나 되었을까? 열 명? 스무 명? 트럼프의 명령에 따라 이란을 공격한 미군이 낡은 정보로 오폭했다며 다 죽여버린 이란 남부 미나브 초등학교의 사망자와 같은 165-175명? 아니면 이번 중동 전쟁이 시작된 이래 이스라엘의 지속적인 공격으로 죽은 레바논 어린이의 숫자와 같은 177명(MBC 뉴스)? 헤롯과 트럼프-네타냐후 동맹 사이의 차이가 있다면, 헤롯은 이 한 번의 베들레헴 학살로 끝낸 반면, 트럼프-네타냐후 살인마 동맹의 살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는 데 있다.

헤롯의 유아 학살을 다루며 마태가 인용한 예레미야 본문은 흔히 ‘위로의 책’이라 불리는 30-31장에 속한 부분이다. 이 가운데 31:15은 라마에서 들려지는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를 언급한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 때문에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어져서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도다”(렘 31:15)

 

예레미야 31:15-22은 북왕국의 회복을 알리는 말씀이다. 라헬의 죽음은 베냐민을 출산한 것 때문이지만, 예레미야서는 라헬의 애통함을 라헬의 첫 아들 요셉 그리고 요셉의 아들이면서 북왕국을 대표하는 에브라임의 추방과 연관시킨다. 추방되어 이제는 사라져 버린 북왕국을 기억하는 슬픔이, 자식으로 인한 라헬의 애곡과 연결되었다. 이제는 사라져 버린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슬픔이 라헬의 애곡이다. 예레미야서는 흩어진 북왕국으로 인한 라헬의 슬픔에 이어, 추방된 에브라임을 향한 야훼의 고통과 아픔을 표현한다.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창자가 들끓으니 내가 반드시 그를 불쌍히 여기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31:20)

 

자식으로 인해 라헬이 애곡한다는 내용이 에브라임으로 인해 ‘야훼의 창자가 들끓는다’는 내용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여기서 ‘라헬의 애곡’과 ‘야훼의 들끓어하심’이 대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놀랍게도 야훼는 어머니 라헬로 표현되었다. ‘반드시 불쌍히 여기다’로 옮겨진 표현은 동사 ‘라함’을 형태를 바꾸어 두 번 반복한 것인데, 이 동사에서 파생한 ‘레헴’이 여성의 포궁을 가리킨다는 점 역시, 라헬로 표현된 야훼를 보여준다. 예레미야서가 장차 이루어질 회복을 두고 “여자가 남자를 둘러 싸리라”(31:22) 표현한 것 역시 눈물로 자식을 감싸 안은 라헬, 그리고 그렇게 아들 에브라임을 감싸 안으시는 야훼의 ‘불쌍히 여기심’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한편, 개역이 ‘깊이 생각하다’로 옮긴 표현은 ‘기억하다’ 동사를 두 번 반복한 것이다. 어머니 라헬은 북왕국을 애도하고, 어머니 야훼께서는 북왕국을 단단히 기억하신다.

마태기자는 예레미야서를 읽으면서 자신이 들은 끔찍한 현실에 들어맞는 구절을 발견하였으며, 31:15에 있는 라헬의 눈물을 무고히 자녀를 잃은 베들레헴 어머니들의 눈물에서 발견하였을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헤롯과 같은 포악한 권력에 의해 낯선 땅으로 피신하셔야 했고, 야훼께서는 추방된 그 백성을 향하여 애끓는 마음으로 안타까워하시는 어머니 라헬이 되셨다. 자식 잃은 라헬의 슬픔은 베들레헴에서 학살당한 아이들, 그리고 그 땅에서 도망쳐야 하는 아기 예수를 향한 하나님의 슬픔과 애통으로 성취되었다.

칠십인역 예레미야의 경우 ‘위로받기를 거절하다’ 자리에 ‘그치기를 거절하다’를 지녔는데, 마태복음은 마소라와 일치하는 ‘위로받기를 거절하다’를 따랐다. 마태 기자는 의도적으로 ‘위로하다’ 동사를 염두에 두고 마소라와 일치하는 고대 히브리어 본문을 옮겼을 것이다. 자식을 잃은 라헬은 그 어떤 위로도 원하지 않았다. 라헬로 표현된 하나님은 위로를 주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권능을 행하시는 분이 아니라, 어머니 라헬이 되어 그저 눈물 흘리시며 애도하시는 분이시며, 죽어간 생명을 기억하시는 분이다. 이 자리에서 마태의 예레미야 인용은 죽어간 아이들과 그 어머니의 슬픔에 대한 애도를 표현하면서 그 죽음과 슬픔을 영영히 기억되게 하였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오늘 이란과 레바논, 가자 지구에서 죽어간 아이들을 슬퍼하시며 기억하실 것이다. 라헬은 자녀로 인해 눈물 흘리고, 하나님 역시 죽어간 자녀로 인해 눈물 흘린다. 아이들이 죽임 당하는 그 밤에 살던 곳을 떠나 도망쳐야 했던 아기 예수는 홀로 운이 좋은 것이 아니라, 아이들의 죽음을 이후로도 내내 짊어져야 하는 삶이었다. 우리 역시, 죽어간 생명을 애도한다. 그리고 슬픔 가득한 마음으로 이 일을 ‘단단히 기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