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와 공공성 포럼 칼럼 #20 (2026.02.10)

 

바른 이념보다 좋은 관계

 

윤영훈 교수(성결대학교)

 

“어떻게 너희들이 이럴 수가 있어!” 내가 재직하고 있는 학교의 성서학 교수님이 지난해 봄, 학생들 앞에서 외친 절규다. 과잠을 입고 탄핵 반대를 외치는 학생들 앞에서 지난 시절 자신의 ‘민주화’ 투쟁기를 나누며 간절히 해산을 호소했다. 이 학생들은 신학대학 활동을 주도하며 열심히 살던 착한(?) 아이들이다. 교수님의 호소에 학생들은 한마디 대꾸도 없다. 공적으로 토론과 의견을 나누자는 제안에도 침묵한다. 하지만 이내 익명 게시판에든 교수에 대한 험담이 가득했다.

지난 대선 20대 남성들은 김문수와 이준석 후보에게 각각 36.9%와 37.2%의 표를 주었다. 탄핵 이후 선거임에도 이재명 대통령은 고작 24%의 표만 얻었다. 30대 남성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심지어 10대들에게도 유사한 현상들이 발견된다. 젊은 남성들의 보수화 더 나아가 극우화는 우리 시대 중요한 화두가 되었다. 지난 역사 속에 이런 적이 있었나? 진보적 투쟁은 늘 20대가 주도했다. 그들은 늘 우리 편이란 생각은 일종의 디폴트였다. 최근 보수정당에서 선거 연령을 16세로 낮추자고 요청하는 것을 보니 참 아이러한 일이다. 우리는 이들을 이해하기 위해 어디서부터 접근해야 할까?

청년들의 불안한 삶은 우리 사회를 관통하는 난제가 되었다. 꿈, 열정, 비전, 도전 등의 미사여구는 어느새 체념, 포기, 생존, 탈출 등의 비관적 정서로 옮겨간다. 더 심각한 것은 청년들이 치열한 경쟁 가운데 차별과 착취의 피해자인 동시에 자신들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을 차별하고 착취하는 구조에 가담하는 가해자가 된다는 것이다. 이전에는 급격한 사회 변화에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와 상호연대가 두드러졌다. 이 시대 청년들은 철저하게 ‘각자도생’의 생존 역학에 초점을 맞춘다. 이들이 가장 분노하는 행위는 ‘민폐’이다. 낙오된 자들로 인해 자신까지 손해를 보게 되는 상황에 극도로 거부감을 느낀다.

이들이 강조하는 ‘공정’ 담론은 누구도 이 살벌한 경쟁에서 면제되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경쟁에서 승리한 자들의 부와 명예는 정당하며 칭송받는다. 그러나 그 과정을 생략하고 이득을 얻는 사례나 사회적 약자들에게 당연하게 주어지는 배려는 부당하다는 믿음이 자리한다. 허약해진 물적 조건 아래 더 치열한 경쟁에 내몰리다 보니, 맹목적 구별과 배제, 차별과 위계 전략을 통해 자신에게 닥친 위험을 끊임없이 외부화·타자화하는 메커니즘이 공고해졌다. 우리 모두가 만든 현실이고, 함께 풀어야 할 숙제다.

우리는 특정 이념을 공유한 사람들이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으로 이해하지만, 그 반대 경우도 많다. 자신들을 환대하고 포용하는 공동체에 소속되며 특정 이념과 가치관을 수용하는 경우이다. 세대 간의 단절과 비연속성에 주목하는 연구 결과에도 불구하고, 미국 남부 복음주의자들과 재침례파 공동체에서는 자신들의 ‘하위문화’ 가운데 그 정체성과 가치관을 다음 세대로 전달하고 소통하는 데에 매우 성공적이다. 여러 사회학적 연구 보고서는 그 이유가 세대 간 긴밀한 유대관계에서 기인하다고 분석한다.1)

한국에서 젊은이들의 보수화는 앞선 세대가 이들과 적절한 관계 맺기에 실패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현대 청년운동은 ‘옳은’ 이념과 가치를 중심으로 형성되는 것도 필요하지만, 우선 ‘좋은’ 관계성에 기초한 공동체를 통해 시대가 요청하는 가치를 생성하고 확산시켜 나갈 필요가 있다. 실상 기독교는 바른 신념보다 바른 관계를 토대로 존재한다. 그 관계의 신비와 친밀함이 고독한 오늘의 청년들을 위한 복음이다.

오늘날 ‘나 홀로 라이프’가 자유와 낭만을 누리는 합리적 생활방식처럼 포장하지만, 실제론 어쩔 수 없는 비자발적 요인이 더 크다. 현대인들은 특별한 자격을 갖추어야만 공동체에 소속될 수 있는 상황에서 ‘민폐’가 되기 싫고, 자존심에 상처받지 않기 위해 ‘나 홀로 삶’을 선택한다. 하지만 극단적 개인주의로 인한 고독 가운데 인간은 자신을 품어주고 자존감을 세워주는 공동체를 찾아 방황한다. 어쩌면 이들은 보수적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자신들이 안주할 수 있는 자리를 찾은 것은 아닌지. (신천지 등의 이단 종파의 확산도 유사한 면이 있다.)

젊은이들과의 소통에서 중요한 어른들의 태도는 ‘격려’이다. 청년들이 행한 결과물에 대한 생생한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이다. 청년들은 자신들의 결과물에 대한 평가와 충고에 지쳐있다. 하지만 자신이 만든 결과물에 대한 자기 확신도 약하다. 사소한 것에도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은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인간의 문화적 사명이다. 추상적이고 관습적인 칭찬이 아니라 철저히 ‘사실’(fact)에 근거한 구체적 격려와 의미 부여에서 청년들은 큰 효능감과 자존감을 느낀다. 그것이 어른들이 청년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도움이다.

드라마 <미생>(2014)과 <나의 아저씨>(2018)에서 어려운 환경을 견디며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주인공 청년들이 좋은 어른을 통해 성장하는 이야기는 청년들에게 큰 환호를 받았다. 이 드라마에서 어른들은 미숙한 청년을 가르치고 강요하지 않는다. 사생활에도 깊이 개입하지 않는다. 적절한 거리를 두고 지켜볼 뿐이다. 스스로 위기를 극복하는 오랜 경험의 품격을 보이며 그들을 바르게 이끌어 준다. 청년들은 그런 어른의 경륜을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라는 수식어로 ‘리스펙트’한다. 그럼에도 주인공이 너무나 힘들어하는 결정적 순간에, 그들은 어깨를 내주며 함께한다. 그 따뜻함이 관계의 핵심이다.

탄핵 반대 시위대 안에는 내가 평소에 아끼던 한 학생도 피켓을 들고 서 있었다. 충격이었다. 진지하게 학문을 탐구하고 모든 면에 성실해 각별하게 지도하던 학생이다. 그런데 “니가 왜 거기서 나와?” 서로 눈이 마주친 순간 그 학생은 시선을 돌렸고, 나도 도망치듯 지나쳤다. 한동안 그 학생과 어색했다. 하지만 나는 그 학생에게 접근해 조금씩 관계 회복을 위해 노력했다. 정치적 발언은 없었다. 그저 함께 밥 먹고 칭찬하고 격려했다. 몇 달 후 찰리 커크 추모를 빙자한 극우 시위가 있었다. 이전과 동일한 학생들이 행진하며 반정부 투쟁을 벌였다. 다행히도 그 학생은 자리에 없었다. 시간이 오래 걸리겠지만 다른 학생들과도 인내심을 가지고 대화할 것이다. 적어도 현시점에서 필요한 것은 바른 이념보다 좋은 관계이다.

 

 


  1. James Penning and Corwin Smidt, Evangelicalism: Next Generation (Grand Rapids: Baker, 2012). 95. 다음 책도 참조하라. Nancy Ammerman, Bible Believers: Fundamentalists in the Modern World (New Brunswick, Rutgers University Press, 19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