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교회와 공공성 포럼 칼럼 #42 (2026.07.21)
네 안의 그리스도
백소영 교수(강남대학교)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우리의 주님, 맏이가 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기도문의 일부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뜻이 저 피안의 천국만이 아니라, 이 땅의 사회질서 안에서도 작동되는 것을 꿈꾸는 ‘대안적(alternative)’ 실천자들이다. 그리고 이를 개인의 생애사 안에서 이루는 것보다 공동체 안에서 이루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다.
왜 하필 공동체여야 할까? 신학자 본회퍼가 『성도의 공동생활』에서 매우 적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우리 자신의 마음속에 계시는 그리스도는 형제의 말씀 속에 계신 그리스도보다 약합니다. 우리 마음속에 계시는 그리스도는 불확실하지만, 형제의 말씀 속에 계시는 그리스도는 확실합니다.” 그도 나도 모두 그리스도인인데 내 안의 그리스도가 더 약하고 불확실할 까닭은 무엇인가? 본회퍼의 이 주장은 타자 안에 성육한 그리스도의 말씀이 내용적으로 언제나 옳고 확실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인간 안에 성육한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는 나나 너나 인성과 연륜, 지식과 수행으로 이해되는 존재가 아니다. 그분이 자신을 드러내셔야 비로소 우리는 그분의 뜻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이 가진 자기 폐쇄성, 그러니까 나의 욕망, 교만, 자기 확신 등으로 인해 불완전하게 드러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우리의 생애사와 역사에서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말씀’이 약하고 불확실하게 드러나는 이유는 사람에게 있다.
나만 그러한 것이 아니다. 실은 너도 그러하다. 다만 성육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전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보편이라면, 그러니까 누구도, 어떤 생명도 배제하지 않는 창조적 포괄성의 말씀이라면, 내가 놓친 말씀을 네 안의 그리스도가 담고 있을 수 있다. 물론 네가 놓친 말씀을 내 안의 그리스도가 담고 있을 수 있음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이때 내가 받은 말씀이 ‘하나님의 뜻’에 더 가깝다고, 아니 그러하다고 단언하는 자세로는 서로가 놓친 하나님의 보편적 말씀을 받기 어렵다. 하여 실은 나도, 너도 형제자매의 말에서 드러나는 그리스도를, 특히나 내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지점이라면 더욱 ‘더 강하고 더 확실하다’는 겸손과 열림의 개방성으로 접근해야 한다. 그러니 어떤 신자들의 공동체라도 한 사람이 받은 말씀, 그 안의 그리스도만이 선포되고 전달된다면 그 말씀은 ‘약하고 불확실할’ 수밖에 없다.
평소 공동체 안에서 이웃을 대할 때 명심하는 구절이었는데, 최근 몇 개월간 신문보도와 SNS를 통해 접하게 된 한 기독교 대안공동체의 문제를 따라가면서 유난히 본회퍼의 이 구절이 떠올랐다. 2007년에 설립된 개신교 기반 비제도권 대안공동체라 한다. 개인 구원과 기복적 번영신학에 사로잡힌 한국의 주류 교회들을 보면서, ‘아 저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데’ 싶어 대안을 추구하면서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공동체적 실험을 시작했다고 한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자 한 사람도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는 성서의 말씀을 붙잡고 공동체의 대소사를 결정할 때 모두의 의견을 다 듣고 서로가 완전히 합의에 이를 때까지 대화하고 질문, 토론하는 ‘숙의 민주주의’를 공동체의 의결 방식으로 택해왔단다. 한국교회 가부장적 리더십의 대안으로 ‘상호 목회’와 여성리더십의 세움도 초창기부터 강조되어 온 부분이란다. 그런데 최근 들리는 소식들에 의하면 숙의 민주주의의 최종적 합의는 실질적으로 ‘대표의 의견에 모두가 승복할 때까지’를 의미했고, 상호 목회의 이상도 오직 대표 부부에게만 허용되는 방식이었단다. 리더십을 가진 한두 사람의 ‘뜻’이 하나님의 뜻으로 둔갑한 방식으로 유지되어 온 공동체가 아닌가 싶다. ‘외부자는 우리 작동 방식을 모르니 끼어들지 말라’는 내부자들의 목소리도 들린다. 우려스러운 부분이다. 하나님 나라의 공공성을 핵심 가치로 여기는 공동체가 이렇게 ‘자기 폐쇄성’ 안에 갇히다니!
공공성이란 한 사람의 의견에 동의하는 사람이 많다고 충족되는 특성이 아니다. 모두의 이야기가 들려야 한다는 숙의형 민주주의는 한 사람의 뜻에 수렴하기 위함이 아닌, 내가 놓친 하나님의 뜻을 네 안의 그리스도를 통해 듣기 위함이어야 한다. 무엇보다 탈퇴한 전 회원들이 이구동성으로 ‘숨이 막혔다’라는 표현을 하는 것을 읽으며, 루아흐가 흘러가지 않는 공동체가 어찌 ‘하나님의 뜻’을 알고 나누며 상호 성장할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었다. 제도교회 안에 ‘숨 막히는’ 사례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고 있다. 그런데 왜 굳이 대안적 공동체의 예를 드냐고 묻는다면, 실은 그래서이다. 대안을 꿈꾸는 사람들에 대한 기대와 소망 때문이다. 아직 절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가진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적 가능성은 ‘네 안의 그리스도’를 더 강하고 더 확실하다는 마음으로 마주할 때 비로소 시작되고 유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