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와 공공성 포럼 칼럼 #4 (2025. 7. 15)

 

한국교회, 그리스도에 충성하는 교회가 되어야

 

김상덕 교수(한신대학교 평화교양대학)

 

 

‘광장의 기독교’ 또는 ‘광장 속 그리스도인’은 어느새 한국교회를 넘어 한국 사회의 ‘현상’이 되었다. 과거 기독교가 개인 복음 전도에만 몰두하지 말고 사회적 책임을 함께 감당해야 한다고 외쳤던 것을 기억한다면, 광장에서 기독교의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무슨 문제인가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오히려 자신의 신앙을 공개적으로 그리고 당당히 표현하는 사람을 두고 신앙이 좋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성경을 읽어보면 이교도와 불신자들의 핍박에도 굴복하지 않고 신앙을 지켜낸 이야기가 등장한다. 심지어 순교까지도 불사했던 믿음의 용사들 말이다. 그래서인지 광장 속 문구들은 비장하기 짝이 없다. 심지어 어떤 이는 자신을 본회퍼에 비유하기도 했으니, 일상의 평범한 신앙과는 그 무게감 또는 위기감이 다르다는 건 알겠다.

한국교회가 광장 또는 공공성을 언급하기 시작한 것은 대략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7년 기윤실이 주최한 다섯 차례의 대중 포럼의 주제가 바로 공공성의 위기와 그 대안으로서의 공공신학이었다. 당시 발표 자료는 이후 한 권의 책으로 묶여 『공공신학』(2009)이란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한국교회에서 공공신학을 제대로 소개한 첫 사례이기도 하다. 주목할 점은 이 책이 어떤 맥락에서 등장했는가인데, 이 책의 서문을 쓴 임성빈 교수는 당시 한국교회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위기 가운데 있다고 진단하며, 그 원인을 공공성의 상실 때문으로 진단하고 있다.(임성빈 외., 『공공신학』, 기독교윤리실천운동 엮음, (서울: 예영커뮤니케이션, 2009), 서문) 이는 한국교회가 광장에서 왜 그토록 비장한가에 대한 하나의 설명을 제공한다. 즉, 한국교회가 심각한 위기에 놓여있다는 위기감이 자리한다.

내 판단으로는 한국교회의 위기에 대한 반응은 크게 두 가지 흐름으로 요약될 수 있다. 하나는 그 원인을 교회 내부로부터 찾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원인을 외부로부터 찾으려는 시도이다. 전자는 한국교회가 가진 대형화 및 권력화에 따른 기독교의 근본적(혁명적) 신앙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진단했고, 그에 대한 해결책은 곧 교회 개혁이었다. 여기서 교회 개혁이란 단지 교회만의 개혁이 아니라 변화하는 사회적 맥락 속에서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방식으로서의 교회 개혁이 함께 필요하다는 주장이 포함된다. 왜냐하면 오늘날 사회는 과거와 달리 다원적이고 세속화된 사회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공공성의 회복’은 교회가 현대 사회와 공존하기 위한 필요조건과 같은 것이다.

아마도 공공성을 회복하자는 주장에 대해 반대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가 추구하는 공공성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는 여전히 불충분해 보인다. 특히 공적인 이슈 가운데 구체적인 영역으로 들어가면, 무엇이 ‘기독교적’인 것이고 무엇이 ‘공적인’ 것인가에 대한 혼란이 생기기 마련이다. 어떤 사안에 대해서는 한국교회가 공동의 견해를 가질 수 있을지 모르지만, 아마도 대부분의 사안에 대해서는 한국교회 안에서도 다양한 견해가 존재하고 충돌하기 마련이다. 그만큼 사회가 다양해지고 또한 이를 둘러싼 문제가 복잡해졌기 때문이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하나의 통일된 ‘기독교적’ 관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문제는 한국교회의 위기를 외부로부터 찾으려는 후자의 경우, 주로 공공의 영역에서도 하나의 기독교적 관점만을 강조하며 그것을 배타적인 진리인 것처럼 착각하는 경우 발생한다. 이런 관점을 가진 사람들은 한국교회의 위기가 교회 내부가 아닌 외부로부터 비롯한다고 믿는다. 특히 근대 이후의 사회가 세속화되면서 기독교의 본질적인 가치가 훼손을 당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 결과, 기독교의 영향력은 점차 약해진다고 보는 것이다. 여기서 세속사회는 성스러운 교회의 대척점에 서 있으며, ‘반기독교적’ 정치와 문화 운동으로 나타난다고 분석한다. 모든 문제를 영적 전쟁의 과정으로 이해하는 환원주의와 반지성주의와도 깊은 연관성을 갖는다. 과거 미국의 근본주의적 신앙의 전형을 답습하고 있음을 통렬히 인정하고 변해야 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근본주의적 신앙이 갖는 특징인데 하나는 그 격전지가 ‘문화’라고 하는 형태인 점이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극우화 현상에는 특정한 문화와 관습, 또는 정책을 마치 진리의 영역과 혼동하고 있다. 그리스도와 문화 가운데 무엇을 따를 것인가에 대한 질문은 오래된 것이지만, 이는 이론적 유형화로서만 의미를 가진다. 현실은 그리스도와 문화가 완전히 분리되기 어렵다. 그런데도 근본주의적 태도를 가진 그리스도인은 마치 특정 문화나 삶의 방식만을 고수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유일한 길이라고 착각한다. 마치 미국 남부 기독교가 노예제도를 성경적인 진리로 믿고 전쟁까지 불사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런 오해는 이 세상이 ‘영과 속’, ‘선과 악’, ‘기독교와 (세속)문화’로 구분하는 이분법적 세계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특정 문화에 대해 악마화하고 대항하며 싸워야 하는 ‘신적’ 소명을 갖게 된다. 소위 ‘문화 전쟁론’이 그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신적 소명이 아니라 특정 문화에 대한 집착에 가깝다. 이런 현상을 가리켜, 리처드 니버는 ‘문화적 기독교’(Christ of Culture)의 한 유형으로서 ‘문화적 프로테스탄티즘’이라고 분석한다.

 

근본주의자들이 이른바 자유주의 즉 문화적 프로테스탄티즘을 그렇게도 자주 공격하는 그 자체가 문화에 대한 하나의 충성을 표시하는 것이다. […] 전부는 아니라 할지라도 대부분의 반(反)자유주의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보다도 옛 문화의 우주론적 또는 생물학적 지구 파멸에 대한 고대 문화의 이념을 수락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의 시금석을 삼는다. […] 금주(禁酒)를 실천하는 것과 초대 미국의 사회조직을 그대로 보존하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순종과 일치시키는 운동은 문화적 기독교의 유형임에 틀림없다.(리처드 니버/김재준 옮김, 『그리스도와 문화』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8), 131.)

 

둘째는 그 표현의 방식과 정도가 반기독교적이라는 것이다. 광장의 그리스도인은 많은 이의 기대보다 더 독선적이고 배타적이며, 무례하다. 교회는 광장이라는 공론장에서 그리스도를 전하는 증인(witness)이며 복음의 메신저(messenger)이다. 공적 장소에서의 말과 행동은 성경이나 신학적 교리보다 직접적이고 직관적이다. 특히나 탈종교화 사회에서 기독교에 대한 인식(이미지)은 무엇보다 언론이나 대중매체, 그리고 광장에서 재현된 모습을 우선적으로 학습하게 된다. 오늘 한국교회의 부정적인 이미지와 낮은 신뢰도는 이런 현상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적절하게 소개하기도 전부터, 사람들은 기독교에 대한 뿌리 깊은 오해와 불신을 갖고 있는 것이다. 한국교회를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부르신 소명이 바로 이 지점에서 실패하고 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관용과 포용이 오늘의 문화 안에서 꽃을 피우려면, 한국교회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돌아가야 한다. 위기의 시대이지만, 그럴수록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를 따라 살아야 한다. 우리가 따라야 할 대상은 문화가 아니라,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오래 참고 무례히 행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참으며 포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