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와 공공성 포럼 칼럼 #12 (2025.11.15)

하나님 나라담론을 재고한다.

김동춘 교수(현대기독연구원 원장,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은퇴교수)

언어는 권력이다. 언어가 공적 담론이 될 때 특히 그러하다. 오늘날 기독교의 공적 담론의 하나는 ‘하나님 나라’라고 할 수 있다. 80년대 후반부터 한국 복음주의 그룹은 총체적 복음과 삶의 전 영역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하기 위한 신학적 개념으로 하나님 나라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하나님 나라는 본격적으로 진보 리버럴 복음주의 기독교에서 유행처럼 회자되기 시작하더니 우리 시대의 지배담론이 되었다. 그러나 묻고 싶다. 지난 30년 넘게 사용된 하나님 나라 담론이 세상, 교회, 자아를 얼마나 바꾸었는가? 라고.

세상속에 임하는 하나님 나라!’. 학원선교단체는 캠퍼스와 세상속에 하나님 나라의 구현을 외쳤으며, 총체적 복음주의자들은 영혼구원을 넘어 세상속에서 그리스도의 통치를 염원했고, 진보 에큐메니칼은 하나님 나라의 기조 아래 이 땅에 “정의가 강물같이” 실현되기를 앙망하였다. 심지어 최근에는 극우 기독교조차 하나님 나라 운동을 전개하면서 ‘대한민국 바로세우기’에 앞장서고 있다. 그런데 과연 하나님 나라 모토가 죄된 세상을 재형성하였으며, 교회를 새롭게 갱신하였으며, 그리스도인의 자아 정체성에 실제적인 임팩트를 주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냉정하게 말한다면, 하나님 나라 담론은 막연한 희망섞인 언어였으며, 군중집회에서 흔하게 내뱉는 수사적 언어에 불과했다.

하나님 나라 담론을 직설적으로 문제제기하는 이유가 있다. 대놓고 말해 하나님 나라가 형식언어요, 허구적인 표어가 되었기 때문이다. 본회퍼의 값싼 은혜처럼, 하나님 나라는 싸구려 나라로 전락했다. 하나님 나라는 수많은 성경 강해서와 교회설명서들, 사회참여 도서에 갖다 붙이면, 잘 팔리는 광고문구가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 브랜드를 내건 서적들을 읽어 보라. 그 나라에 관한 내용적 실체를 찾아보기 힘들다. 하나님 나라는 그저 허명(虛名)이거나 명목상의 표기에 불과할 뿐이다. 오늘날 하나님 나라 이름을 내건 책이나 집회에서도 하나님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어떤 특질을 지닌 나라인가”, “누구의 나라인가?”에 대해 말하고 있는가 말이다. 한 마디로 말해 <하나님 나라의 구체성>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다. “덮어놓고 하나님 나라”. 그렇게 사용하는 형식언어가 되지 않았는가 묻고 싶다.

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승리주의적 관점’을 재고해야 한다. “물이 바다 덮음같이” 찬양은 이 땅에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노래한 대표적인 찬양이다. 이 서사는 선교와 부흥집회만이 아니라 사회변혁 집회에서도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열광주의적 비전을 뜨겁게 달구었던 찬양이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 이상의 과잉 서사가 되었다. ‘세상속에 임하는 하나님 나라’가 ‘물이 바다 덮음같이’와 결합할 때, (그 신학적 상상력이란) 마치 하나님 나라가 세상을 뒤엎듯 물밀듯이 진군하여, 세상을 한순간에 집어삼키고, 빨아들여, 일순간 거침없이 실현될 것인 양 설교하곤 했다. 그러나 현실의 나라에서 하나님 나라는 “물이 바다 덮음같이” 임하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는 상극의 나라이다. 하나님 나라의 새 질서는 옛 질서인 세상과 끝없는 갈등과 반목으로 뒤엉켜 있는 가운데, 힘겹게 성취되거나, 그것도 ‘부분적’이고, ‘잠정적’ 수준에서 드러나는 나라다.

하나님 나라는 기존의 삶의 질서를 ‘전복하는’ 윤리이므로 세상 나라의 가치와 문화와 경쟁하면서 거센 저항을 뚫고 가야 한다. 한편으로 하나님 나라는 누룩이 번지고, 겨자씨가 자라듯 은밀하고, 점진적으로 진입하여 성장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세상 나라의 저항이 워낙 거센 탓에 예수의 부름받은 정예 제자단이 “침노하는 자들처럼” 침투조와 같이 기습공격하며 치고 들어가는 나라이다. 그렇다고 해도 하나님 나라는 “물이 바다 덮음같이” 서사처럼, 세상을 완전히 장악하여 완승을 거두지 못한다. 세상속에 현존하는 하나님 나라는 알곡과 가라지가 섞여 있듯 두 왕국의 불편한 공존이 불가피한 채로 존립하는 나라이다. 그러나 우리는 복음으로 세상을 완전히 뒤덮어 버린다거나, 교회의 물량적 규모와 외형적 확장을 하나님 나라의 확장으로 연결하여, 전적(total) 승리주의 서사를 너무 많이 남발했다.

또 한 가지는 하나님 나라 담론의 적실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하나님 나라 담론은 ‘거대서사’(메가 내러티브)이다. 료타르는 『포스트모던의 조건』에서 거대서사는 모던시대에 적합하며, 포스트모던 시대에는 구체성이 떨어진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오늘날 중요한 이슈로 부상한 타자에 대한 배제와 포용, 차별과 환대, 자아 정체성 문제를 하나님 나라와 같은 거대 담론으로 풀어갈 수 있을까? 하나님 나라 담론은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될 성서적, 신학적 큰 개념이긴 하지만, 이런 미세한 의제들을 풀어내기에는 적합한 신학적 아젠다는 아니다.

하나님 나라 담론은 세상속에 하나님의 다스림의 실현에 대한 비전이다. 사실 이 비전은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의 외연을 확장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시대의 한국 기독교는 부흥기에서 복음의 침체기로 전락하여 점점 사회속에서 왜소화되어 ‘이교도적’ 종파가 되고 있다. 현실의 교회는 이교도적 환경에 내몰리면서 교회의 생존을 고민하면서 어렵사리 서식하는 종교로 변모하고 있다. 지금은 교회 생존기요, 축소기에 접어들었다. 거기에 교회혐오가 증가하고, 탈교회가 일상이 되고 있는 시점이다. (이런 교회상황을 총칭하여 ‘이교도적 상황’이란 이름을 붙인다). 그렇게 볼 때, 지금의 기독교는 온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공공속에 실현할 그런 지형과 멀어진 형국에 처해 있다. 현실은 기독교 침체기요, 생존기인데, 교회성장기나 호황기에 걸맞는 구호를 내건다면 이것이 정직하고, 적실한 담론일까?

이제 하나님 나라를 근원적으로 사고할 때이다. 그리고 또 다른 신학 담론 생산이 필요한 때이다. 이제 ‘세상 속에 임하는 하나님 나라’에 앞서, 예수를 따르는 이들의 내면 질서와 성품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데 강조점을 두는 것이 필요하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의 인격과 삶에서 구현된 것이므로 예수 자신이 “몸소 하나님 나라”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본질은 예수의 가르침과 행동방식에 따라 살아가는 ‘본받음의 윤리’다. 이제 하나님 나라는 ‘근본적으로 새로운 윤리적 삶’이요, ‘그리스도인의 온전한 제자도의 삶’, 그리고 ‘세상과 구별되는 대안적 삶의 방식’이라는 삶의 양식의 전환과 제자도의 삶의 관점에서 말해야 한다. 복음서가 말하는 하나님나라는 부(재물)와 폭력으로 오염된 세상 질서에 길들여 살아가는 제자들에게 급진적 돌이킴을 요구하는 제자도 강령이다.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는 온 세상에 하나님의 통치가 자동기계장치처럼 임한다는 선포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 복음을 들은 제자들이 예수의 황금률을 실재처럼 살아가도록 요구하는 제자도 윤리의 독촉장이다.

예수가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따르겠다고 결단하는 제자들의 나라였다. 하나님 나라는 경제적, 소유적, 관계적 차원의 옛 질서를 청산하고 새로운 삶의 질서를 살기로 응답한 자들에게 속한 나라이다. 그 나라는 제자됨의 정체성을 가진 자들에게 개방된 나라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가 세상속에 임한다고 말하면서, 모든 공공의 영역에 쉽사리 임할 수 있는 것처럼, 선전하는 것은 공수표를 남발하는 것과 같다. 빌라도 앞에서 예수님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요 18:36)라고 확언했다.(물론 이 구절은 예수의 비정치적 태도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자주 오용되는 본문이다).

내가 우려하는 이유는 공공신학적으로 제시되는 하나님 나라 담론이 ‘문화적 기독교’의 지류로 변색될 위험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이런 분위기는 공공성 담론에서도 감지된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정치적 진보와 문화의 향상이라고 말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제자직의 나라>를 <시민직의 나라>로 바꿔치기한 것과 무엇이 다른가? 모든 그리스도인은 당연히 사회의 진보와 공공선을 추구해야 하고, 더 진보하고, 선한 정부를 세우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진보한, 선한 정부가 하나님 나라 그 ‘자체’는 아니다. 또한 공공성이 실현된 시민사회를 하나님 나라의 도래 ‘그것’이라고 할 수 없다. 다만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서 ‘부분적으로’, ‘표징’으로, 그리고 ‘유비적으로’ 구현된다고 말해야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도래를 위해 노력해야 하지만, 동시에 그 나라는 하나님의 선물이요, 은혜의 나라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는 ‘선취’(이미)와 ‘유보’(아직) 사이에 실존하는 나라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