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교회와 공공성 포럼 칼럼 #45 (2026.08.11)
에어컨과 기후 위기 딜레마
최경환 연구원(에라스무스 연구소)
우리는 지금 역사상 가장 뜨거운 시간을 지나가고 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유럽도 전례없는 폭염으로 많은 이들이 고통받고 있다. 독일 라이프치히에서는 트램 선로가 열에 휘어 도시 교통이 멈췄고, 프랑스에서는 강물이 너무 뜨거워져 냉각수를 대던 원자로 몇 기가 가동을 멈췄다. 프랑스에서만 6월 엿새 동안 2천 명이 넘는 사람이 폭염으로 죽었고, 유럽 전체 초과 사망자는 여름이 끝나기도 전에 1만 명 가까이로 추정된다. 그 죽음의 대부분은 노인이었다. 에어컨 없는 방에서, 밤에도 식지 않는 열기 속에서 홀로 죽은 것이다.
이들의 죽음 앞에서 프랑스 의회가 벌인 논쟁은 흥미롭다. 사람들은 ‘어떻게 살릴 것인가’보다 ‘에어컨을 켤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싸웠다. 극우 진영은 전국적인 에어컨 보급 계획을 밀어붙였고, 급진 좌파는 모든 곳에 에어컨을 다는 것은 더 큰 해를 끼치는 일이라며 맞섰다. 오랫동안 에어컨을 미심쩍어하던 녹색당조차 학교와 병원만큼은 냉방이 필요하다고 물러섰고, 급기야 정부의 폭염 대응을 문제 삼아 불신임안까지 냈다. 부결되긴 했지만, 이 나라가 에어컨 한 대를 놓고 얼마나 깊이 갈라져 있는지는 충분히 드러났다.
에어컨의 딜레마는 잔인할 만큼 단순하다. 그것은 방 안의 열을 없애는 게 아니라, 방 밖으로 밀어낼 뿐이다. 실내를 식히는 대가로 실외는 더 뜨거워진다. 도시 전체가 에어컨을 돌리면 도시 열섬이 심해지고, 전력 수요가 치솟아 전력망이 비명을 지른다. 그리고 그 전기가 화석연료에서 온다면, 에어컨은 자신이 맞서 싸우는 바로 그 더위를 스스로 키우는 기계가 된다. 여기서 보통의 논쟁은 멈춘다. 환경이냐 생존이냐. 지구냐 노인이냐. 규제를 풀 것이냐 지킬 것이냐.
인도의 역사학자 차크라바르티의 표현을 빌리면, 에어컨은 지구본 시대에는 사소하고 사치스러운 물건이었다. 개인의 안락함, 사적인 취향의 문제였다. 그러나 인류세에 들어서면서, 바로 그 사소한 물건이 세계사적이고 행성적인 사건으로 격상된다. 수억 대의 에어컨이 동시에 돌아가는 순간, 에어컨은 지구 시스템에 각인되는 지질학적 흔적이 된다. 내 방의 온도조절기가 지구의 미래를 건드리는 것이다.
지난 몇 십년 사이 인도의 중산층 가정에서 에어컨 사용량은 급속히 증가했다. 그 에어컨은 도시를 더 덥게 만들어, 이웃이 또 에어컨을 사게 만드는 악순환을 만든다. 언뜻 자기 파괴적으로 보이는 이 행동에는 또 다른 얼굴이 있다. 시원한 방에서 잠을 자고 공부할 수 있게 된 그 집 아이들의 성적이 오르고 도시 전체의 교육열이 상승했다는 점이다. 이제 에어컨은 단지 시원함을 파는 기계가 아니라, 잠과 집중력과 교육과 존엄을 파는 기계가 되었다. 프랑스 리옹의 냉방 없는 방에서 죽어가는 할머니와 델리의 뜨거운 셋방에서 시험을 준비하는 아이.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과 판단은 무엇일까?
인류세가 우리에게 던지는 교훈은 이런 것이다. 그것은 “안락을 포기하라”는 금욕의 설교도, “어쩔 수 없다”는 소비의 면죄부도 아니다. 사적인 것과 행성적인 것이 이제 하나로 붙어버렸다는 냉정한 사실이다. 온도조절기를 누르는 손끝은 이제 정치적이면서 동시에 지질학적인 행위가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풀어야 할 문제는 리옹의 할머니와 델리의 아이 중 누구를 버릴 것이냐가 아니다. 둘 중 누구도 서로를 위해 희생될 필요가 없는 세계를 지어낼 수 있느냐다. 냉방을 하나의 권리로, 탈탄소를 그 권리의 조건으로 세우는 일. 이번 여름 유럽 의회의 소란스러운 에어컨 논쟁은, 실은 인류 전체가 앞으로 수십 년간 붙들고 씨름해야 할 그 질문의 예고편일 뿐이다. 앞으로 우리가 풀어야 할 이런 딜레마는 계속해서 발생할 것이고, 우리는 그 앞에서 어려운 윤리적 판단과 정치적 결정을 내려야 할 것이다.
복음서에서 한 율법 교사가 “누가 내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을 때, 예수는 민족과 국경을 넘어서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로 답했다. 인류세는 예수의 질문을 지구적 규모로 되돌려 놓는다. 서울에서, 리옹에서 내가 누른 온도조절기 스위치가 이제 지구 반대편 델리의 아이를 나의 이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의 전통처럼 신앙이 화려한 예배당이 아니라 이웃을 향한 일상의 손짓 속에서 드러나는 것이라면, 그리고 창조 세계가 인간의 소유가 아니라 잠시 맡겨진 우리의 몫이라면, 에어컨을 켜고 끄는 그 사소한 손끝에는 실은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고 있는지 아닌지가 담겨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