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교회와 공공성 포럼 칼럼 #11 (2025.11.1)
탐구하되 겸손하게
김형원 교수(기독연구원 느헤미야 조직신학)
한국과 미국의 관세 협정 타결에 대해 다양한 이야기들이 오갑니다. 어떤 사람은 이 협상이 최선의 성과를 낸 것이고 이재명 대통령의 지혜와 뚝심의 결과라고 칭송합니다. 반면에 결국 미국에게 굴복한 것 아니냐면서 실패한 협상이라고 비판하는 보수적인 사람도 있고, 미국에 핵추진 잠수함을 승인받은 것이 한반도 비핵화에 걸림돌이 되는 큰 패착이라고 비판하는 진보적인 사람도 있습니다. 어느 입장이 맞을까요? 이 협상은 성공일까요, 실패일까요?
캄보디아 로맨스 스캠에 연루된 수많은 청년들에 대해서도 상반된 의견들이 나옵니다. 한쪽에서는 청년들이 한탕주의와 쉽게 돈을 벌려는 욕망 때문에 덫에 걸린 것이라고 비판하는가 하면, 다른 쪽에서는 청년들의 삶이 얼마나 팍팍하면 그런 유혹에 쉽게 넘어가겠느냐며 사회비판론을 펴기도 합니다. 이것은 청년 세대를 둘러싼 논쟁의 연장선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어느 쪽 견해가 맞을까요? 이 시대의 청년들은 문해력도 딸리고 어려운 일은 손도 대려고 하지 않고 쉽게 돈을 벌려고 하는 게으른 세대일까요, 아니면 설령 그런 모습이 있더라도 그것은 기성세대가 만든 잘못된 사회구조 탓이며 그런 점에서 청년들은 희생양이라고 봐야 할까요?
한국 교회 쇠퇴의 원인이 무엇일까요? 교회의 ‘공공성’의 약화 때문일까요, 교회 내부의 부패로 인해 사회적 신뢰를 잃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전도에 대한 열정이 사그라들었기 때문일까요? 어떻게 해야 세상이 더 좋아질 수 있을까요? 사회구조를 개혁하면 좋은 세상이 올까요? 아니면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제자로 변화되어 거룩한 삶을 살면 될까요?
사람들의 논쟁을 듣다 보면 어느 쪽 견해를 주장하든 사람들의 강한 확신을 느끼게 됩니다. 저마다 현학적인 사회 분석을 하고, 수많은 사회사상가, 철학자, 전문가들의 견해를 끌어오고, 여기저기 통계 자료들을 근거로 주장을 펼칩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으면 반인권적이고 반공동체적이고(진보적 입장에서 주장하는 사람에 따르면), 현실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를 전혀 모르는 순진하고 무식한(보수적 입장에서 주장하는 사람에 따르면) 사람이 될 것 같은 위축감을 줍니다. 자기 확신이 강한 사람들일수록 이런 경향이 심합니다.
이처럼 어느 한쪽 극단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입장에 대해 상당히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방의 견해가 ‘완전히’ 틀렸다고 하거나 심하면 ‘악’으로 규정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역사에서 이런 태도는 수많은 폭력적인 부작용을 만들어냈습니다. 자신과 입장이 다른 상대방을 성급하게 악마화하거나 이단으로 몰아붙여 박해하거나, 다름을 틀림으로 규정하여 공격하는 일들이 빈번했습니다. 사회에서는 물론이고 기독교에서도 이런 일이 동일하게 일어났습니다. 유아세례를 절대적으로 성경적인 것으로 확신하면서 재세례파를 박해했던 주류 개혁파들, 오직 침례 방식만을 고집하면서 다른 세례를 인정하지 않으며 분리주의적 행태를 보여준 침례교도들, 믿음은 행위를 수반한다는 주장을 ‘lordship salvation’이라고 비판하면서 행위구원론으로 몰아붙이는 ‘Grace only’ 신학자들, 젊은 지구론 외에 다른 창조론을 반기독교적이거나 이단이라고 비판하는 창조과학 신봉자들, 등등. 지금도 이와 유사한 일들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을 것입니다.
대립되는 주장들 사이에서 우리는 선뜻 어느 한쪽만 옳다고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고 느낄 때가 많지만, 세상은 물론이고 심지어 교회나 신학의 공론장에서도 대개 양극단을 옹호하는 ‘선명한’ ‘강한’ ‘사이다 같은’ 주장이 인기를 얻기에 우리도 한쪽을 택하라는 압력을 받게 됩니다. 그런가요? 그래야 하나요? 우리는 이것을 취하고 저것을 버려야 할까요? 어느 하나가 절대적으로 옳고 다른 하나는 절대적으로 틀린 것일까요? 그래서 우리는 ‘이것이냐 저것이냐’ 중에서 하나만을 선택해야 할까요?
그러나 성경을 좀 더 세심하게 들여다보고, 세상과 우리의 삶을 좀 더 멀리서 조망해보면, 오히려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양자택일이 핵심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히려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은’, 혹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것 같은 경우들이 훨씬 더 많아 보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과 그가 창조한 세상, 온갖 한계로 제한된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좀 더 정확하게 묘사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전지(全知)한 존재가 아니며 이해와 판단의 한계를 가진 인간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양자택일적인 성급하고 극단적인 태도는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either/or(이것이냐 저것이냐) 사고방식’을 강하게 드러내는 사람들일수록 교만할 가능성이 큽니다. 물론 그런 사람들의 주장이 옳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정반대일 가능성도 얼마든지 존재합니다. 특히 복잡한 사안이거나,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영역이거나, 딜레마와 관련된 주제라면 either/or 사고방식으로 성급하게 재단하는 것은 위험하며, 또한 교만한 방식입니다. 사안이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주장만 절대적으로 옳고 그것과 조금이라도 다른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을 강하게 비판하면서 몰아낸다면, 아무리 인권과 평화와 정의를 주장한다고 해도 오히려 그런 행태 자체가 반인권적이고 호전적이고 불의한 것일 가능성이 큽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들은 양자선택적 사고방식(either or way of thinking)이 아니라 양립적 사고방식(both-and way of thinking)이 훨씬 더 적합할 것입니다. 두 가지 견해의 진실 가능성이 6대4이든, 7대3이든, 심지어 9대1이든, 자신과 반대되는 입장을 마치 0인 것처럼 취급하면서 무시하는 것은 그 자체로 폭력입니다. 더 심각한 것은, 나는 내 입장이 더 진리에 가까운 쪽(6, 7이나 9)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정반대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판단은 언제나 오류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아무리 내 견해가 옳다고 확신해도 일말의 오류 가능성을 생각해야 합니다. 반대로 정말로 틀렸다고 생각하는 상대편 견해가 오히려 옳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때로는 각각이 진리의 일부만 가지고 있기에 양쪽이 협력하거나 조화를 이루어야 참된 진리가 구성될 수 있다는 것도 생각해야 합니다. 이런 태도가 극단적 대립과 갈등과 투쟁으로 혼란스러운 세상에 조금이나마 대화를 가능하게 하고 타협을 이끌어내고 평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길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유한한 존재라는 것을 기억한다면, 성급하게 한쪽 극단으로 달려가려는 것을 멈추고, 나와 다른 견해를 섣부르게 정죄하는 태도를 버리고, 상대방을 존중하면서 끈기 있게 대화하고, 겸손한 자세로 더 깊이 성찰하고, 철저하게 자기 점검하고, 끈기 있게 탐구하는 자세를 견지하게 될 것입니다.