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와 공공성 포럼 칼럼 #5 (2025. 8. 1)

 

광장 이후, 남겨진 자리에서

 

2024년 겨울과 2025년 봄을 지나 우리는 또 한 번의 정권교체를 경험했습니다. 7년 전 촛불로 표상되던 시민의 열망은, 이후 정치 현실 속에서 번번이 좌절되었고, 실망과 냉소가 그 자리를 채워왔습니다. 그러나 이번 선거는 그러한 무기력과 단절의 감정 너머에서 다시금 기대를 품게 했다는 점에서 특별했습니다. 물론 그것은 어떤 특정 정당이나 인물에 대한 전폭적 지지라기보다는 광장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이대로는 안 된다는 사회적 감수성과 변화에 대한 열망의 흐름이었습니다. 그래서 정권이 교체된 지금, 광장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 형태와 언어, 자리를 달리하고 있을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광장에서 터져 나왔던 다양한 목소리들이 과연 공적인 담론 속에서, 제도와 실천 속에서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지를 묻는 일입니다. 사회는 여전히 중심의 언어를 좇고 있지만, 정작 변화를 이끌어 낸 동력은 주변부에서부터 왔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정권이 교체된 지금,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그 열망은 어디에서 비롯되었고, 지금은 어디에 담기고 있는가? 거리로 나온 시민들, 지역에서 싸움을 이어간 이들, 제도 바깥에서 목소리를 내던 이들의 외침은 과연 이 변화 속에서 충분히 호명되고 있는가?

 

그 질문을 품고 떠오르는 장면이 있습니다. 바로 2024년 12월 21일 남태령 고개에서 있었던 ‘뜻밖의’ 연대입니다. 윤석열 정부 퇴진을 촉구하며 올라오던 농민들의 트랙터 행진이 서울 진입을 앞두고 경찰에 의해 차단되었을 때, 그 막힌 고개에 다양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모여들었습니다. 그 연대에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한 농민 운동가가 “우리 딸들 수고했다”라고 인사했습니다. 그러자 누군가가 자신이 딸이 아닐 수 있다며 성소수자임을 밝혔습니다. 그때 그 농민이 한 대답이 당사자에게 큰 힘이 되었다고 합니다. 농민이 한 대답은

 

“그렇구나, 알아두겠다.”

 

였습니다. 정치적 노선이나 운동 방식은 서로 다를 수 있었지만, 그 자리에서는 삶의 절박함과 시대의 부름 앞에 함께 머무는 연대가 형성되었습니다. 낯선 존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기 시작하는 물결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연대한 사람들이 서로 음식을 나누고, 현장에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난방버스를 보내며, 현대판 오병이어의 기적을 광장에서 만들어냈습니다.

그 연대는 어떤 전략이나 조직의 결과가 아니라, 서로의 투쟁에 ‘응답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트랙터와 형형색색의 응원봉, 무지개 깃발이 나란히 선 풍경은 지금까지의 정치 언어로는 쉽게 해석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한 신호였습니다. 우리 사회는 아직도 ‘함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자리’를 갈망하고 있으며, 그 자리는 제도정치의 테이블 너머에서 계속해서 생성되고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신학은 이런 자리에 주목해야 합니다. 예언자는 성전의 중심이 아니라, 성문 바깥, 광야와 골목, 빈 들에서 하나님의 뜻을 들었습니다. 성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관심이 어디에 머무는지를 반복해서 일깨웁니다. 중심을 이루는 제사보다, 이름 없는 이의 부르짖음이, 정제된 언어보다 울퉁불퉁한 고백이 더 진실된 기도가 될 수 있음을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남태령 고개에 모였던 이들의 몸짓은, 우리가 살아내야 할 ‘신앙의 방향’을 다시 물어오는 장면이었습니다.

 

새 정부에 대한 기대는 분명 존재합니다. 더 나은 사회, 더 나은 복지, 더 넓은 포용을 바라는 시민들의 바람은 정당합니다. 그러나 그 변화가 진짜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가장자리에서 목소리를 낸 이들의 존재가 잊히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구나, 알아두겠다“라는 연대의 확장이 제도 안에서도 이루어져야 합니다. 교회는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광장에 모였던 우리는 이제 일상으로 돌아갔지만, 2025년 겨울, 광장의 정신은 아직 끝나지 않고 숨 쉬고 있습니다. 변화는 이제 막 시작되었고, 우리는 다시 질문해야 합니다. 우리는 누구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가? 누구와 함께 길을 걷고 있는가? 남태령에서 만난 사람들의 얼굴을 기억하며, 교회와 신학은 다시금 묻습니다. 지금 우리는 누구의 곁에 서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