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와 공공성 포럼 칼럼 #53 (2026.10.13)

 

종교개혁: 여성 안수를 시행하라!

 

김성희 교수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현재, 여성 목사, 장로 안수를 시행하지 않는 한국의 대표적 교단은 예장합동, 고신, 합신 등이다. 이들이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며 여성의 지도력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대표적인 이유는 문자 중심적 성경해석, 교회사적 전통이라는 허울, 교단 내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정치 현실에 근거한다. 먼저, 이들은 문자 그대로 성경을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자신들의 잣대로 재단한다. 그러나 이들의 성경해석은 지극히 선택적이며, 하나님의 권한을 침범하는 월권행위다. 필자는 여성 안수와 여성 지도력을 가로막는 방패막이로 주로 사용되어왔던 신약성서 본문들을 새롭게 해석함으로써, ‘죽이는 문자’가 아니라 ‘살리는 영’으로 말씀을 읽는 성경 읽기의 모범을 제시하고자 한다. 아울러 여성안수에 반대하는 비겁한 남성목사와 학자, 기득권자들, 그리고 남성 지도력의 세계관에 길든 평신도들에게, 교회의 여성 지도력을 공적으로 인정하는 ‘여성 안수’ 가 종교개혁의 정신과 일맥상통하는 것임을 알리고자 한다.

여성안수 반대의 근거로 가장 자주 인용되는 신약 본문은 바울 서신들과 목회 서신들이다.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해당 책의 ‘장르’를 살펴야 한다. 율법서인지, 예언서인지, 시와 지혜서인지, 묵시문학인지에 따라 본문을 이해하는 방식이 달라지고 본문의 뜻을 더 본질에 맞게 심층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신약성경의 27권 중 13권이 ‘편지(서신)’의 장르이다. 바울이나 목회전도자들이 수신자들의 구체적인 상황과 그곳에서 발생한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편지를 썼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따라서 서신을 읽을 때는 일반적인 육하원칙에 따라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왜’, ‘어떻게’를 질문하고, 이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1. 디모데전서 2:11-15 (여자에게 순종 요구, 남자 지배 금지, 출산으로 구원받는다는 본문)

 

디모데전서는 에베소에 머물고 있던 디모데(1:3)에게, 그곳에서 발생한 문제들을 잘 목회하도록 돕기 위해 보낸 편지다. 에베소는 아르테미스 숭배가 강했을 뿐 아니라 다양한 종교와 철학이 혼재해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여러 도전을 안겨 준 로마제국의 대표적 도시였다. 에베소의 이단적 가르침 가운데는 결혼과 출산을 금지하는 주장도 있었으며, 열정적이고 격정적인 예언 활동을 강조하고, 제도적으로 정착해 가던 교회의 직제를 반대하는 흐름도 있었다. 바울이 에베소의 기독교인들에게 전하고자 한 핵심은 “신화와 끝없는 족보”를 둘러싼 쓸데없는 변론을 일으키는 가르침에 미혹되지 말고(1:4), “깨끗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을 실천하라는 것이었다(1:5). 이러한 맥락에서 딤전 2:11–15는 당시의 구체적인 상황에 대한 권고로 이해할 수 있다. 곧 영적 우월감에 빠져 타인을 무시하거나, 특히 남편을 좌지우지하려는 태도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라는 권고다. 또한 결혼과 출산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불안에서 벗어나, 안전하게 아이를 낳을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주신 가정의 축복을 온전히 누리라는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이 본문을 여성을 억압하거나 남성의 우월성을 뒷받침하는 가르침으로 잘못 사용해서는 안 된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만 읽는다면, 신약성경의 표현은 남성만을 향한 말씀으로 이해될 수 있다. 신약성경에서 말씀하는 대상은 주로 헬라어 남성형으로 흔히 사용되기 때문이다(오병이어 사건의 오천 명에는 여자의 수가 세어지지 않았던 문화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이해할 때에는 시대가 변해도 지켜야 할 말씀과 특정한 상황에서 주어진 구체적인 권고가 함께 담겨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성경을 선택적으로 해석하거나 단순히 문자에만 매달리는 태도는 멈추어야 한다. 바울은 율법의 문자에 얽매이는 해석을 ‘죽이는 것’이라고 표현했다(고후 3:6). 그는 평생 율법주의자들과 논쟁했다. 그렇다면 오늘날 여성 안수와 여성의 지도력을 가로막는 이들은 초대교회 당시 예수의 복음과 이방인 선교에 맞섰던 유대적 율법주의자들의 편에 서려는 것인가?

  1. 고전 11:2-16 (여자가 머리에 너울 쓰는 문제) / 14:34-40 (여성은 잠잠하라는 문제)

 

고린도 도시의 그리스·로마 문화권 여성들에게 머리를 덮고 외출해야 한다는 의무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반면 유대교 여성들은 일반적으로 집 밖에서 머리나 얼굴을 가렸다. 당시에는 여성이 머리를 가리지 않고 외출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기도 했으며, 남성이 머리를 기르는 것 역시 수치스럽게 간주되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에서는 예언하는 여성들이 머리를 가리지 않은 채 예언하는 일이 있었고, 남성들 가운데 머리를 기르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모습은 당시의 규범과 문화 안에서 물의를 일으킬 수 있었다. 이에 바울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예배를 위한 목회적 권고로 여성은 머리에 너울을 쓰고 남성은 머리를 기르지 말라고 한 것으로 볼 수 있다(11:13).

고린도전서 11장의 핵심은 이러한 윤리적 권고에 있다. 바울은 이를 논증하는 과정에서 남녀 창조의 순서를 언급하지만(11:8–9), 결국 어느 한쪽이 창조의 순서에 따라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남자와 여자는 주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강조한다(11:12). 오늘날 개신교 교회에서는 예배 때 여성이 머리에 너울을 쓰도록 요구하는 경우가 드물다. 남성들도 패션에 따라 머리를 기르거나 묶는다. 그렇다면 당시의 권고를 오늘날 그대로 따르지 않으면서, 이를 여성 안수를 반대하는 근거로만 선택적으로 끌어올 수는 없다. 이 본문에서 보편적으로 지켜야 할 원칙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며, 당시의 문화적 규범에 비추어 주어진 구체적 권고는 여성이 공적 예배에서 너울을 쓰고 남성은 머리를 기르지 말라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고린도전서 14:34–40은 고린도 교회에서 여성들이 활발하게 신앙생활을 했으며, 방언하고 예언하는 여성들도 실제로 있었음을 보여준다. 일부 학자들은 14:34–35를 비(非)바울적인 본문으로 보고 후대에 삽입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본문을 바울의 것으로 보더라도, 핵심은 40절의 “모든 일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는 권고에 있다. 따라서 이 말씀은 공공질서를 어지럽히는 상황을 바로잡기 위한 구체적 권고로 이해해야 하며, 여성 안수를 막는 증거 본문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여성 안수를 반대하는 것은 다른 교단의 여성 목회자와 사역자들을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일을 부정하는 일이 될 수 있다. 이는 모든 것을 선하게 하시고 가능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결국 문자적 성경 읽기는 시대를 역행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여성 안수를 반대하는 이들은 당시 바울이 비판했던 율법주의의 태도에 서 있는 것은 아닌지, 또한 중세시대에 개혁을 반대한 교회권력자들의 모습은 아닌지 반추해야 한다.

 

  1. 목회서신의 가정훈령과 고정된 성역할(엡5:21-6:9; 골3:18-4:1; 딛2:1-10)

 

가정훈령 본문들은 사회학적 관점에서 교회가 제도화되어 가는 단계를 보여준다. 초기 교회는 가부장적 가정 구조를 교회의 사회적 모델로 받아들였으며, 그리스·로마 사회와 원만한 관계를 맺으면서 기독교의 뿌리를 내리고자 했다. 바울 서신과 목회서신에 나타나는 이른바 ‘가정훈령’(household code)에는 당시 그리스·로마 사회의 요구가 반영된 윤리적 권면이 담겨 있다. 안정과 제도화가 필요했던 교회는 ‘하나님의 가정’이라는 개념 아래 아내와 남편, 자녀와 부모, 종과 상전의 관계를 규정하고 전통적인 성역할을 제시했다. 그럼에도 당시 그리스·로마 사회의 가정훈령보다 상호 평등적이고 진취적인 복음의 메시지는 감춰질 수 없었다. 에베소서의 “서로 순종하십시오”(엡 5:21), 골로새서의 “새 사람을 입었으니 …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 종이나 자유인이나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골 3:10–11),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났습니다”(딛 2:11)라는 말씀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가정훈령에 나타난 성별과 사회적 지위에 따른 역할 규정은 하나님의 말씀이 비방 받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선교가 이루어지기 위한 당시의 선교적 전략으로 읽어야 한다. 이를 각자의 달란트, 곧 재능과 소명을 억누르는 고정된 성역할의 가르침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오히려 고정된 성역할을 절대화하는 가르침은 오늘날의 시대정신과 충돌해 하나님의 말씀이 비방 받게 할 수 있으며, 복음에 거스르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1. 열두 사도가 모두 남성이어서 여성 안수가 불가능하다는 궤변

 

예수께서 남성 제자 열두 명을 선택하신 것은 ‘남자’라는 성별보다 ‘열둘’이라는 숫자의 상징성 때문이었다. ‘열둘’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회복을 상징했기 때문이다. 문자적 읽기를 일관되게 적용한다면 바울은 열두 사도에 속하지 않았으므로 사도로 인정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또 ‘열둘’과 ‘남성’을 같은 기준으로 본다면 각 교단에는 남성 목사 열두 명만 있으면 된다는 말이 된다. 여성 안수를 시행하지 않는 교단들은 자신들이 받아들이고 싶은 부분에만 문자적 해석을 적용하는 논리적 모순에 빠져 있다.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이동한 예수의 제자 공동체에는 여성들도 함께했다(눅 8:1–3). 다비다, 곧 도르가도 ‘제자’라고 불렸다(행 9:36). 유니아는 로마서 16:7에서 ‘사도들에게 높이 평가받는 인물’ 또는 ‘사도들 가운데 탁월한 인물’로 번역될 수 있다. 초대교회 전승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사도들을 가르친 사도, 곧 “사도들의 사도”라고 불리기도 했다. 로마서를 전달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뵈뵈는 로마서 16:1에서 겐그레아 교회의 ‘디아코노스’(διάκονος, 사역자)로 소개되고, 16:2에서는 많은 사람과 바울 자신의 ’프로스타티스‘(προστάτις, 후원자, 통치자)로 불린다. 이처럼 여성 지도자와 사역자들이 공적으로 활동한 증거가 있음에도, 열두 사도가 남성이었다는 이유만으로 여성 안수를 거부하는 주장은 유치하고 시대착오적인 궤변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제 각 교단은 하나님 나라와 복음의 정신에 어긋나지 않도록 여성 안수를 시행하라! 양심 있는 학자와 목회자, 깨어있는 교인들은 자신이 속한 교단의 시대착오적이고 반복음적인 행태를 규탄하고, 교단이 각성하여 변화하고 개혁하도록 촉구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