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와 공공성 포럼 칼럼 #23 (2026.03.10)

 

보편주의의 충돌

 

최현종 교수(서울신학대학교, 종교사회학)

 

매번 논문 나부랭이(?)나, 아주 가끔은 설교만 작성하다가 칼럼을 쓰라고 하니, 무슨 말을 어떤 식으로 해야 할지 매우 난감했다. 그러다가 생각난 주제가 지난 학기 느헤미야 연구과정에서 강의하면서 나눈 ‘보편주의의 충돌’이었다.

‘보편주의’는 얼핏 듣기에는 매우 좋은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내가 ‘보편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다른 사람은 받아들이지 못할 때 생겨난다. 내가 ‘옳다고’, ‘좋다고’,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상대방이 동의하지 못하고, 서로 자신의 ‘옳은 것’, ‘좋은 것’, ‘바람직한 것’을 강요할 때, 보편주의의 충돌이 발생한다.

이러한 충돌은 다양한 층위에서 일어난다. 서구 세계의 인권 개념은 제 3세계와 다른데, 그러한 인권 개념을 강요할 때, ‘인권이 제국주의의 무기가 되고 있다’는 말이 생겨난다. 보수와 진보가 바람직하게 생각하는 사회상이 서로 다른데, 그 다른 상대방을 틀리다고 생각하기에, 서로를 깎아내리기에 여념이 없다. 이는 개인적 층위에서도 세대 간에, 남녀 간에, 계층 간에도 첨예하게 나타난다. 70대가 옳다고 생각하는 기준과 20대가 생각하는 기준, 남성이 바라보는 입장과 여성이 바라보는 입장, 1년에 3천만 원을 버는 사람과 1달에 3천만 원을 버는 사람의 생각하는 방식이 같을 수는 없다. 그런데, 자신의 기준과 입장, 방식을 보편화하는 데서 ‘보편주의의 충돌’이 생겨난다.

필자가 좋아하는 용어 중에 ‘생활세계’(독일어로는 Lebenswelt, 영어로는 lifeworld 이다)라는 말이 있다. 현상학자인 훗설(Edmund Husserel)이 만들고(?), 슛츠(Alfred Schütz)가 사회학에 적용한 용어이다. 흔히는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바탕이 되는 것들, 우리가 의심하지 않고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가리킨다. 즉, 우리가 ‘옳다고’, ‘좋다고’,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모두 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기준들, 즉 우리의 ‘생활세계’에 근거한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들의 ‘생활세계’가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서구’와 ‘제 3세계’, ‘보수’와 ‘진보’, ‘20대’와 ‘70대’, ‘남성’과 ‘여성’은 같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다른 생활세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다른 생활세계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생활세계를 강요할 때, ‘보편주의의 충돌’, 혹은 (하버마스와는 다른 의미로) ‘생활세계의 식민화’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면, 자기주장을 하지 말라는 것인가? 잘못된 것은 바로 잡아야 하지 않는가? ‘비인권적’ 작태, ‘일찍’/‘이찍’(아직도 나는 누가 일찍이고 이찍인지 매번 헷갈린다)의 한심한 모습들, 버릇없는 20대와 꽉 막힌 70대의 모습을 그냥 보고만 있으란 말인가?

수업 시간에 ‘보편주의의 충돌’이란 말이 처음 나온 것은 지구화된 사회의 다종교상황에서의 종교간 충돌과 관련해서였다. 그리고, 한국의 정치 상황, 나아가 기독교 안에서의 보수와 진보의 대립과 관련하여서 논의가 진전되었다. 물론 ‘옳은’ 입장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누가 그 옳음의 심판관이 될 것인가? 물론 신앙인에게 그 심판관은 하나님이다. 그런데 다른 생활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서로 ‘다른’ 하나님의 입장에서 ‘옳음’을 판단하고 있지는 않은지…

나의 ‘옳음’과 상대방의 ‘잘못됨’ 사이에는 대화란 있을 수 없다. 나는 ‘옳고’, 상대방은 ‘틀리기’ 때문이다. 그는 교정, 교육, 계몽(?)의 대상이지, 대화의 상대는 아니다.

지난 12월 한 학회에서 (보수) “개신교의 이슬람 혐오 담론”(원래 제목은 보수가 없었다가 나중에 발표자가 ‘보수’ 개신교에 한정된 담론으로 수정하였다)과 관련하여 한 발표가 있었다. 발표자는 어떻게 (보수) 개신교가 사실을 왜곡하고 있는지, 그리고 이슬람을 ‘문제적 대화자’로 인정할 때 그 문제를 바로잡을 수 있음을 역설하였다. 상당 부분 발표 내용에 공감하였지만, 필자는 ‘보수 개신교’에 대한 혐오 담론은 사실을 과장하거나 왜곡하고 있지는 않은지, 과연 진보적 입장에 있는 이들이, 보수 개신교를 ‘문제적 대화자’로 설정할 수 있는지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발표자는 쉽게 대답하지 못하였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지 잘 알 수는 없다. 나의 ‘옳음’을 포기해서도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제 3세계는 ‘다른’ 인권 개념을 갖고 있는지, 왜 그들은 ‘태극기 집회’/‘촛불 집회’에 그렇게 적극적인지? 왜 서로 다른 세대와 서로 다른 젠더는 자신들이 ‘손해’보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그 생활세계를 이해해 보려는 노력은 할 수 있다. 월터슈토프(Nicholas Woltorstorff)는 본래는 다른 맥락이지만, 이와 관련하여 적용해 볼 수 있는 3가지 원칙: 1) 공손함, 경청의 매너, 2) 법에 의해 제시된 규칙의 준수, 3) 이익 달성이 아닌 정의의 추구라는 원칙을 제시하기도 한다. ‘중도’가 옳은 길은 아니다. 그러나, ‘대화’는 필요하지 않을까?(그런데 누가 그 대화를 시작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