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와 공공성 포럼 칼럼 #27 (2026.04.05)

 

문턱을 딛고 서자

 

이수연 (새맘교회 담임목사)

 

어린 시절, 방을 드나들 때마다 어른들께 자주 듣던 꾸지람이 있었다. “문턱을 밟고 서 있지 마라.” 왜 그래야 하는지 분명한 이유를 들은 기억은 없지만, 문턱을 밟고 서 있으면 왠지 ‘험한 것’이 스며들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문턱은 머물러서는 안 되는 금기의 선, 그저 재빨리 넘어가야 할 경계로 나에게 남아 있었다. 사실 우리네 전승에서 문턱은 이승과 저승을 가르는 경계이자 집안을 지키는 가택신의 목이라 여겨졌기에, 그곳을 밟는 행위는 복을 쫓고 화를 부르는 불길한 짓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뒤, 켈트 영성가 에스더 드 발(Esther de Waal)의 안내를 따라 다시 만난 문턱은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최근 번역된 그녀의 저서 『경계를 살다』는 “문턱은 거룩한 곳이다”라는 옛 지혜를 인용하며 글을 시작한다. 켈트 전통에서 문턱은 피해야 할 경계가 아니라, 거룩하고 의도적인 ‘멈춤’의 장소이다.

어쩌면 우리는 오래된 문턱의 금기 때문인지, 너무 쉽게 한쪽 공간으로 자신을 밀어 넣는다. 이곳과 저곳 사이, 그 사이에 머무는 법을 잘 모른다. 성(聖)과 속(俗)을 나누는 데 익숙하다. 교회를 ‘성의 공간’이라 여기고, 그 안에 있을 때 느끼는 영적 충만을 신앙의 전부처럼 붙든다. 그리고 그 문을 나서는 순간, 곧바로 교회 문 밖을 ‘속의 공간’으로 인식한다. 치열한 삶의 현장에 들어서면서 신앙과 분리된 듯한 소외와 절망 속에 놓이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완전한 ‘성의 공간’에 속할 수도, 완전한 ‘속의 공간’에 머물 수 없다. 어찌 보면 우리가 서 있는 자리는 언제나 문턱이다. 우리가 있는 곳이 문턱임을 깨달을 때 비로소 두 세계를 잇는 신비에 닿게 될 것이다. 문턱은 두 세계를 갈라놓는 벽이 아니라, 서로를 향해 열려 있는 자리, 성과 속이 서로를 껴안는 화해의 지점이다. 문턱에 머문다는 것은 성의 자만도, 속의 절망도 멀리한 채 그 경계의 긴장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일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깨닫는다. 속의 고단함은 성의 자비로 읽어야 할 성사(聖事)이고, 속의 처절함은 성의 위로 없이는 완성될 수 없는 성사임을 말이다. 켈트인들이 모든 일상의 순간마다 기도를 멈추지 않았던 것은, 그들이 바로 그 일상을 문턱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3년째 이어지고 있는 세종호텔 해고 노동자들과의 연대 현장에서, 나는 그 ‘문턱’의 실체를 목격한다. 자본의 논리가 지배하는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서 힘찬 팔뚝질로 복직을 외치는 그 자리는 겉으로는 세상의 ‘속된’ 현장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곳은 내가 이제껏 경험한 몇 안 되는 성스러운 공간이다. 투쟁의 자리는 어느 순간 문턱으로 변모한다. 그곳은 억울한 고단함이 하늘의 자비와 맞닿는 자리이며, 처절한 외침이 신성한 위로를 입는 자리다. 매주 화요일 저녁, 세종호텔 앞 거리기도회에서 성찬을 나눌 때 밥그릇을 빼앗긴 이들에게 하늘의 양식이 채워지는 순간을 목격한다.

나는 교회가 스스로를 닫힌 ‘성의 공간’으로 규정하지 않기를 바란다. 교회는 세상과 분리된 솟은 요새가 아니라, 세상의 모든 신음이 흘러 들어오고 하늘의 평안이 다시 흘러 나가는 낮은 문턱이어야 한다. 고통을 외면한 채 드려지는 경건은, 스스로를 향해 맴도는 공허한 음성에 불과하다. 세상의 모든 공간과 맞닿는 자리에, 교회는 하늘과 땅이 맞닿는 문턱을 놓아 딛고 서야 한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일상의 현장을 거룩한 자리로 경험하게 될 것이다.

서둘러 문턱을 넘어 안으로 숨어들지 말자. 밟지 말라던 그 문턱 위에 발바닥을 단단히 딛고 서보자. 문턱을 딛는 그 행위야말로 화를 쫓고 복을 부르는 거룩한 저항이 될 것이다. 교회가 문턱이 될 때 비로소 세상의 신음과 하늘의 응답이 만나는 자리에 우리가 서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