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와 공공성 포럼 칼럼 #21 (2026.02.24)

 

무너질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

 

최경환 (에라스무스 연구소)

 

요즘 ‘붕괴’라는 단어가 종종 눈에 들어온다. 얼마 전에 읽었던 일본의 환경철학자 시노하라 마사타케의 책 『인류세의 철학』에서는, 2011년 동일본대지진으로 폐허로 변한 마을에서 자연의 무서운 얼굴을 그제야 볼 수 있었다고 말한다. 마사타케는 이 낯선 감각을 ‘붕괴 감각’(sense of ruin)이라고 이름 붙였다. 우연히 듣게 된 마크툽이라는 가수의 노래 〈시작의 아이〉에는 이런 가사가 나온다. “너와 함께 바라본 붕괴하는 세상의 반짝임을, 그 찰나를 별의 시작이라고 부를 거야.” 새롭게 시작하는 이들을 응원하는 노래인 것 같지만, 마냥 밝고 경쾌하지만은 않다. “붕괴하는 세상의 반짝임”이라니.

잘 생각해 보면, 우리 주변 세계가 조금씩 붕괴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다. 어린 시절 동네 뒷산을 뛰어다니며 곤충채집을 하고, 개울가에서 물고기를 잡던 추억이 그리 멀지 않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에게 자연은 ‘가야만 볼 수 있는 곳’이 됐다. 주말에 캠핑을 가고, 일부러 국립공원을 찾아야 풀냄새를 맡을 수 있다. 어느새 우리는 자연을 우리 삶에서 밀어냈고, 그 대가로 돈을 주고 자연을 찾아가야 하는 처지가 됐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경계가 갑자기 무너지는 것을 경험했다. 우리가 자연을 통제하고 관리해 왔다고 믿었는데, 어느 날 자연이 문을 부수고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폭우로, 폭염으로, 산불로, 미세먼지로. 멀리 있는 자연이 아니라, 바로 내 주변을 둘러싼 자연이 삶의 조건을 파괴하고 있다는 느낌. 그것이 오늘 우리가 몸으로 겪고 있는 현실이다.

학자들은 우리가 사는 이 시대를 ‘인류세’(Anthropocene)라고 부른다. 원래 지질학 용어인데, 인간의 활동이 지구 자체를 바꿀 만큼 거대해진 시대를 가리킨다. 대기 중 탄소 농도, 플라스틱 폐기물, 핵실험의 흔적들. 지구는 이제 인간이 살아간 증거들을 지질층에 새기고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이런 데이터를 알아도 실감이 잘 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지구 평균 기온이 1.5도 올랐다는 뉴스를 들어도 ‘오늘은 선선하네’라고 생각한다. 기후 그래프는 가파르게 올라가는데, 내 일상은 오늘도 크게 다르지 않다. 데이터가 현실이 되기까지, 우리의 감각이 따라잡지 못한다. 과학이 숫자로 현실을 보여준다면, 인문학은 그 숫자를 사람의 삶으로 번역하는 작업을 한다. 폭우로 잠긴 골목길, 기록적인 폭염에 쓰러진 노인, 미세먼지 때문에 취소된 초등학교 운동회. 이런 일상의 파편들이 모여 인류세의 실제 얼굴이 된다.

인류세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은 다른 말로 붕괴에 대한 철학적 성찰이라고 할 수 있다. 자연의 침입으로 인간 삶의 조건이 무너질 때, 인간은 비로소 자연의 민낯을 보게 되고 그 가치와 존재를 다시 확인한다. 그렇게 보면 붕괴는 파괴와 절망으로만 이어지지 않는다. 새로운 인식의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 붕괴를 겪으면서 우리는 낯선 사물들과 새롭게 만나고, 그동안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에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게 된다. 인간은 무엇인가, 자연은 무엇인가, 사물은 무엇인가.

인간은 자신이 만든 세계가 무너질 때, 비로소 그 세계가 무엇에 의해 지탱되고 있었는지를 깨닫는다. 전기가 나가야 우리가 얼마나 전기에 의존하며 살았는지를 안다. 수도가 끊겨야 물이 얼마나 귀한지를 안다. 평소에는 너무나 당연해서 존재조차 의식하지 못했던 것들이, 사라지는 순간 비로소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인간이 얼마나 취약한 존재인지 깨닫게 된다. 우리는 그동안 더 강해지고, 더 튼튼해지고, 더 높이 올라야 한다고 배워왔다. 하지만 모든 사물은, 그리고 모든 인간은, 취약하기 때문에 오히려 존재할 수 있다. 취약하다는 것은 변할 수 있다는 것이고, 변할 수 있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것이다.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 것은 이미 죽은 것이다. 변화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것은 박물관 유리 케이스 속의 광물과 다르지 않다.

이것은 단순한 철학적 위안이 아니다. 취약함을 인정한다는 것은, 내가 혼자서는 존재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인간은 공기 없이, 물 없이, 흙 없이 살 수 없다. 자연에 의존하고, 다른 존재들과 얽혀 있다. 이 연결을 외면한 채 인공물 속에서 홀로 완결된 존재가 되려 한 것이, 결국 오늘날의 기후 위기를 불러왔다.

다시 마크툽의 〈시작의 아이〉로 돌아가면, 그 노랫말 속에는 붕괴가 결코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담겨 있다. 붕괴하는 세상의 그 찰나가 바로 새로운 시작일 수 있다는 것. 무너진 자리에서 새로운 인식이 싹트고, 폐허가 된 마을에 다시 풀이 자란다. 붕괴는 새로운 시작의 조건이 된다. 기후 위기 앞에서 우리는 자주 무력감을 느낀다. 나 하나가 텀블러를 들고 다닌다고 해서 북극의 빙하가 살아나지는 않는다. 그 무력감은 진짜다. 하지만 그 무력감을 정직하게 바라보는 것에서 시작할 수 있다. 지금 내가 발 딛고 있는 이 땅이, 내가 마시는 이 공기가, 오늘 내린 이 비가 단순한 배경이 아님을 느끼는 것. 그것이 인류세 시대를 살아가는 첫 번째 감수성이 아닐까. 무너지고 나서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그리고 그 눈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할 때, 무언가가 달라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