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와 공공성 포럼 칼럼 #7 (2025. 9. 1)

 

라합의 뒤를 따라

김근주(기독연구원 느헤미야 구약학)

 

여리고를 공격하기 전에 여호수아가 보낸 정탐꾼들은 여리고 성에 들어가서 라합의 집에 머물렀다(수 2:1). 이들의 움직임을 알아차린 이들이 여리고 당국에 고발하였고, 이 정탐꾼들을 붙잡으려는 사람이 찾아왔을 때, 라합은 이미 그들이 자신의 집을 떠났다고 거짓으로 대답하면서 도리어 정탐꾼들을 자신의 집 지붕에 숨겨 주었다. 당국의 눈을 피한 후에 라합은 정탐꾼들에게 이스라엘이 여기까지 진격해온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녹고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고 말하면서(2:9-11),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라 표현한다(2:11).

본문에 따르면 이스라엘과 그들의 하나님 야훼에 관한 소문을 들은 주체는 ‘우리’이다. ‘우리’라고 표현했지만, 이 소문을 들은 이들은 라합 정도였던 것일까? 아니면 이 소문이 당시 여리고 성 여기저기에 퍼졌던 것이었을까? 여호수아서는 여리고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라합과 그 가족을 제외하고 모두 죽임 당한 것처럼 표현한다. 그렇다면 여리고의 다른 사람들은 이스라엘에 대한 소문을 듣지 못했던 것일까? 아니면 소문을 들었음에도 라합이 들은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어서, 그에 대한 적절한 대응을 하기 어려웠던 것일까? 그렇다면 대체 라합은 이스라엘과 그 하나님 야훼에 관한 소문을 어디에서 어떻게 습득할 수 있었을까? 좀 더 일반적인 말로 표현하자면, 같은 시대를 살아가면서 현실에 대한 해석이 전혀 다른 까닭은 무엇인가? 현실을 다르게 해석하는데 기반이 되는 정보를 오늘날 우리는 어디에서 어떻게 습득하고 있는 것일까?

노동자들이 일터에서 겪는 이런저런 위험과 어려움을 다루기 위해 노동자들을 돕고 돌보기 위한 전태일의료센터 건립이 지난 2023년부터 시작되었다. 목표액 50억원을 정하고 노동자와 시민의 참여와 연대를 통해 마련하고자 모금을 시작하였고, 지난 2025년 7월 17일 목표했던 액수를 채울 수 있었다. 모금을 이룬 후에 참여한 이들에 대한 이런저런 통계 결과가 있었는데, 이 가운데 모금 참여자들의 연령 및 성별 분포는 정말 충격적이었다(그림 참고).

놀랍게도 전체 기부자의 80퍼센트가 여성이었고, 이 가운데 2030여성의 비율은 절반을 훌쩍 넘었다(55.1%). 왜 이런 결과가 생겼을까? 이 통계에 포함된 2030여성들은 ‘전태일의료센터 건립 기금 모금’이라는 정보를 어디에서 들었을까? 1995년 이후에 태어난 2030여성들은 1970년에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린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분신했던 전태일을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같은 시대를 살아가면서 2030여성들을 포함한 여성들은 이 의료센터 건립을 위해 이와 같이 열렬히 참여한 반면, 그에 대응되는 남성들은 그렇지 못했던 까닭은 무엇일까?

이 통계에 대해 지난 7월18일자 한국일보에 흥미로운 분석 기사가 실렸다(“남태령 대첩 2030여성의 힘, 전태일의료센터 건립기금 50억 다 채웠다”). 의료센터 모금 기간 동안 세 번 정도 후원이 몰렸던 시기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 가장 많은 후원이 몰렸던 때가 지난 2024년 12월이었다고 한다. 특히 12월21일과 22일, 남태령에서 밤샘 집회가 열렸을 때, 그 공간에서 전태일의료센터에 대한 광고가 있었고, 집중적인 후원이 쏟아졌다고 한다. ‘남태령 대첩’에 참여한 시민의 압도적인 다수가 2030여성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남태령대첩과 전태일의료센터 기금 모금의 직접적인 상관관계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전태일의료센터 건립이라는 정보가 집중적으로 유통된 곳이 결국 남태령 현장이었다. 사실, 남태령이라는 그 현장은 여성과 농민, 성소수자와 노동자, 그 모든 장벽과 거리를 단번에 허물고 좁힌 현장이기도 했다. 남태령에서 전태일은 2030여성들을 비롯한 그 자리에 참여한 모든 이들의 마음 한 가운데 들어왔다. 그래서 관건은 우리가 어디에서 어떻게 정보를 습득하는가라고 할 수 있는 셈이다. 당연히 더 궁금해지는 것은, 이 여성들은 그날 남태령에 가자는 정보를 어디에서 들었는가 일 것이다. 그리고 왜 이 정보에 2030여성들은 긴밀하게 대응했고, 5060 남성들이나 다른 연령대 남성들은 왜 그렇게 곧바로 대응하지 않았는가 돌아보게 된다.

이스라엘이 진격해온다는 소식을 들은 이가 라합뿐이었을까? 이 정보를 얻고서 라합은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결정했다. 라합의 결정은 결코 사소하지 않다. 마침내 여호수아의 이스라엘이 여리고를 점령했을 때, 라합 본인만이 아니라, 그의 부모, 그의 아버지의 가족과 그에게 속한 모든 이가 살 수 있었다(수 6:25). ‘그에게 속한 모든 이’라는 표현은 특이하게도 여호수아 7장에서도 볼 수 있다. 여리고 성이 함락되었을 때, 아간은 하나님께 바쳐야 하는 재물을 빼돌렸고, 결국 그로 인해 처벌된다. 아간 본인만이 아니라, ‘그의 아들들과 그의 딸들과 그의 소들과 그의 나귀들과 그의 양들과 그의 장막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돌로 쳐 죽게 하였다(수 7:24-25). 같은 표현이 라합에게 그리고 아간에게 나란히 쓰인 것을 보면, 여호수아의 이스라엘은 그저 혈통의 나라가 아니라, 라합으로 대표되는 ‘올바른 행동’, 아간으로 대표되는 ‘불의한 행동’에 따라 살고 죽는 공동체임을 알 수 있다. 라합과 그에게 속한 모든 이들이 살아남을 통해, 여호수아의 이스라엘이 그저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이유로 전부 제거해 버리는 폭력적 종교 집단이라고 일방적으로 규정할 수 없게 된다. 여호수아가 라합을 살린 것 같지만, 사실, 라합이야말로 여호수아의 이스라엘을 의미있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라합은 자신의 가족을 살린 이일 뿐 아니라, 이스라엘이 누구여야 하며 어떤 이들이어야 하는지를 증언하는 이이기도 하다. 혼란스러운 격변의 시대를 살면서 라합은 좋은 정보를 얻었고, 그에 합당한 행동을 자신의 삶 전부를 다하여 선택하고 행동하였으며, 자신만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속한 모든 이들을 살렸다. 죽음이 가득하던 시대였지만, 라합은 생명을 살리는 사람이었다.

무엇인가를 알게 된다는 것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와 직접적으로 결부된다. 무엇을 아는 것은 어디에 있는가와도 직접적으로 결부된다. 남태령과 같은 공간에 있었다는 것 자체가 그 자리에 함께 이들의 삶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음을 생각할 때, 우리의 자리를 돌아보게 된다. 우리네 교회 공동체는 어떤 정보를 습득하고 있는가? 우리네 신앙 공동체는 어디에서 정보를 습득하고 있는가? 여전히 우리는 40대에서 60대 남성으로 이루어진 모임에서 회의하며 정보를 다루는가? 라합과 그에게 속한 모든 이들은 살았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정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것은 ‘각성한 4050, 깨어있는 5060’이 아니라, 남태령 그 자리에 있었던 이들, 전태일의료센터 기금 모금에 열렬히 참여했던 이들, 그들 곁에 있고, 그들에게 귀 기울이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