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와 공공성 포럼 칼럼 #17 (2026.01.20)

 

내 발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박득훈 목사(기독연구원 느헤미야 초빙연구위원)

 

“어떤 사람이 누구인가를 알려면, 그의 말이 아니라 그의 발을 보면 된다.” 며칠 전 지인에게 전해들은 금언이다. 하나님나라의 공공성을 실현해가려는 모든 이들이 마음 깊이 새겨야 할 명제다. 요즘엔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거의 대부분 하나님나라 복음의 공공성을 수긍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 만큼 ‘하나님나라’나 ‘공공성’이란 표현은 보편성을 지닌 우아한 단어로 유통되고 있다. 하지만 그 구체적인 내용과 형태는 모호하기 짝이 없다. 정의하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달라지니 말이다. 저마다 하나님나라의 공공성을 추구한다는 데 그 지향점이 달라 난감하고 당혹스럽다. 이런 난제를 해결해보려는 취지에서 그 동안 다양한 정치철학과 신학적 윤리가 형성되어 온 것이다. 그런 다양성에 직면해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할 바가 바로 각 주장을 펼치는 사람들의 발을 살피는 것이다.

 

같은 단어, 다른 뜻

같은 단어를 사용해도 각자의 발이 어디 있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전혀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자유”에 대해 극명하게 갈리는 두 입장을 한 번 생각해 보자. 자유민주주의를 공공선이라고 확신하는 다양한 보수 세력이 열렬히 외치는 “자유”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기대했던 새로운 연합체의 “자유”는 완전히 다르다. 전자에게 자유는 각 개인이 사적 소유권에 침해를 받지 않고, 각종 규제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시장 경쟁을 통해 능력껏 부를 축적해 갈 수 있는 자유다. 당연히 그 자유는 각 자가 서 있는 출발선이 어디냐에 따라 그 가치와 효능이 완전히 달라진다. 그런 자유는 처음부터 불평등할 뿐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서 그 격차는 심화되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이들에게 ‘가난은 부자유가 아니다.’(Sir Keith Joseph, Equality, 1979). 따라서 공공성이란 그런 자유가 실현되는 사회를 함께 추구하는 성향이다.

그러나 청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와는 전혀 다른 의미의 자유가 실현될 사회를 전망했다. “계급과 계급 적대로 얼룩진 낡은 부르주아 사회 대신에, 우리는 각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연합체를 가지게 될 것이다.”(『공산당 선언』 중에서). 그들이 갈망한 사회는 각자가 자신의 자유를 마음껏 활용함에도 불구하고, 자유의 불평등으로 귀결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모두가 똑같이 자유를 누리는 새로운 연합체다. 그건 소수 자본가의 수중에 집중되어있던 주요 생산수단이 사회 전체적으로 소유되어 민주적으로 운영될 때 실현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런 연합체에서 자유란 모두가 실질적으로 동일한 출발선에서 자신의 삶을 실현해 가는 자유다. 누구도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인종이 다르다고, 성별이 다르다고, 장애가 있다고 해서 자신의 미래를 만들어갈 실질적 자유가 제한되는 일은 없다. 그들에겐 그런 연합체를 함께 추구하는 성향이 공공성이다.

 

발의 위치가 미치는 영향

왜 이렇게 똑같이 자유란 단어를 사용하면서도 서로 다른 것을 의미하게 될까? 그들의 발이 서있는 자리가 다르기 때문이다. 위 두 주장의 주요 주창자들은 모두 천재적인 사회적 엘리트였다. 하지만 그들의 발이 선 자리는 서로 달랐다. 전자의 이론적 대표주자격인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나 밀턴 프리드먼은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들로 그들의 발은 자본동맹세력 곁에 늘 있었다. 반면에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발은 일생동안 억압당하고 착취당하는 노동자들 사이에 있었다. 엥겔스는 상층자본가 집안의 아들이었지만,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노동자 출신 문맹 여성과 연인이 되었다. 마르크스도 유복하고 안정적인 중상류층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평생 이리 저리 쫓겨 다니다, 결국 국적도 없이 영국 런던에서 고독하고 초라한 죽음을 맞았다.

물론 앞서 이야기한 두 선택지는 오늘에 이르러 현실성이 없어 보인다. 후자가 추구했던 사회는 영영 실현될 수 없다는 판단이 만유인력 법칙보다도 더 자연스럽게 내면화된 세상이 되었으니 말이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둘 사이에 어딘가에 답이 있지 않을까, 찾고 있을 테다. 그럼에도 각 입장의 주창자들의 발이 어디에 있는가를 살피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여전히 치명적으로 중요하다. 이는 예수님께서 밝히 말씀하셨듯이, 여러 말과 글들 중에 어느 것이 진리인지 혹은 진리에 더 가까운지를 알기 위해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데 우리의 발을 두겠다는 결의가 먼저 서있어야 함 때문이다(요 7:17). 더 나아가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한다는 것은 지극히 작은 한 사람의 삶을 풍성하게 하는 데 자신의 삶을 거는 것임을 분명히 하셨다(요 5:1-18; 7:19-24; 마 25:31-46). 우리의 발이 기존 사회에서 억압과 고통을 겪는 사람들 곁에 있어야, 우리는 비로소 그 다양한 공공성의 형태 중 어떤 것이 더 하나님나라에 가까운지 분별할 수 있는 기본 여건을 갖추게 된다. 그 기반 위에서, 똑같이 사회적 약자 곁에 발을 둔 사람들의 입장 중 어느 것이 더 역사적·과학적 타당성을 갖추고 있는지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이런 작업 역시 결코 쉬운 건 아니지만 매우 생산적이고 고무적일 수 있다. 시간과 열정을 허망하게 낭비하지 않고 상호 설득하는 게 가능할 수 있다. 그게 불가능하더라도 건강한 긴장 관계 속에서 다양한 차원의 협업과 분업의 길을 열어갈 수 있다.

 

지금 우리의 발이 서 있어야 할 곳

오늘 하나님나라의 공공성을 추구하는 우리의 발이 서 있어야 할 곳은 어디일까? 다양한 영역과 차원에서 고통당하며 신음하고 있는 존재들 곁이다. 신음하는 노동자들(해고노동자, 각양 비정규직 노동자, 산업재해 피해 노동자와 유족들 등), 각종 차별을 겪는 사람들(인종, 성별 및 성정체성, 장애) 그리고 짓밟히는 생태계가 그 대표적 사례일 테다. 물론 우리들 각자는 다 나름대로의 제한된 역량과 조건 속에 있기에 그들 모두의 곁에 있을 수도 없거니와 똑같은 밀도와 강도로 그들 곁에 있을 순 없다. 각자 자기 한계를 끝까지 밀어붙이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그것이 각자에게 주어진 십자가라 생각한다. 주님의 은혜로 기꺼이 그 십자가를 짊어질 때, 우리는 길이 없다고 물러서지 않게 된다. 도리어 내가 길이 될 수 있길 바라면서 우리 삶을 던지게 된다. 지금 당장 포스트자본주의 세상을 실현할 수 없다 해도, 일단 기존 체제의 폭주와 그 파국을 멈추기 위해서라도 말이다(발터 벤야민의 “비상 브레이크”). 우리는 그 길 위에서 그 길을 먼저 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놀라운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