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교회와 공공성 포럼 칼럼 #33 (2026.05.19)
분노는 왜 가장 약한 곳을 향하는가
손주환 목사(걷는교회,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사람들을 행복하게 미소짓고 들뜨게 할 어린이날, 광주 첨단지구의 밤거리에서 참혹한 비극이 일어났다. 타인의 생명을 구하는 응급구조사와 간호사를 꿈꾸던, 누구보다 따듯한 마음을 가졌던 17세 여고생이 일면식도 없는 20대 남성의 흉기에 찔려 허망하게 우리 곁을 떠났다. 수사 결과 드러난 가해자의 행적은 우리를 더 참담하게 했다. 그는 자신이 교제를 요구하던 여성을 찾아가 해치려다 실패하자, 그 뒤틀린 분노와 살의를 길을 가던 무고한 여고생에게 돌렸다.
“사는 게 재미없어서”라는 가해자의 비겁한 변명 뒤에는, 자신의 좌절감을 가장 만만하고 힘없는 대상에게 투사하는 끔찍한 폭력의 민낯이 숨어 있다. 우리는 흔히 이런 사건을 ‘묻지마 범죄’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단어는 사건의 본질을 교묘하게 은폐한다. 가해자의 폭력은 결코 그냥 랜덤이 아니었다. 자신보다 강하거나 위협적인 대상 앞에서는 억눌려 있던 분노가, 방어할 힘이 없는 미성년 여성 앞에서는 거침없이 폭발했다. 이는 묻지마 범죄가 아니라, 철저하게 약자를 조준한 ‘화풀이 범죄’이자 ‘약자 표적 범죄’이다. 이 참혹한 기시감은 정확히 10년 전, 우리 사회를 거대한 충격에 빠뜨렸던 강남역 살인사건을 환기한다. 수많은 남성을 그냥 보내고 오직 여성만을 사냥하듯 표적 삼았던 당시의 비극처럼, 뒤틀린 분노가 가장 취약한 고리를 향해 폭발하는 잔혹한 메커니즘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폭력은 물과 같아서, 통제되지 않으면 언제나 가장 낮고 취약한 곳을 향해 흐르기 마련이다.
구약성서 사사기 19장에는 이 사건과 본질상 겹쳐 보이는 참극이 기록되어 있다. 에브라임 산지의 한 레위사람이 첩을 데리고 기브아에 머물렀을 때, 동네의 불량배들이 집을 에워싸고 폭력을 예고한다.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레위 사람과 집주인이 선택한 해결책은 경악스럽다. 그들은 자신들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구성원 중 가장 연약한 여성을 문밖으로 밀어내어 불량배들에게 던져주었다. 불량배들 역시 애초의 대상은 잊은 채, 내던져진 약자인 여성에게 밤새도록 끔찍한 폭력을 쏟아부어 결국 죽음에 이르게 했다. 이 사건은 성서가 동성애에 대해 죄악시하는 구절로 알려져있지만, 실상은 약자를 향한 폭력과 시대적 타락상에 대한 고발이 본질이다. 기브아의 폭도들이나 오늘날의 가해자나, 맹목적인 폭력성을 해소하기 위해 가장 저항하기 힘든 희생양을 찾았다는 점에서 그 본질은 명확히 일치한다. 비겁한 강자들의 분노는 늘 약한 쪽으로 향했고, 약자는 그것을 고스란히 받아내며 억울하게 사라져갔다.
기브아의 참극에서 더욱 소름 돋는 장면은 폭력 그 자체보다 폭력 이후에 나타나는 ‘무감각’이다. 밤새 고통받던 여성이 문지방에 손을 얹은 채 숨을 거두었음에도, 레위사람은 아침에 일어나 “일어나라, 우리가 떠나가자”며 무심하게 말한다. 이 섬뜩한 무감각은 2026년 광주에서도 똑같이 반복되었다. 살인사건의 가해자는 끔찍한 범행 직후 무인 빨래방에서 태연하게 피 묻은 옷을 세탁하고 전자담배를 충전했다. 일말의 죄책감도 찾아볼 수 없는 극도의 냉혹함이다.
나아가, 피해 학생의 친구들이 교지편집부 명의로 낸 성명문에서 절규하듯, 세상의 무관심 역시 또 다른 폭력이다. 한 소녀의 숭고한 꿈이 무참히 짓밟혔음에도 세상의 관심은 너무나 빠르게 식어가고 있다. 다른 자극적인 뉴스들, 정치인들의 말 잔치 뉴스들에 밀려 이 거대한 비극은 그저 ‘재수가 없어서’나 ‘안타까운 사건’ 정도로 치부되며 묻힐 위기에 처해 있다. 이 사회의 침묵과 망각이야말로, 피 흘리며 쓰러진 여성을 바라보고도 자기 갈 길을 재촉하려 했던 레위사람의 무감각과 무엇이 다른가.
사사기는 이 끔찍한 시대상을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는 탄식으로 평가한다. 이는 물리적인 통치자의 부재라는 문자적 해석을 넘어, 각자도생의 사회 속에서 공동체를 지탱하는 생명의 가치와 약자를 향한 최소한의 보호망이 완전히 붕괴한 도덕적 무정부 상태를 고발한 것으로 재해석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의 사법 체계와 사회 안전망이 더 정교하고 복잡해졌지만, 그 제도의 경향성이 기브아의 시대보다 낫다고 자부할 수 있는가? 여성과 약자들이 누군가의 빗나간 분노를 받아내는 소모품으로 전락할 때, 이를 방관한다면 우리는 폭도들이나 레위사람과 다를 바 없는 공범이라는 말이 마냥 과장된 말인가?
비극의 한복판에 남겨진 광주 경신여고 학생들은 성명문을 통해 “여러분의 공유 한 번이 또 다른 무고한 희생을 막는 유일한 힘”이라며, 가해자가 합당한 죗값을 치를 때까지 연대해 달라고 호소했다. 열일곱 살 아이들이 어른들에게 정의를 애원하고 있다. 이 역설 앞에서 우리는 부끄러워야 한다. 사사기의 시대가 왕이 없어 각자 소견대로 행했다면, 오늘 우리의 시대는 법이 있어도 약자의 죽음 앞에서 각자 갈 길을 재촉한다. 묻지마 범죄라는 말로 구조를 지우고, 자극적인 뉴스로 기억을 덮고, 며칠의 공분으로 책임을 대신하는 한, 우리 사회는 비겁한 분노의 공모자로 남는다.
생명을 살리고 싶었던 한 소녀가 죽었다. 그 죽음이 잊히는 속도만큼, 다음 희생자는 가까워진다. 이제 교회와 시민 사회,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모든 이가 파수꾼이 되어야 한다. 망각은 방관이고, 방관은 공범이다. 약자가 누군가의 뒤틀린 분노를 홀로 감당하지 않는 세상은, 분노하고 기억하고 연대하는 사람들의 수만큼 가까워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