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와 공공성 포럼 칼럼 #22 (2026.03.03)

 

지워진 이름을 부르는 용기, 우리가 꿈꾸는 하나님 나라

 

최은영 목사 (한국여신학자협의회 전 사무총장)

 

‘하나님 나라 구현을 꿈꾸는 신학자 모임’은 지난 정권의 계엄을 경험하며 한국교회의 개혁과 사회적 대전환을 고민하며 시작되었다. 최근 모임 구성원들(27명)이 중심이 되어 매주 돌아가며 칼럼을 쓰고 있다. 한국여신학자협의회 사무총장으로 섬기던 시절 초대받아 임기를 마친 후, 이 원고를 마주하며 묻게 된다.

우리는 과연 어떤 하나님 나라를 꿈꾸고 있는가?

오래전부터 여성들은 참고, 기다리고, 돌보고, 헌신해 왔다. 그 노동은 대개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수행되었고,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미화되었다. 예수께서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마 25:40)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한국교회 안에서 그 ‘작은 자’의 자리에 서 있던 이들 중 다수는 여성들이었다. 그들은 가장 많이 봉사했지만, 그 이름은 좀처럼 불리지 않았다. 교회는 여성의 헌신을 ‘믿음’이라 높이면서도, 그 믿음을 이끌어 온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구조’에 대해서는 충분히 알려 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여성들 중 많은 이들이 더 많은 의무와 책임을 감당하도록 요구받는 가운데, 마지못해 적응하거나 신앙을 떠나는 경우도 늘어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예언자적 상상력을 가지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사무엘상 2장에 기록된 한나의 기도와 누가복음 1장의 마리아 찬가는 중심이 아닌 주변의 목소리에서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선언이다. 빈궁하고 비천한 자를 높이시는 하나님은 기존의 권력 질서를 흔드신다. 이는 단지 약자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주변부를 통해 불의한 구조를 뒤집으시는 하나님을 보여준다. 적어도 내가 아는 여성신학은 가장 기댈 곳 없는 이들에게 동정이나 시혜가 아닌 동역을 요청하며, 주변을 중심으로 옮기려는 용기이자 실천이다.

지금 한국교회는 위태로운 경계 위에 서 있다. 권력과 자본에 기대어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모습은 역사의 어두운 순간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럼에도 박해와 출교, 심지어 순교를 각오하며 신앙을 지켜온 이들이 있었다는 것 또한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이름들은 주로 대표되는 남성 목회자와 신학자로 기록되어 있다. 그 곁에서 생계를 책임지고 공동체를 돌보며 신앙을 지탱해 온 여성과 가족들의 이름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3·1운동을 비롯한 독립운동의 역사 속에서도 여성들의 기여는 여전히 충분히 발굴되지 못한 채 ‘누구의 딸’, ‘누구의 아내’, ‘누구의 어머니’로 기억되는 현실과 맥을 같이한다.

성서 역시 다르지 않다. 엘리야와 엘리사, 베드로와 바울의 이름은 선명하지만, 그들을 먹이고, 재우고, 숨겨주고, 지지했던 여성들의 이름은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기적은 개인의 능력처럼 기록되지만, 실제로는 상호의존적 관계 속에서 일어났다. 이름 없이 등장하는 이들은 이름이 없어서가 아니라 불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단순한 호칭 이상의 일이다. 예수는 구체적이고도 대체불가능한 ‘천하보다 귀한 생명’(막 8:36)으로, ‘머리카락까지 세신 바 된’(마 10:30) 존재임을 알려주신다.

여성신학이 지워진 여성들의 이름을 부르며 보여준 시선은 더 넓은 주변부로 확장되어야 한다. 이주민, 장애인, 가난한 이의 눈으로 교회를 다시 보아야 한다.

지난 여름, 4대 종단 여성 성직자와 종교인들이 고공에서 부당해고 철회를 외치던 한국옵티칼 구미공장의 박정혜 노동자를 찾아가 기도회를 드린 적이 있다. 그는 600일에 이르는 고공농성 끝에 내려왔지만,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이것은 한 개인을 넘어 부당해고라는 구조적 폭력을 그치게 하려는 노력으로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 나아가, 세월호와 이태원 사건을 비롯해 쿠팡 등 노동현장에서의 억울한 죽음, 생태계를 해치는 이기적 행정논리 등에 맞서 함께 연대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보며 하나님 나라를 생각한다.

지워진 이름을 다시 부르는 공동체, 불리지 않았던 이름을 존중하는 공동체가 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꿈꾸는 하나님 나라는 거창한 권력의 이름이 아니라, 작은 이름 하나를 끝까지 기억하는 데서 시작된다. 그 이름을 부르는 용기에서 교회의 개혁도 시작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