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교회와 공공성 포럼 칼럼 #44 (2026.08.04)
교회 안의 우생학
오세조 목사(팔복루터교회)
“상처 없는 인생이 어디 있으랴”
-알튀르 랭보(Arthur Rimbaud, 1854~1891)-
지난 7월 청년들과 함께 여수 애양원교회로 수련회를 다녀왔다. 계획된 일정에 따라 애양원역사박물관을 방문했다. 한국교회의 초기 역사에서 수많은 외국인 의료선교사가 보여준 아름다운 헌신과 봉사를 몸으로 체득할 수 있는 뜻깊은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 숭고한 기억의 이면에 마주했던 한 가지 역사적 사실은 마음을 무겁게 했다. 바로 한국에서 한센인을 대상으로 한 최초의 강제 단종(정관 절제) 수술이 시행된 현장이 다름이 아닌 애양원이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우생학적 목적과 감염 예방을 명분으로 한센인의 출산을 통제하려 했다. 이에 따라 1935년 여수 애양원에서 국내 최초로 한센인을 대상으로 단종 수술이 시행되었고, 이듬해인 1936년 국립소록도병원(당시 소록도갱생원)이 부부 동거를 허용하는 조건으로 이 제도를 공식 도입하며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1916년 일제가 외국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사립 한센인 요양소의 영향력을 견제하고, 한센인을 사회적으로 격리하기 위해 전남 고흥군에 설립한 ‘소록도자혜의원’은 치료가 아닌 철저한 통제의 공간이다. 수용자들은 강제 노동에 시달렸고, 우생학적 목적의 단종과 낙태를 강요받았다. 사회적으로 ‘열등한 인자’를 과학과 의학의 힘으로 제거하겠다는 명백한 국가적 폭력이었다. 해방 이후에도 한센인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낙인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으며, 소록도는 오랫동안 외부와 단절된 채 고립의 공간으로 남았다.
20세기 초반, 유전학의 왜곡된 이해에서 출발한 우생학은 사회통계학을 이용해 인간의 신체적·정신적 특징에 ‘평균(정상)’이라는 임의의 기준을 세웠다. 그리고 이 평균에서 벗어난 사람을 ‘비정상’이자 사회의 해악으로 규정하며, 인간의 존재에 ‘우등’과 ‘열등’이라는 등급을 매겼다. 이러한 개념은 그저 단순한 이론에 그치지 않고 독일의 유대인 학살, 미국의 강제 단종 등 끔찍한 인류사적 비극으로 이어졌다. 인류는 이처럼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참상을 경험한 뒤에야 비로소 우생학이 과학이 아닌 ‘유사 과학’임을 깨달았다. 인류가 신체적·정신적 측면에서 이른바 ‘정상’이라는 모호한 기준에 매몰될 때 얼마나 잔인한 차별과 배제가 시작되는지 우리에게 보여준 뼈아픈 역사이며, 소록도와 애양원 역시 그 비극의 현장이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우생학의 망령이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서 ‘차별과 배제’라는 또 다른 형태로 기생하고 있다. 지금의 한국교회는 성경 문자주의, 편협한 교리적 잣대, 임의로 정한 성별 기준 등을 들이대며 인간의 가치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재단한다. 과거 교회가 성경 속 ‘나병(한센병)’의 역사적·의학적 맥락을 무시한 채 텍스트를 오역하여 한센인을 하늘로부터 저주받은 죄인으로 정죄했던 오류가, 현대에 이르러 소수자를 향한 배제로 고스란히 반복된다. 이는 과거의 우생학적 메커니즘과 소름 끼치도록 닮았다. 자신이 속한 주류 집단의 기준을 ‘정상’과 ‘선’으로 규정하고, 그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이들을 ‘영적 비정상’으로 낙인찍어 격리하려는 태도는 신앙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또 하나의 ‘교회 안의 우생학’이다.
역설적이지만, 이러한 한국교회 강단에서 자주 등장하는 감동적인 예화는 바로 ‘소록도의 두 천사 이야기’이다. 아무런 대가 없이 43년 동안 맨손으로 한센병 환자들의 고름을 짜내며 돌본 오스트리아 출신의 간호사 마리안느와 故 마거릿의 삶은 세상이 규정한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허문 진정한 사랑과 환대의 표본이었다. 이처럼 주류 사회가 세운 장벽을 무너뜨린 시선은 예술의 영역에서도 발견된다. 패션 사진을 떠나 세상이 금기시하고 숨기려고 했던 이들을 렌즈 앞에 세운 다이안 아버스(Daine Arbus, 1923~1971)는 거인, 난쟁이, 지체 장애인들과 깊이 교제하면서 『기형인』(Freaks, 1972년)이라는 중요한 사진집을 우리에게 남겼다. 그녀는 주류 사회의 위선적인 기준을 전복시키며 이렇게 고백했다.
“사람들은 일생을 통하여 외상(外傷)의 경험에 대한 끊임없는 불안을 안고 살아간다. 기형인들은 그러한 외상에 의해 태어난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미 삶의 시험을 통과한 사람들이다.”
그녀의 시선에서 이들은 결코 사회가 정한 ‘평균’의 기준에서 탈락한 결격자가 아니다. 도리어 주류 집단이 ‘정상’이라는 모호한 기준에 도달하지 못할까봐, 전전긍긍하는 탈락의 공포, 그 불안을 이미 초월하여 자신만의 존엄을 지켜낸 당당한 존재들이었다. 교회가 이들에게 베풀어야 할 ‘환대’는 단순히 시혜적인 태도로 불쌍한 약자를 도와주는 수준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녀의 시선처럼, 교회가 임의로 세워둔 정상성의 기준 자체를 완전히 해체하고, 세상의 잣대로는 결코 잴 수 없는 그들의 온전한 존엄성을, 존재 그 자체 그대로 인정하는 것-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환대다.
지금 우리에게 소록도 두 천사의 이야기와 경계를 허무는 시선이 다시금 절실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한국교회가 상실해 버린 환대의 정신이 바로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숭고한 삶은 그저 설교 단상 위에서 일회성 소모품처럼 예화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과 신앙의 현장에서 차별과 배제의 벽을 허무는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 사회역학자인 김승섭 교수는 그의 책 『아픔이 길이 되려면』에서 공동체의 수준은 한 사회에서 모든 혜택의 사각지대에 놓인 취약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고 말했다.
교회는 모든 이를 조건 없이 품는 환대의 공동체여야 한다. 만약 한국교회가 이 본질적인 변화를 거부하고 차별과 배제의 성벽을 더 높이 쌓아 올린다면, ‘교회 안의 우생학’은 끊임없이 그 형태를 바꾸며 우리 가운데 살아남을 것이다. 타인을 비정상으로 낙인찍고 배제하기 위해 만든 그 날카로운 시스템은 결국 부메랑이 되어 교회 자신을 겨누게 된다. 교회가 세운 엄격한 율법의 기준은 언젠가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할 성도 자신과 한국교회 전체를 파멸로 몰고 갈 것이다. 타인을 삼키기 위해 교회가 스스로 키워낸 차별과 배제의 율법주의 시스템이, 결국 통제 불능의 괴물 ‘리워야단’이 되어 교회 공동체 자체를 집어삼키는 비극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