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와 공공성 포럼 칼럼 #51 (2026.09.22)

 

우리를 위험에 빠뜨리는 것

이수연 목사 (새맘교회)
 

우리를 위험에 빠뜨리는 것은 우리의 약점이 아니라 강점이다. 우리는 자신의 약점에 대해서는 조심할 줄 안다. 약점이 드러나지 않도록 잘 감추어 둔다. 하지만 자신의 강점에 대해서는 좀처럼 조심하는 법이 없다. 강점 앞에서는 자신을 의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의 강점은 종종 우리를 위험에 빠뜨리고, 스스로를 교정할 기회마저 막는 함정이 된다. 성서는 여러 논쟁의 장면에서 이 뜻밖의 함정을 보여준다.

욥의 친구들은 신앙에 꽤 자신이 있었다. 의롭게 살면 복을 받고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다는 원리는 그들에게 너무나 분명했다. 그러니 욥에게 이토록 끔찍한 고난이 닥쳤다면 욥이 무언가 잘못한 일이 있을 것이다. “죄 없는 사람이 망한 일이 있더냐? 정직한 사람이 멸망한 일이 있더냐?”(욥 4:7) 그들의 논리는 확고했다. 하지만 그 확고한 논리 안에는 이유 없이 고통받는 욥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요한복음 8장에서 예수는 유대 사람들에게 “너희가 나의 말에 머물러 있으면…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 8:31-32)하고 말씀하신다. 돌아온 대답은 의외였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아무에게도 종노릇한 일이 없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정체성은 그들의 자부심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 자부심이 주는 확신 때문에, 그들은 예수의 말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자신을 든든하게 세워주던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자부심이 오히려 진리로 가는 길을 막아서는 장벽이 되었다.

사도행전 17장에서 바울은 아레오바고에 서 있다. 아테네는 오랜 철학적 전통이 있는 도시로, 그곳 사람들은 새로운 사상을 듣고 토론하는 데 익숙했다. 에피쿠로스 철학자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논쟁을 벌였고, 그를 아레오바고로 데려가 설명을 요청했다. 하지만 지적 호기심이 진리를 향한 개방성으로 곧바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바울이 죽은 사람의 부활을 이야기하자, 그들은 비웃거나 판단을 유보하고 돌아섰다. 지성이라는 강점도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장벽이 될 수 있다.

깊은 신앙도, 자부심을 주는 정체성도, 높은 지성도 그 자체로는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그 강점이 단단한 자기 확신으로 굳어질 때이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 이런 자기 확신은 쉽게 발견된다. 사람들은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말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확신을 기준으로 사람들을 끊임없이 구분한다. 자꾸만 편을 나눈다.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을 적으로 대한다. 유튜브를 비롯한 온라인 공간은 자기확신을 부추긴다. 알고리즘은 오래 보고 자주 찾는 것을 반복해서 만나게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폭풍 가운데서 욥에게 나타나셨을 때, 욥과 친구들의 논쟁에 하나하나 답을 내려주시는 대신, 욥에게 “네가 무엇을 아느냐”는 질문을 쏟아 내신다. 인간의 확신으로는 다 헤아릴 수 없는 세계를 펼쳐 보이시면서 확신이 감당할 수 없는 자리가 있음을 보여주신다. 하나님은 답을 주시기보다 인간의 자기 확신을 흔드신다.

우리는 갈등이 심각한 시대를 살아간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확신을 버리는 일이 아니라 확신을 다루는 법이다. 나의 신앙이 타인을 밀어내고 있지는 않은가? 나의 정체성이 진리를 밀어내고 있지는 않은가? 나의 지성이 나를 가두고 있지는 않은가? 내가 옳다고 생각하면서도 내가 틀릴 가능성을 남겨 두고, 상대가 틀렸다고 생각하더라도 그의 말이 들어올 자리를 마련하는 것. 이것은 진리를 포기하는 태도가 아니다. 오히려 진리가 나의 확신보다 크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태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