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교회와 공공성 포럼 칼럼 #40 (2026.07.07)
멈춰라, 폭주하는 성장 열차여!
3대 메가프로젝트에 저항하는 교회의 공공성
박득훈 목사(기독연구원 느헤미야 초빙연구위원)
대한민국은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도약한 유일한 나라다. 근대의 진보서사를 아름답게 빛내주는 주인공 역할을 멋지게 감당해 왔다 해도 과언이 아닐 테다. 우리들 모두에게 매력적인 서사가 아닐 수 없다. 이 서사를 계속 이어가길 현 대통령이 얼마나 갈망하고 있는지 명료하게 보여주는 장면이 지난 6월 29일 청와대에서 연출되었다. 대한민국 대도약 3대 메가프로젝트 국민보고회자리였다. 정부 부처의 정책발표와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2000조 규모의 초대형 첨단산업(반도체, 피지컬 AI, AI 데이터 센터) 투자계획 발표가 있었다. 그 후 이재용, 최태원 회장과 함께 무대에 오른 이재명 대통령은 사뭇 상기된 목소리로 ‘참으로 감격적 순간’이라며 ‘대한민국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됐다’고 선언했다. 그리곤 두 회장을 ‘국가의 영웅, 국민 영웅이라고 불러드리고 싶다,’며 그들에게 각각 90도 인사를 깍듯이 했다. 실용주의적 정치가 무엇인지를 몸으로 보여주었다.
자본주의 정신의 두 얼굴: 매력과 파괴성
좀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이는 막스 베버가 말한 자본주의 정신이 너무나 선명하게 그리고 극적으로 연출된 장면이다. 자본주의 정신이란 단지 경제적 축적에 대한 벌거벗은 탐욕이 아니다. 그 축적 자체를 인간과 사회의 가장 중요한 목적으로 설정하고 그 축적 노력을 미덕으로 칭송하는 윤리적 태도다. 자본과 그 동맹세력은 부의 축적을 최고의 가치로 정당화하는 기술을 잘 알고 있다. 그것이 국가 공동체의 밝은 미래를 열어가는 길이라는 데 누가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이번 프로젝트는 ‘지역균형발전’과 ‘지방소멸방지’란 도덕적 명분으로 포장되었다. 누가 그 정교하고 매혹적인 명분을 감히 비판할 수 있겠는가?
자본주의 정신엔 실로 우리를 홀리는 마술적 매력이 담겨 있다. 대부분의 대중이 이 화려한 진보의 열차에 탑승하려 환호할 때, 그 속도전의 그늘아래 노동자들이 겪어야 하는 소외·착취·억압은 가려진다. 그와 함께 파괴되어 기후위기라는 무서운 부메랑을 인류에게 던질 수밖에 없는 생태계의 괴로운 몸짓 역시 외면된다. 이를 가슴으로 공감하고 머리로 깊이 깨달은 사람들은 도태를 두려워하는 ‘개발이기주의’라는 좁은 프레임 속에 갇혀 침묵을 강요받는다.
하나님나라의 선포는 비상사태의 선언
이렇게 폭주하는 열차 앞에서, 오늘 한국교회의 공공성은 어떻게 구현되어야 하겠는가? 지난 번 내 칼럼에서 언급한 발터 벤야민을 다시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지배 권력이 말하는 ‘정상 상태’와 매끄러운 ‘역사의 연속성’이야말로 약자들에게는 매일이 재앙인 상태임을 직시했다. 현실의 모순이 극대화되는 위기의 순간에 ‘진정한 비상사태를 선언하는 것’이 깨어있는 역사가의 사명이라 했다. 그건 파멸을 향해 질주하는 문명의 열차에 온 힘을 다해 ‘비상 브레이크’를 밟는 행위다. 역사의 연속성을 끊어내 고통받아온 사람들을 구출하는 메시아적 실천이다.
내가 발터 벤야민의 역사철학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몇 년 전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에서 강의 중, 한 학생이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선포를 발터 벤야민의 역사철학의 관점에서 강렬하게 언급하며 도전했을 때였다. 그 후 그의 역사철학에 대해 좀 더 깊이 성찰하면서 그 연결고리가 너무나 확연해 졌다. 2천 년 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공적 사역을 시작하실 때, 당시 종교적인 지배 권력은 깊이 타락해 있었다. 그들이 통제하고 있던 지방의 안식일체제와 중앙의 성전체제는 가난한 자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면서도 그것을 ‘하나님이 정하신 거룩하고 정상적인 질서’로 포장했다. 그들이 주인 노릇하는 시간은 오래전부터 있었던 억압적인 지배자의 시간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었다.
예수님은 이 지루하고 반복적인 시간에 새로운 시간을 선포하셨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나라가 도래했다는 선포다. 당시 지배세력이 선전하고 유지하고 있던 시간의 연속성과 정상성을 뒤흔드신 것이다. 지배자의 억압적인 시간으로 전락한 안식일을 ‘사람을 살리는 시간’으로 되돌려 놓으셨다. 성전 뜰을 차지한 장사꾼들의 상을 뒤엎으신 성전 항쟁은, 종교권력의 폭주를 멈춰 세운 비상사태의 선언에 다름 아니었다.
한국교회 공공성: 비상 브레이크 밟기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는 어떠한가? 안타깝게도 현재의 대다수 한국교회는 자본의 폭주에 비상 브레이크를 걸기는커녕, 여전히 그 열차의 일등석에 탑승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지 않은가! 교회의 대형화와 재정적 팽창을 ‘하나님의 축복’과 ‘부흥’이라는 신앙의 언어로 정당화해 왔다. 세상의 성장주의 서사를 고스란히 교회 내부로 수용한 것이다. 그러니 어찌 자본의 지배에서 비롯된 사회적 불의와 생태적 재앙에 눈을 부릅뜨고 예언자적 목소리를 낼 수 있겠는가? 오히려 교회의 사적 이익과 기득권에 위협이 되는 일이라면 민감하게 그리고 강력하게 항변하는 데 몰두해 왔다. 그것도 교회의 공공성의 이름으로! 그런 모습은 예수께서 강도의 소굴이라 꾸짖으셨던 예루살렘 성전과 너무나 닮았다.
교회가 폭주하는 성장열차에 비상 브레이크를 거는 순간, 다방면에서 강력한 비난이 쏟아질 것이다. 그건 “대안 없는 낭만주의적 비판”이요, “지방 소멸의 위기를 외면하는 무책임한 태도”라고. 그러나 이는 역사와 정치경제 현실에 대한 무서운 왜곡이다. 언제나 지배세력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대안사회에 대한 상상력 자체를 거세하는 것이다. 노예사회와 봉건사회도 무너졌는데, 유독 자본주의 사회만 영원할 것이라고 믿는 것이 오히려 환상 아닌가? 지방경제를 살리는 길이 어떻게 하나 밖에 없겠는가? 물론 모두가 더불어 살아가며 생태계와 조화를 이루는 새로운 사회는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는다. 지난한 작업을 요청한다. 그러나 일단 폭주하는 열차는 멈춰 세워야한다. 그래야 새로운 궤도로 갈아타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에서 한국교회가 공공성을 회복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겠는가? 그건 대다수가 자본이 약속하는 매력적인 미래에 매료되어 있을 때, 그것이 사실은 노동과 자연을 짓밟는 야만의 시간이 연장되는 것임을 증언해야 한다. 억압받는 노동자와 파괴되어 가는 생태계를 끌어안고 ‘이것은 정상이 아니라 비상사태다!’라고 외쳐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한국교회는 ‘사람과 생태계를 살리는 하나님 나라의 시간’을 이 땅에 구현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부디 한국교회가 그렇게 공공성을 실천해갈 수 있길 진심으로 간구하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