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교회와 공공성 포럼 칼럼 #39 (2026.06.30)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시인처럼
권연경 교수(숭실대학교,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육체』라는 시에서 김현승은 신(神)을 “우리보다 먼저 오시어 시로써 지상을 윤택하게 하신 이”라 불렀다. 대놓고 신이라는 말한 건 아니니, 시 속의 “당신”이 반드시 기독교의 신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잘 알려진 것처럼 김현승은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그가 노래한 “당신”은 “나의 육체와 찔레나무의 그늘을 만드신” 이요, “내 눈물의 밤이슬과 / 내 이웃들의 머금은 미소와 / 저 슬픈 미망인들의 눈동자를 만드신” 존재다. 그러니 적어도 기독교인인 김현승의 마음속에서 이 초월적 시인은 그가 모든 존재의 근원으로 섬기던 신과 다르지 않다.
물론 시인에게 이 “당신”은 “보이지 않”는 존재다. 그럼에도 이 시를 쓰는 “나에게는 아름다운 시인”으로 다가온다. “당신의 아름다운 얼굴”에 대해 노래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얼굴은 “보이지 않는” 얼굴이다. 시인이 아는 “당신의 그 사랑과 / 당신의 그 슬픔”은 우리가 두 눈으로 세상을 보듯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신앙의 언어다. 시인은 그 얼굴을 본 적 없지만, 분명 그 아름다운 얼굴에 대해 말할 수 있다. 또 이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초월적 존재의 삶에 대해, 그의 사랑과 슬픔에 대해 말할 수 있다. 마치 “너희가 예수를 보지 못하였으나 믿고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기뻐한다”고 말했던 베드로전서의 한 구절을 생각나게 한다. 시인이 신앙의 눈으로 보는 아름다움은 우리가 주무를 수 있는 경험의 차원은 아니다. 하지만 시인은 “당신”의 존재와 그의 아름다움을 “본다.”
신앙의 눈은 육체적 감각을 넘어가는 통찰을 가져다줄 수 있다. 하지만 그 반대일 수도 있다. 경험 세계에서 살아가는 한, 감각으로 확인되지 않은 앎은 곧잘 무지와 뒤엉킨다. 시인은 분명 “당신의 아름다운 얼굴”을 말하지만, 일상에서 이 얼굴은 거듭 “보이지 않는” 것으로 확인된다. 시인에게 신은 “보이지 않으나 나에게는 아름다운” 그런 존재다. 신앙적 앎이 나름의 타당성을 가진 지식의 한 방식임은 분명하지만, 경험 세계의 울타리 속에서 이 지식은 기껏해야 “어렴풋”한 것으로 밖에는 인식되지 않는다. 여기서 신앙은 이러한 막연함의 그림자를 걷어내려는 몸짓이 아니다. 오히려 신앙의 중심에는 이런 모호함을 앞에 고개를 숙이는 겸허함이 있다. 바울의 말처럼, “지금은 우리가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게 본다” (고전 13:12). 곰곰이 생각하면 이는 우리 신앙의 한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필요로 하는 오늘의 현실 자체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앙은 더 분명히 알고 싶은 열정의 씨앗을 그 속에 품는다. “나는 알기 위하여 믿는다” (Credo ut intelligam). 이미 아는 것을 더 알고 싶다는 점에서 신앙은 일종의 역설이다. 그러나 통속적 비판가의 생각과 달리, 이는 텅 빈 공간에서 무언가를 그려내려는 노력은 아니다. 존재하지만 분명히 말할 수 없는 것, 아름답지만 역설적으로 보이지 않는 얼굴을 향한 관심이다. 그런 점에서 더 분명한 앎을 향한 신앙의 추구는 본질적으로 예술가의 노력과 통한다. 큰 돌 앞에서 선 예술가는 아무 형체도 없는 무의미한 바위 앞에 선 것이 아니다. 그는 그 무형의 돌 속에서 어떤 한 아름다운 얼굴을 본다. 그가 돌을 쪼는 손길 하나하나는 아무 것도 없는 데서 무어라도 건져보려는 막연한 몸짓이 아니라, 그가 분명히 “보았던” 아름다움을 구상화하려는 의도적 움직임이다. 조각가의 손길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가 이미 본 그 형상과 그 형상의 아름다움에 이끌린다.
김현승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는 “노래를 부”르는 자, 곧 시인이다. 물론 그 가 부르는 노래는 그가 알게 된 “보이지 않으나 나에게는 아름다운” 시인의 노래다. 하지만 이는 악보를 보며 따라 읊을 수 있는, 미리 준비된 노래가 아니다. 이 노래를 부르는 시인은 보이지 않으며, 따라서 그의 노래 역시 우리의 귓속으로 저절로 흘러 들어오는 가락이 아니다. 무형의 돌 속에서 아름다운 형상을 보고, 그 형상을 불러내기 위해 열심히 돌을 다듬는 조각가처럼, 시인 역시 “보이지 않는 당신의 아름다운 얼굴”이 들려주는 노래를 부지런히 찾아내야 한다.
그 보이지 않는 당신의 아름다운 얼굴에 / 나도 이제는 어렴풋이나마 육체를 입혀 / 어루만지듯 나의 노래를 부릅니다.
시인이 말을 다듬어 노래를 부르는 시작(詩作)은 보이지 않는 아름다운 얼굴에 “육체를 입”히는 작업이다. 물론 이는 빈 허공에 구조물을 설치하려는 허우적거림과 다르다. 마치 뼈대처럼, 아름다운 얼굴은 이미 거기에 존재한다. 시인은 신앙의 눈으로 보는 그 아름다움을 따라 언어로 모양을 입힌다. 아직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그의 형상화 작업은 “어렴풋이나마” 하는 수식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런 불완전성은 존재 자체의 막연함과는 다르다. 시인은 “어루만지듯 나의 노래를 부”른다. 신앙의 빛으로 만난 따스한 구체성을 느끼며 자기의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보이지는 않아도 아름다운 얼굴을 접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신앙의 작용이겠지만, 이 신앙의 작용은 그저 마음속 추상에 머물지 않는다. 김현승이 알게 된 “아름다운 얼굴”은 그의 삶을 떠받치는 세상 속에 여러 가지 모양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시인 자신의 “육체”에서, 또 “찔레나무의 그늘”에서 그는 “아름다운 시인”의 손길을 느낀다. 또한 이 손길은 “내 눈물의 밤이슬”과 “내 이웃들의 머금은 미소” 혹은 장례식에서 만난 “저 슬픈 미망인들의 눈동자”에서도 만날 수 있다. 물론 삶의 이런 작은 장면들이 아름다운 얼굴 그 자체는 아니다. 현명한 시인은 쉽사리 범신론적 소박함에 빠지지 않는다. 시인 자신의 일상과 “당신” 사이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는다. 지금 우리에게는 그 거리가 드리우는 깊은 그림자를 없애줄 강렬한 빛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시인은 자기 삶의 소소한 면면을 살피며 이런 일상적 “아름다움”을 만들어 낸 존재의 “흔적”을 본다. 아름다운 얼굴 그 자체는 아니지만, 그 아름다움을 생각게 하는 이 땅의 형상들로서, 시인이 보지 못하는 아름다움을 실존적으로 붙들게 하는 구체성의 지상적 모태다. 이 땅의 시인은 이러한 삶의 소박한 아름다움 앞에서 “우리보다 먼저 오시어 시로써 지상을 윤택케 하신 이”의 이름을 부르게 된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시인”의 뒤를 이어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에 “어렴풋이나마 육체를 입혀 / 어루만지듯 나의 노래를 부”른다.
아름다움을 느끼기 어려운 현실 속에서 신앙은 보이지 않은 아름다움을 보고 노래하는 시인을 닮았다. 이리저리 비틀린 세상을 향한 지적질도 실은 그 속에 살아 숨 쉬는 아름다움을 노래하려는 열망의 표현이다. ‘공공성’을 위한 우리의 안타까움과 열정 또한 모두 함께 보고 누려야 할 초월의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의 몸짓일 것이다. 약속하신 ‘고향’, ‘영원한 도시’를 ‘멀리서 보고 반가워하며’ 미완의 현재를 살았던 신앙의 선배들처럼(히 11:13), 아직은 흐릿한 아름다움을 소중히 어루만지며, 좀 더 맑은 언어와 몸짓으로 이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