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와 공공성 포럼 칼럼 #35 (2026.06.02)

 

그리스도교의 길: 전통의 재발견인가 현대성인가?

김동춘 교수(현대기독연구원,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한국교회가 봉착한 문제를 풀어나갈 탈출구와 해법으로 대체로 (1). 전통의 길, (2). 도덕성의 길, (3). 현대성의 길을 해답으로 내놓고 있다.

 

  1. 전통의 길 – 옛 신앙(old faith)의 회복

한국교회의 방향을 제시할 때, 가장 일반적이고 통념적인 대답은 기도와 말씀의 회복이다. 그래서 설교단의 회복, 강단의 회복이 급선무라고 말한다. 그런데 기도운동, 말씀운동, 설교의 회복을 외치는 이들이 도달하는 종착점이란 것이 결국에 가서 주일성수, 예배의 회복, 그리고 부흥운동이라고 말할 때, 이것이 얼마나 식상하고 게으른 대답인지 모른다.

한국교회의 해답을 옛 신앙의 ‘회복’에 있다고 말할 때, 떠오르는 것이 있다. 언제인가부터 교회 감소 추세가 눈에 띄게 일어났을 때, 자주 등장했던 구호는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평양 대부흥운동으로 돌아가자였다. 한 때 교회회복의 유행가처럼 되풀이되었던 구호가 Again 1907이었다. 그런데 왠일인지 지금은 이런 목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는다. 추측컨대 탈교회와 가나안 성도가 워낙 일상이 되고 있어, 예배의 회복이나 긴급성이 들려올 기력조차 잃어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수년 전 기독교 출판계에 1세기 교회 재발견이 붐을 이룬적이 있었다. ‘1세기 교회 그리스도인..’, ‘1세기 교회의 예배..’, ‘초대교회의 예배와 전도’ 등이 그것이다. 물론 초대교회를 재발견하는 일은 갈 바를 잃은 현대교회에게 근원적 기독교의 모습을 제공함으로써 “원형의 교회”를 더듬어가려는, 더없이 귀한 작업이다. 그런데 교회 원형을 찾는 이런 작업이 지난날 회자되었던 기도와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옛신앙의 회복운동의 또 다른 재현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초대교회의 재발견에서 교회의 해법을 찾는 이것은 옛 신앙과 옛 전통으로 우리를 귀속시켜버리는 것은 아닐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작업은 옛신앙과 전통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세속화와 다원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21세기 신앙인들에게 어떻게 그리스도교 신앙을 새롭게 이해하고, 재구성할 것인지 고민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

 

  1. 도덕성의 길 – 도덕성 회복만이 해답인가?

교회개혁에 열정적인 이들은 교회의 탈출구를 도덕 갱신과 성결운동에서 찾는다. 물론 전혀 틀린 접근은 아니다. 구원의 확신은 강조하지만, 행위가 뒤따르지 않는 믿음, 예배는 강조하나 삶이 결핍된 신앙, 구원신앙은 확실하지만, 신앙실천이 부재한 기독교 현실을 생각하면, 도덕성 회복과 성화의 삶을 강조해야 할 이유는 분명하다.

어떤 이들은 지금 청년들과 젊은 세대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는 목회자가 윤리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교회 쇠퇴와 탈교회의 원인을 단지 목회자의 도덕적 타락이라고 진단하는 것은 일부는 맞지만, 일부는 피상적인 관찰이다. 그렇다면 도덕 회복이 이루어지면, 교회 부흥과 신앙회복도 일어날 것인가?. 분명한 것은 도덕성 회복은 교회가 추구해야 할 당위이지, 결과를 기대하는 목표가 아니다.

교회의 쇠퇴의 원인은 도덕적 부패에 있다는, 이런 해답은 얼른 들으면 상당히 공감을 얻을만한 정답처럼 보이지만, 이 또한 아주 간편한 방식의 길찾기에 다름없다. 기독교의 대안을 찾는다는 교계 언론이나 조사기관은 거의 예외없이 이런 설문조사 몇 마디에 의존하여 풀어가려고 한다. 한국교회의 문제점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렇게 질문하면, 대부분 목회자의 타락과 기독교인의 부도덕이라는 대답을 내놓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런 쉬운 질문과 뻔한 대답으로는 제대로 된 해답을 찾기 어렵다.

 

캐나다 신학자 더글라스 홀은 『그리스도교를 다시 묻다』에서 오늘의 기독교의 문제는 도덕으로 축소된 신앙에 있다고 진단한다. 언젠가부터 그리스도교는 곧 도덕체계라는 공식이 자리잡게 되면서, 종교는 도덕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기독교 신앙의 목표는 오늘날 모범적인 인간이 되는 차원으로 전락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신앙의 실재를 잃어버렸다고 진단한다.

 

“진보적이고 온건한 그리스도교인들은 복음주의, 혹은 근본주의적 흐름이 부끄럽다는 이유로 이 사회의 주요 교육기관과 제도들에게 자신들이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하지 않는다(이 말은 진보적인 그리스도인들은 근본주의나 복음주의 신앙의 투박함과 단순성을 지적으로 열등하고 뭔가 세련되지 못한 신앙이라 치부하기 때문에 그들이 기독교적 신앙의 언어로 용감하게 발언하거나 행동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진보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주의의 한 특징인 행동주의(activism)가 부족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급진적 변혁을 말하는 신앙의 언어는 본래 우리가 만족스러워하던, 그리스도교 세계의 사회, 문화와 잘 들어맞지 않는다. 그런데 저 세계(기독교세계)가 완전히 몰락해가는 이 시점에서 신앙의 언어를 근본주의자, 극단적인 복음주의자들, 신앙을 특정 도덕과 동일시하는 이들만이 점유해 쓰고 있다는 것은 심히 우려할만한 일이다(『그리스도교를 다시 묻다』 197p).

 

진보적인 신학자인 더글라스 홀은 매우 역설적으로 캐나다같은 포스트크리스텐덤 사회에서 기독교가 지나치게 문화적으로 얌전하고 고분고분한 “도덕적 인간”이나 “교양인”이 되는 것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사실 이런 목소리는 보수 근본주의 신학자에게나 나올법한 이야기다). 물론 홀의 진단은 한국교회 상황에서는 이중적 맥락을 지닌다. 한국교회에게는 오히려 도덕신앙과 윤리신앙이 절대적으로 요구되고 있다. 그러나 한국기독교의 길은 진보적인 신앙이고, 열린 신앙과 열린 기독교라야 한다고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더글라스 홀과 같은 진보 신학자의 지적에 당황할 수도 있다.

그렇다. 기독교의 본질은 사회질서에 편안하게 적응하며 살아가는 모범적인 인간이 되는데만 있는 건 아니지 않는가? 이 얼마나 중요한 통찰인가? 인문주의적 인간이 되는 것, 이것은 분명 매력적인 것이지만, 그것이 그리스도인됨의 최종적인 목표는 아니지 않는가?

그런데 “기독교는 도덕이 아니다”는 말은 보수 기독교가 슬쩍 도용해서 취할 말이 아니다. 보수기독교는 (특히 정치적 차원에서) 사회적 약자편에 서거나 그들의 고통에 연대하는 실천에 전혀 무관심해 왔다. 그랬던 그들이 홀의 논지를 끌어다가 도덕무용론, 즉, 도덕은 사회의 개선이나 구원 얻는데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사용한다면, 그야말로 기만적인 논리다.

 

더구나 기독교는 도덕이 아니다는 홀의 지적은 신앙인에게 응당 요구되는 이웃사랑의 덕목이 불필요하다는 뜻이 아니다. 그가 겨냥하는 도덕적 기독교란 시민종교로 전락된 서구기독교의 모습이며, 한 마디로 문화종교로서의 기독교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1. 현대성의 길 – 기독교신앙의 재구성

교회가 어려워진 이유는 교회가 교회 밖의 외부자들에게 욕을 먹기 때문만은 아니다. 교회의 어려움은 오히려 기독교가 교회 내부자들에게 비아냥과 조롱거리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지금 기독교의 문제는 전통신앙의 상실이나 도덕성의 결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기독교 자체에 대한, 기독교 신앙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기독교를 절대적인 것으로 무한 긍정했던 그들이 기독교를 (계시나 복음이 아닌) “종교”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들의 내면에서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 내면에서 제기되는 질문에는 지금의 기독교의 논리, 사유방식, 얼개들이 뭔가 자신들에게 확신있고, 설득력있게 설명되고 있지 않는다는 느낌을 갖기 시작한 것 같다. 오늘날 상당수의 신자들은 교회에서 들려주는 설교와 가르침이 뭔가 이 시대의 문화와 맞지 않는 다는 불편함을 느끼고 있다.

 

따라서 울리히 백 등이 제기한 성찰적 근대화의 담론처럼, 기독교 신앙에 대한 현대성의 방향, 신앙의 모더니티작업에 대해 한 번 더 주의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오늘의 기독교의 길은 여전히 신화적 사고에 갇혀 있고, 거의 주술신앙에 가까운 전통종교에서 계몽적 기독교’, 즉 상식과 타당성을 갖춘 합리성을 담보한 기독교를 요청하고 있다. 이제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할 때가 도래했다. 그러니 옛 신앙을 과감히 해체하고 새로운 신앙으로 갈아타야 할 때가 왔다. 그러나 이것만이 기독교의 길에 대한 해답이 될 것인가? 혹시 이것은 이미 사회학자들이 성찰적 근대화 담론에서 이미 고민한 바 있는, 근대성에 대한 신화와 맹신을 극복하려는 그들의 문제의식을 우리는 한치도 내다보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유신진화론을 손쉽게 이단으로 판정하는 기독교성결교단의 근본주의적인 행보를 목도할 때면, 저렇게 답답하기 그지 없고 폭력적인 신앙의 옷을 당장이라도 벗어 던지고 도망가는 길밖에 없는 건 아닌가 하는 것이 우리의 심정이다. 그렇다고 이 거추장스러운 신앙의 옷을 함부로 벗어 던지고 도망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오호라 누가 이 신앙의 곤고함에서 우리를 건져낼 것인가?

우리 기독교의 방향은 한 편으로는 생각없는 맹신을 신앙이라 자처하는 저급한 신앙의식과 신앙사고의 독단의 잠에서 깨어나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독교 신앙의 원천과 본질에 대한 갈 바를 잃은 회의주의를 극복하는 것에 해답이 있지 않을까? 과도한 자기 확신에 갇혀 있는 근본주의 신앙을 향해서는 독단의 잠에 빠져 있는 잠든 이성을 일깨워야 한다면, 기독교 신앙을 현대성에 발맞추려 하다가 믿음의 원천과 토대까지 잃어버린 채, 방황하는 자유주의적 기독교에게는 회의주의라는 깊은 나락에서 건져 내어 신앙의 계시적 차원을 재발견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