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와 공공성 포럼 칼럼 #53 (2026.10.13)

 

이웃사랑의 공공성

김혜령 교수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

 

기독교 복음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하나님 사랑”이다. 조사의 생략으로 다중 의미를 만들어 내는 우리말의 특성에도 불구하고, 많은 기독교인들은 이 말이 주로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사랑을 뜻하는 것으로 배운다. 그 사랑은 인간을 향한, 피조물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에 불과한 것인데도, 하나님 사랑을 일방적인 인간의 의무로 축소해 버리면 하나님은 어느새 인간의 사랑을 갈망하고 질투하시는 쪼잔한 분이 되고 만다.

이웃 사랑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것이 정석이건만,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 대구처럼 주어지면서 이 두 사랑이 서로 다른 종류의 사랑인 것처럼, 혹은 선후 혹은 우열의 순위가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래서 누군가 내게 “하나님 사랑”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꼭 이렇게 답하리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으로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것, 그것이 하나님 사랑이라고. 하지만 예수를 찾아온 율법 교사처럼 내게 누군가는 물을 것이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그 사랑, 그건 어떻게 하는 것이냐고?

혹자는 진부하다 비꼬겠지만, 나는 다시 예수의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꺼내 들어 다시 마음을 다잡을 수밖에 없다. 비유라는 것이 시간이 지나면 진부해지는 것이 인간 언어의 본성이건만, 예수의 비유는 수많은 사람의 해석을 거쳐 그 복음의 의미론적 혁신을 끊임없이 가능하게 하는 신비한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 이야기에서 어떤 이웃 사랑을 새롭게 배우는가? 다시 되짚고 되짚어 봐도, 내 배움의 10의 8할은 모두 이야기꾼 예수가 선택한 등장인물들의 전략적 배치에서 나온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 강도 만난 자를 마주친 사람들 모두 유대인이었다면 이 이야기는 그저 어려운 일을 당한 사람을 도와주는 ‘착한 이웃’의 이야기에 그쳤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그의 약점만을 노리는 꾀 많은 청자 ‘율법교사’ 앞에 그가 가장 불편해할 등장인물들의 배경을 설정했다. 먼저 유대인 제사장과 레위인을 강도 만난 자를 외면하고 지나치는 역에 나란히 배치했다. 그리고 그를 거두고 살리는 역할에 유대인들이 가장 우습게 여기고 멸시하는 ‘사마리아인’을 배치했다. 한창 날카로운 심성으로 온 귀를 집중하여 듣고 있는 율법교사의 속을 뒤짚어 놓을 바로 그 인물 역할에 사마리아인을 배치한 것이다.

그나마 강도 만난 자가 만약 사마리아인이었고, 그를 살리는 이가 유대인이라는 설정이었으면 그만큼 속이 뒤집어 지지는 않았을까? 그런 배역 설정은 최소한, 도움을 베푸는 관대한 ‘관용’의 주인공 자리를 유대인 자신들의 몫으로 남겨 두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는 율법교사의 마음이 철저하게 불편하도록, 등장인물들을 치밀하리만큼 고약하게, 의도적으로 배치했다. 비유 창작자로서 철저하게 계산된 배치, 이 역할 배치의 정치수사학으로 예수는 그의 이웃사랑 윤리의 핵심을 드러내고만 것이다.

그래서 예수의 이웃사랑은 그저 ‘착한 사람’이 되는 도덕이 아니다. 오히려 그 도덕의 안이함을 파헤치고, 그런 도덕 안에 은폐된 ‘끼리끼리’의 상부상조의 단합을 폭로한다. 그의 이웃사랑은 한 공동체가 신앙과 예식, 문화와 전통, 모국어와 관습 등을 핑계로 철저하게 ‘우리’와 ‘이방인’을 분리해 내는, 순진하고 선량한 얼굴의 이웃 사랑이 지닌 민망한 민낯을 꼬집는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선함’은 인격적인 착함으로 축소될 수 없다. 집단과 집단 사이 차이를 차별과 혐오로 조작해 내는 끼리끼리의 도덕을 해체하고, 그 사이 경계가 만들어 내는 폭력을 중단하는 데 용기를 내어 다가서는 것, 그것만이 사마리아인의 이웃사랑의 ‘선함’일 것이다. 그래서 이 선함에는 사랑만이 있지 않고, 사회 정의가 늘 따라붙는다. 사회정의 없이 그저 순수하기만 한 사랑만으로는 이웃사랑은 그저 사사로운 사랑이 되어버리고 만다. 이웃사랑의 공공성을 모르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결국 무지한 상태로 남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