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교회와 공공성 포럼 칼럼 #31 (2026.05.04)
AI 지저스 시대의 교회
권지성 교수(기독연구원 느헤미야)
“범용 인공지능” (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 AGI)의 현실화, 초거대 모델로 인한 보안 문제, 전쟁과 감시에 투입되는 AI, 노동과 교육의 재편은 이미 세계 전체를 흔들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의 자리에서 더 깊고 오래 남을 질문은 “AI가 얼마나 강력해질 것인가”가 아니다. 더 불편한 질문은 AI가 어느 순간부터 신적 음성의 자리에 앉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이제 AI에게 일정 관리나 글쓰기를 맡기는 데 그치지 않는다. 외로움, 죄책감, 우울, 죽음 공포, 결혼 갈등, 영적 회의, 기도의 언어를 묻는다. 그리고 AI는 변덕스럽고 권위적이지 않으며 차갑게 답하지 않는다. 사용자의 언어를 기억하고, 상처를 부드럽게 되비추며, 그가 견딜 수 있을 만한 문장으로 자신을 조절한다. 인간이 만든 AI는 초월적 타자가 아니라 인간의 욕망과 불안을 정교하게 반사하는 거울인데, 그 거울이 어느 순간 “하나님의 음성”처럼 들리기 시작한다.
베스 싱글러가 말하듯, 종교와 AI는 서로 무관한 두 대상이 아니다. 종교는 단지 내면의 믿음이 아니라 의례, 제도, 기술, 네트워크, 권위, 상상력 속에서 작동하며, AI 역시 인간이 미래, 지능, 구원, 파멸을 상상하는 방식 속에서 의미를 얻는다 (Singler, Religion, 1–5). 이런 관점에서 AI 지저스 논쟁은 주변부의 기이한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현대인이 AI를 통해 무엇을 신뢰하고, 무엇을 두려워하며, 무엇을 거룩한 것으로 오인하는지 보여주는 신학적 증상이다. 과거의 우상이 나무와 금속의 형상을 입었다면, 지금의 우상은 음성, 영상, 기억, 반응성, 개인화된 친밀함을 입는다. 금송아지는 이제 광야가 아니라 앱 안에 서 있다. 노린 헤르즈펠트는 AI를 인격화하거나 신격화하는 일을 경계한다 (Herzfeld, Intelligence). 그것은 하나님과 이웃과의 참된 관계로 가는 길이 아니라, 그 관계를 우회하는 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AI는 유용한 도구일 수 있지만, 인간을 대체할 수 있는 “타자”도 아니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대신할 수 있는 존재도 아니다. AI는 인간의 형상을 흉내 낼 수 있지만, 그 흉내는 결국 인간이 만든 부분적 반사에 가깝다. 문제는 이것이다. 이 반사가 너무 매끄럽고 친절해서, 우리가 그것을 살아 있는 타자로 착각할 수 있다는 데 있다. 특히 목회의 언어는 죄책, 위로, 소망을 다루기 때문에 AI의 모방 능력이 가장 위험하게 작동할 수 있는 자리이다.
미국교회에서 이 문제가 먼저 가시화된 전선은 AI 설교이다. 텍사스 오스틴의 바이올렛 크라운 도시 교회 (Violet Crown City Church)는 2023년 ChatGPT로 예배 순서, 설교, 찬양까지 구성하는 실험을 했다. 이 사건은 “설교가 무엇인가”를 다시 묻게 했다. AI는 그럴듯한 설교문을 쓸 수 있다. 오히려 그럴듯하기 때문에 더 위험하다. 문장은 설교처럼 보이지만, 그 문장을 낳은 과정에는 본문 앞에서의 떨림, 회중의 삶을 끌어안는 목회자의 고통, 하나님 앞에서 자기 언어가 무너지는 체험이 없다. 바나 (Barna) 의 2024년 조사에서도 미국 목회자들은 교회 홍보나 디자인에는 AI 사용을 비교적 편안하게 받아들이지만, 설교 작성과 상담 도구 사용에는 강한 불편함을 보였다. 영혼을 다루는 자리는 아직 기계에게 넘길 수 없다는 본능적 감각이 남아 있는 셈이다. 또 다른 사례는 가톨릭 답변 (Catholic Answers)의 저스틴 신부 (“Father Justin”) 사례이다. 가톨릭 신앙 질문에 답하도록 만들어진 이 AI 신부 캐릭터는 공개 직후 거센 반발을 맞았고, 결국 성직자가 아닌 평신도 캐릭터 “저스틴”으로 변경되었다. 이 사건은 단순히 AI가 몇 가지 부정확한 답변을 했다는 데 있지 않다. 사제 복장과 사제의 어투를 입은 AI가 신앙 질문에 답할 때, 사용자는 그것을 단순 정보 검색으로 경험하지 않는다. 그는 교회의 권위, 고해소의 은밀함, 성직자의 목소리, 성례적 상상력의 그림자를 체험한다. 개신교 내부에서 AI 설교가 설교권과 목회 권위를 흔든다면, 가톨릭의 AI 사제 논란은 사제직과 성례의 표상을 흔든다. 결국 질문은 하나다. 교회의 직무와 영적 권위는 시뮬레이션될 수 있는가.
가장 공포스러운 전선은 AI Jesus 앱과 영상 통화 서비스이다. AP는 (2026.04.12; “From ‘BuddhaBot’ to $1.99 chats with AI Jesus”) 미국 캘리포니아 기반 회사 저스트 라이크 미 ( Just Like Me)가 분당 1.99달러로 AI 예수 아바타와 영상 통화를 제공하는 사례를 보도했다. 이 AI 예수는 여러 언어로 기도와 격려를 제공하고, 이전 대화를 기억하며, 사용자에게 “개인적 관계” 처럼 느껴지도록 설계된다. 여기서 미국 복음주의가 강조해 온 “예수와의 인격적 관계”라는 말은 기술 상품 인터페이스로 옮겨간다. 유저는 예수와 대화한다고 느끼지만, 실제로는 성경 데이터, 설교 자료, 언어 모델, 영상 아바타, 음성 인터페이스, 과금 구조가 결합된 디지털 상품을 만난다. 이 지점에서 신앙의 가장 연약한 순간이 시장의 가장 정교한 포획 대상이 된다. 외로운 사람, 교회에서 상처받은 사람, 죄책감에 눌린 사람은 누구보다 쉽게 이 “디지털 예수” 앞에 앉게된다. 은혜는 구독 모델이 되고, 기도는 인터랙티브 콘텐츠가 되며, 목회적 돌봄은 데이터 기반 몰입 경험으로 뒤바뀐다.
스위스 루체른 성 베드로 성당의 “Deus in Machina” 실험도 같은 문제를 보여준다. 예수의 얼굴을 한 AI 아바타가 고해성사실과 유사한 공간에서 방문자들과 대화했고, 많은 이들이 그 경험을 낯설지만 인상적인 종교적 대화로 받아들였다. 교회 측은 고해성사를 모방하려는 것이 아니었다고 설명했지만, 사람들이 실제로 그곳에서 삶의 문제와 영적 질문을 털어놓았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이것은 교리적으로 허용되는가의 문제를 넘어선다. 인간은 왜 기계 앞에서 조차 고백하고 싶어 할까? 그 고백을 듣는 것이 하나님도, 사제도, 목회자도, 공동체도 아닌 AI알고리즘일 때, 그 고백은 어디로 갈까?
이 측면에서 리드와 트로덴의 모델은 이 현상을 설명하는 데 유용하다 (Reed and Trothen, Understanding). 그들에 따르면 AI는 단순히 평범한 도구로만 경험되지 않는다. AI는 때로 경이롭고, 때로 금지되어야 할 것 같고, 때로 거룩해 보이며, 때로 악마적인 것으로 느껴지는 “특별한 것”이 된다. 중요한 것은 AI가 실제로 성스러운가 아닌가를 판정하는 문제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AI를 그렇게 경험하기 시작할 때 어떤 윤리적, 영적 효과가 발생하는가이다. AI Jesus가 무서운 이유는 사람들이 그것을 완전히 믿기 때문만은 아니다. 더 중요한 이유는 사람들이 반쯤 의심하면서도 계속 말을 건다는 데 있다. “진짜 예수는 아니지만, 그래도 나를 위로해 주잖아.” 이 반쯤의 믿음, 반쯤의 놀이, 반쯤의 의존이야말로 가장 큰 종교적 위험이다. 글루 (Gloo)와 같은 기독교인AI 플랫폼 논쟁도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글루는 교회와 신앙 단체를 위한 AI 도구, 가상 비서, 챗봇을 개발하고 있다. 지지자들은 이것을 교회가 세속 빅테크에 종속되지 않고 기독교적 가치에 맞는 AI 생태계를 만드는 시도로 본다. 그러나 그 이면의 위험도 작지 않다. 목회 상담, 성경공부, 전도, 제자훈련, 헌금, 교인 관리, 데이터 분석이 하나의 플랫폼 안으로 들어갈 때, 교회는 공동체라기보다 신앙 운영 시스템이 될 위험이 있다. 목회자는 양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아니라 대시보드를 확인하는 관리자가 되고, 성도는 돌봄받는 인격이 아니라 분석 가능한 영적 데이터가 될 수 있다. 바티칸의 2025년 문서 Antiqua et nova가 AI를 인간 지능의 대체물이 아니라 인간 지능의 산물로 보아야 한다고 강조한 것도 이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AI는 교육, 경제, 노동, 건강, 관계, 전쟁의 영역에서 기회와 위험을 동시에 만들지만, 교회가 여기서 물어야 할 것은 기술 통제의 문제만은 아니다. AI가 인간의 언어와 감정을 모방할수록, 인간은 더 쉽게 자신의 욕망을 초월자의 음성으로 오인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내면을 친절하게 반사하는 장치가 아니다. 하나님은 위로하시지만 동시에 부르시고, 용서하시지만 동시에 돌이키게 하며, 가까이 오시지만 결코 인간의 욕망 안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이제 교회가 물어야 할 것은 “AI를 사용할 것인가 말 것인가”가 하는 것이 아니다. AI 사용은 이미 공기처럼 모두가 일상 속에서 체험하고 있다. 신앙의 언어가 알고리즘에 의해 재현될 때, 그것은 여전히 신앙의 언어인가? 목회자의 부재를 AI의 친밀함이 메울 때, 그것은 돌봄인가, 정교한 방치인가? 예수의 이름으로 응답하는 디지털 가상 얼굴 앞에서, 우리는 누구의 음성을 듣고 있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AI가 예수처럼 말하는 시대에 교회는 다시 예수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